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근대 국가와 사회: 삼림 조성의 경우


화석 연료가 인류의 주 에너지원이 되기 전,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나무였다. 나무는 열을 공급하는 땔감으로 뿐만 아니라, 선박, 농기구, 마차 등 각종 산업제품의 주 원료로서 가장 중요한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질 좋은 나무가 많이 나는 삼림은 오늘날의 유전과도 같았다. 삼림이 울창했던 독일 동부나 북유럽은, 말하자면, 16세기의 중동과도 같았다.

목재가 중요하다보니, 삼림 관리야 말로 국가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좋은 목재는 국부에 결정적일 뿐 아니라, 세입의 주된 원천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삼림의 과학적 관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삼림을 하나의 거대한 광산으로 보는 것, 목재를 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는 시각이 근대 삼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시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재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삼림관리, 즉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삼림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제임스 스콧의 저서 '국가처럼 보기'에는 이런 근대 삼림학의 바탕에 깔린 공리주의적 시각에 대한 좋은 설명이 나온다.

"공리주의 국가가 (상업적) 나무만 보느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숲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삼림에 대한 공리주의의 관점이 추상적이고 부분적이라면,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독특한 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추상화는 잠재적으로 모든 분석 형태에 필수적이며, 국가 관료에 의한 추상화가 그들 고용주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정적 이해를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디드로의 <백과사전>에서 '삼림'이라는 항목은 거의 전적으로 삼림의 생산물과 세금, 총수입, 이윤 등 국가 관료가 산출할 수 있는 '공적 유용성'과 관련되어 있다. 동식물 서식지로서의 삼림은 사라지고 이윤이 남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으로 대체된 것이다. 여기서 재정적-상업적 논리는 일치한다. 두 논리가 확고하게 손익계산에 고정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자연을 체계화하는 데 사용하는 어휘는 전형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드러낸다. 사실, 공리주의 담론은 '자연'이라는 용어를 '자연자원'으로 대체하는데, 이는 인간의 사용목적에 부응할 수 있는 자연의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따라서 가치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독일 삼림과학이 성문화되고 교육가능한 엄밀한 기술적-상업적 학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서 삼림을 하나의 '상품 기계'로 크게 단순화시킨 노력 덕분이었다. 그 엄밀성을 위한 조건은 선택한 종의 산출량과 재배 및 벌채 비용에 직접 관련된 변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변수가 엄격하게 통제되거나 불변이라는 가정이다. 우리가 앞으로 도시계획, 혁명 이론, 집단화, 농촌 재정착 등에서 살펴보겠지만 '통제 바깥'에 놓여있는 전체 세계는 이러한 기술적 비전을 성가시게 만들며 되돌아온다."

-제임스 스콧 '국가처럼 보기'

문제는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삼림, 즉 하나의 '상품기계'로서의 삼림이라는 것이 사실은 목재 생산의 극대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었다.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것이 프로이센이었다. 일찍부터 삼림관리에 대한 학문이 발달한 프로이센에서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목재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삼림 조성이 본격화된다. 곧고 질 좋은 목재로 유명한 노르웨이가문비 나무같은 한 종으로 삼림을 채워버리는 것이었다. 동일한 종, 동일한 수령으로 채워진 삼림은 마치 논이나 밭과 같이 관리해서 일정 주기로 목재를 얻는다는 것이 이런 발상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는 본래의 의도와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독일 사례에서는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한 삼림으로부터 생물학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업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는 침엽수림의 두 번째 순환이 있고 나서 뼈아프게 명백해졌다...최악의 경우를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인 '숲의 죽음'이 독일어 어휘에 추가되었다.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균류와 곤충, 포유류와 식물상 간의 공생 관계, 토양 형성과 양분 흡수를 포함하는 유난히 복잡한 과정이 명백하게 붕괴함으로써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결과 대부분은 과학적 삼림의 극단적 단순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동일 수령, 동일종의 삼림은 서식개체의 다양성이 낮을 뿐 아니라 큰 폭풍우 앞에 한층 취약하다. 곧, 종과 수령의 균일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일례로 노르웨이가문비 나무 역시 그 종에 특화된 모든 '해충'에게 훌륭한 서식지를 마련해주었다. 이들 유해생물 집단은 전염병 수준까지 증가했고 산출량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비료, 살충제, 살균제, 쥐약 등에 높은 비용을 치르게 했다. 최초 순환에서 대부분의 노르웨이가문비나무 삼림이 예외적으로 잘 성장한 것은 다양하게 구성된 원시림을 대체하기 이전에 오랜 기간동안 축적된 토양을 먹고 살았기 (혹은 고갈시키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자원이 고갈되자 성장률이 가파르게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제임스 스콧, 위의 책

삼림이라는 복잡한 생태계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에 맞춰 폭력적인 방식으로 삼림을 개조한 것이 결국 파국을 낳았다.  제임스 스콧은 이런 삼림의 극단적 단순화가, 근대 국가가 행했던 많은 야심찬 사회개조 사업들-소련의 집단 농장화같은-이 어떻게 결국 파국을 낳고 말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고 전한다. 국가는 사회를 단순화시키려 한다. 사회는 국가가 파악하는 것보다 더 복한한 현실이다. 국가는 그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켜서 사회를 통제하려 한다. 근대 역사의 한 축은 바로 이러한 국가와 사회 간의 작용-반작용의 역사이다.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정리


사회주의는 외연이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일반적 인식 중 명백한 오해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가 정확히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건 오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계몽주의 시대 유럽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개념인데, 당초에는 지금처럼 정치적 함의가 강한 말이 아니었다. 사적 소유가 철폐된 특정한 사회조직 방식을 가리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에 사회주의는 인간이 본성 상 사회를 이루고 살려는 성향이 있으며, 사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된 말이었다. 

