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는 외연이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일반적 인식 중 명백한 오해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가 정확히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건 오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계몽주의 시대 유럽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개념인데, 당초에는 지금처럼 정치적 함의가 강한 말이 아니었다. 사적 소유가 철폐된 특정한 사회조직 방식을 가리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에 사회주의는 인간이 본성 상 사회를 이루고 살려는 성향이 있으며, 사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된 말이었다.
사회주의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적 의미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초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 팽창을 시작할 때 쯤이었다. 이 때 개인주의는 시장 메커니즘과 자유교환 경제와 경쟁 등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반개인주의라는 맥락에서 반자본주의적인 의미를 얻기 시작했다.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188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노동계급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자발적, 결사, 협동체, 기타 자발적 집단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생된 자코뱅 민주주의의 전통과 맑스주의가 노동운동 내에서 점점 힘을 얻으면서 이 운동 내에서 정치권력 장악의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사회주의 역시 이와 결부되어 국가권력 장악에 관한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에 와서도 사회주의는 정치 권력 방악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 요구 정도에 머물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권력 장악 후의 사회 조직 논의에 대해 무관심했다.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에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자는 급진적 요구만이 있을 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이는 사회주의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마르크스-엥겔스가 사회주의 이상 사회에 대한 논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지에만 몰두 했을 뿐 권력을 잡은 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가 진지하게 권력 장악 이후의 사회 건설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좌에 오른 후부터이다. 이 때 자본주의는 전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자본주의 세계는 2번의 세계대전과 한번의 대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발흥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겪었다.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였던 자유주의는 완전히 몰락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이런 세상에 등장했다. 후진적인 농업국가에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처럼 여겨졌다. 1917년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도 사민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세력들도 이제 실제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전에 집권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가 부족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기 바빴다.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각종 사회주의 정책들의 문제는 대부분 자본주의의 위기와 붕괴가 진행되던 와중에 해결책으로 제시됐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실효성을 잃은 결과였다.
1917년 이후 사회주의는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20세기 중후반동안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을 지배하는 거대한 블록을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지배한 것은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들이 직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출된 논리였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적 전통이라고는 전제주의가 전부였고, 완전히 고립되고 가난하면서 외세의 위협에 처한 후진농업국가였다. 산업이라고는 빈약한 군수산업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생존해야 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채택된 정책은 급속한 산업화였다.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투쟁을 통해 집권한 스탈린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는 과제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근대화 계획을 세웠다. 5년 단위의 개발 계획, 특정한 생산 목표, 그를 위한 인력과 물자의 강제 재배치 등이 그 계획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무시했고, 한가지 목표-강력한 군대 건설을 위한 공업화-에 다른 모든 목표를 존속시키는 경제였다.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경제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였으며,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대중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성장과 함께 대중 교툥과 의료, 복지도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당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이 참고할 수 있는 경제모델은 1차대전 당시 교전국들이 운영했던 전시경제 모델이 전부였다. 전시경제는 계획, 경제의 공적인 운용, 노동력의 동원 등이 요구되는데 이런 동원은 주로 노동조합과 일부 공공복지 제도를 통해 이뤄졌다. 볼셰비키는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 모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런 배경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집권세력이 국가의 중앙집권적 조치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선호하도록 이끌었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소 거리가 있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정책을 지배한 것은 대공황과 대량실업의 경험이었다. 사민주의는 혁명이 아닌 선거로 집권한 합법적 정치 권력이었다. 선거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했기에 사민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인식과는 달리 복지국가의 주요 개념들은 주로 보수주의에서 나왔다. 자유당, 사회카톨릭 세력, 사회의식을 가진 관료 등이 전후의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각종 정책을 입안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지방정부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이었다.
사민주의는 핵심문제는 대량실업을 어떻게 없애느냐였다. 19세기 식의 자유주의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전후의 폭넓은 합의가 사민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을 포함한, 국민경제의 수요 관리를 경제의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2차대전과 뒤이은 전후의 호황은 대량소비 사회를 가능케 했다. 사민주의가 달성한 완전고용은 기본적으로 이런 대량소비 사회에, 국가의 노후보장, 공공의료보험 등 사회보험 제도, 불경기의 공공사업 등을 통한 총수요 관리 등이 다양하게 뒤섞인 혼합경제의 결과였다. 1970년대에 와서 이런 혼합경제가 더이상 잘 굴러가지 않게 되면서 산자유주의가 새로운 대안이 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에 소비에트 사회주의도 위기에 처했다. 그 체제는 누적된 내부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 생길때와 같이 급격한 속도로 사라졌다. 자본주의도 1970년대에 다시 한번 위기에 처했지만, 그 체제는 여전히 상당 수준의 유연성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전후의 유례없는 풍요를 가능케했다. 완전고용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각종 상품을 통해 인간 생활 수준을 두드러지게 끌어올렸다. 사회주의의 물질적 근거가 악화된 것이다. 또 사회주의의 전형이나 여겨졌던 제도들이 자본주의에 흡수됐다. 복지제도 뿐 아니라, 산업의 공적 조정과 계획 등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됐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흐려진 한편, 소비에트는 자멸했다. 그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이 경제에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가격제도는 물론이며, 최소한의 합리적인 생산을 조정할 경제적 메커니즘, 즉 상대적 비용의 기준조차 없다는 것, 즉 시장의 관전한 결여였다. 이런 결점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필요한 많은 서비스들을 지하경제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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