사회주의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적 의미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초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 팽창을 시작할 때 쯤이었다. 이 때 개인주의는 시장 메커니즘과 자유교환 경제와 경쟁 등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반개인주의라는 맥락에서 반자본주의적인 의미를 얻기 시작했다.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188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노동계급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자발적, 결사, 협동체, 기타 자발적 집단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생된 자코뱅 민주주의의 전통과 맑스주의가 노동운동 내에서 점점 힘을 얻으면서 이 운동 내에서 정치권력 장악의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사회주의 역시 이와 결부되어 국가권력 장악에 관한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에 와서도 사회주의는 정치 권력 방악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 요구 정도에 머물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권력 장악 후의 사회 조직 논의에 대해 무관심했다.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에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자는 급진적 요구만이 있을 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이는 사회주의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마르크스-엥겔스가 사회주의 이상 사회에 대한 논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지에만 몰두 했을 뿐 권력을 잡은 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가 진지하게 권력 장악 이후의 사회 건설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좌에 오른 후부터이다. 이 때 자본주의는 전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자본주의 세계는 2번의 세계대전과 한번의 대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발흥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겪었다.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였던 자유주의는 완전히 몰락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이런 세상에 등장했다. 후진적인 농업국가에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처럼 여겨졌다. 1917년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도 사민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세력들도 이제 실제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전에 집권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가 부족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기 바빴다.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각종 사회주의 정책들의 문제는 대부분 자본주의의 위기와 붕괴가 진행되던 와중에 해결책으로 제시됐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실효성을 잃은 결과였다. 

1917년 이후 사회주의는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20세기 중후반동안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을 지배하는 거대한 블록을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지배한 것은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들이 직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출된 논리였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적 전통이라고는 전제주의가 전부였고, 완전히 고립되고 가난하면서 외세의 위협에 처한 후진농업국가였다. 산업이라고는 빈약한 군수산업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생존해야 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채택된 정책은 급속한 산업화였다.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투쟁을 통해 집권한 스탈린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는 과제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근대화 계획을 세웠다. 5년 단위의 개발 계획, 특정한 생산 목표, 그를 위한 인력과 물자의 강제 재배치 등이 그 계획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무시했고, 한가지 목표-강력한 군대 건설을 위한 공업화-에 다른 모든 목표를 존속시키는 경제였다.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경제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였으며,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대중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성장과 함께 대중 교툥과 의료, 복지도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당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이 참고할 수 있는 경제모델은 1차대전 당시 교전국들이 운영했던 전시경제 모델이 전부였다. 전시경제는 계획, 경제의 공적인 운용, 노동력의 동원 등이 요구되는데 이런 동원은 주로 노동조합과 일부 공공복지 제도를 통해 이뤄졌다. 볼셰비키는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 모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런 배경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집권세력이 국가의 중앙집권적 조치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선호하도록 이끌었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소 거리가 있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정책을 지배한 것은 대공황과 대량실업의 경험이었다. 사민주의는 혁명이 아닌 선거로 집권한 합법적 정치 권력이었다. 선거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했기에 사민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인식과는 달리 복지국가의 주요 개념들은 주로 보수주의에서 나왔다. 자유당, 사회카톨릭 세력, 사회의식을 가진 관료 등이 전후의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각종 정책을 입안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지방정부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이었다. 

사민주의는 핵심문제는 대량실업을 어떻게 없애느냐였다. 19세기 식의 자유주의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전후의 폭넓은 합의가 사민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을 포함한, 국민경제의 수요 관리를 경제의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2차대전과 뒤이은 전후의 호황은 대량소비 사회를 가능케 했다. 사민주의가 달성한 완전고용은 기본적으로 이런 대량소비 사회에, 국가의 노후보장, 공공의료보험 등 사회보험 제도, 불경기의 공공사업 등을 통한 총수요 관리 등이 다양하게 뒤섞인 혼합경제의 결과였다. 1970년대에 와서 이런 혼합경제가 더이상 잘 굴러가지 않게 되면서 산자유주의가 새로운 대안이 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에 소비에트 사회주의도 위기에 처했다. 그 체제는 누적된 내부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 생길때와 같이 급격한 속도로 사라졌다. 자본주의도 1970년대에 다시 한번 위기에 처했지만, 그 체제는 여전히 상당 수준의 유연성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전후의 유례없는 풍요를 가능케했다. 완전고용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각종 상품을 통해 인간 생활 수준을 두드러지게 끌어올렸다. 사회주의의 물질적 근거가 악화된 것이다. 또 사회주의의 전형이나 여겨졌던 제도들이 자본주의에 흡수됐다. 복지제도 뿐 아니라, 산업의 공적 조정과 계획 등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됐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흐려진 한편, 소비에트는 자멸했다. 그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이 경제에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가격제도는 물론이며, 최소한의 합리적인 생산을 조정할 경제적 메커니즘, 즉 상대적 비용의 기준조차 없다는 것, 즉 시장의 관전한 결여였다. 이런 결점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필요한 많은 서비스들을 지하경제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