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6일 화요일
참고글:한국 주택시장의 문제
"우리나라의 아파트 분양 시장은 자유경쟁 시장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품시장과는 매우 다른 시장이다. 우선 토지의 공급권한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통제한다. 권력자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바뀐다. 토지를 사서 설계도만 가지고 분양을 하는 건설회사가 판매가격을 결정한다. 분양가격을 결정할 때 원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얼마에 내놓으면 이익을 많이 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토지를 평당 600만원에 사서 건축비 400만원을 들여 원가가 평당 1000만원인 집을 평당 3000만원에 분양한다. 소비자는 선택권이 별로 없다. 정부가 땅을 공급하고 건설회사가 분양가를 내놓으면 미래의 가격 상승 여부를 예상해 살지 말지를 판단할 뿐이다.
... 그렇다면 한국 부동산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가 직면한 문제의 태반이 부동산 가격 상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빈곤층 증가, 가계부채와 이에 따른 금융불안 문제, 저축은행 부실화 문제, 저출산과 젊은이들의 불만, 교통난 등은 부동산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부동산 문제의 핵심적인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건설업자, 토지소유자, 관료 등 소수의) 이권집단들에게 농락당해온 시장이며, 그들은 공급을 적게하는 방법으로 부동산 가격을 올려서 이권을 챙겨왔고 대다수의 국민들을 고통에 빠드렸다는 것이다. 즉, 공급부족이 핵심문제라고 생각한다.
...2010년말 현재 서울은 979만 가구에 350만 가구로 되어있다. 주택은 253만호로 조사되었다. 97만호나 차이가 난다. 주택수 통계를 낼 때 다가구주택을 한채로 잡는다. 그 중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20여만호를 제외해도 80만 가구, 즉 인구의 20%가 열악한 주거에서 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80만 가구 200만명 정도는 다가구주택의 일부, 옥탑방, 반지하방, 여인숙, 고시원 심지어 비닐하우스에서도 산다.
...전국적으로 보면 2010년말 현재 총 주택수는 1468만채이며 거주단위의 가구수는 1734만이다. 무려 266만 가구가 부족하다. 23만호의 오피스텔은 법적으로 주택이 아니므로 주택수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 2010년 정부의 공식 주택보급률 101.9%는 실제거주단위 기준 주택수 1767만채를 가구수 1734만으로 나눈 수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다는 통계의 허구성을 간파해야 한다. "
박창기, <혁신하라, 한국경제> 중에서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참고글: 막스 베버의 의회주의에 관한 단상
막스 베버에게 있어 현대의 정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관료제 지배를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느냐에 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버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가는, 한 마디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가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관료제의 지배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런 책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 지배 하에서 특정 정책이나 정치적 결정의 책임 소재는 흔히 모호해지며, 그 업무의 전문성이나 비밀성에 비춰볼 때 일반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기 어려운 성질을 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가의 중요한 임무는 그런 행정의 불투명성과 책임소재의 모호함으로 빚어지는 결과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 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베버가 간단히 제시하는 것은 의회의 조사권이다. 오늘날의 국정조사를 생각하면 된다. 베버는 의회의 조사권을 확대함으로써 행정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그 조사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즉 정치인들이 적절한 전문성을 쌓을 기회도 증대된다고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정조사가 그와 같은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따로 고찰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더 폭 넓게, 약간은 모호하게 말하자면, 베버는 행정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 우위는 행정 각 부의 장관과 같은 핵심적인 정무직을 엽관 인사로 채우는 것이다. 이 것은 오늘날 우리의 직관과 배치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되는 관료들이 장관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정치 실세들이 장관을 하면 행정부 전체가 정치논리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가.
베버는 그 같은 행정의 정치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베버 자신이 세상을 상쟁하는 가치들 간의 투쟁의 장이라 생각했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의회는 선거를 통해 인민들에게 주기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 즉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대해 비교적 투명하게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투명한 책임성 자체가 정지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책들의 결과에 대해 숙고하고, 장관 자리에 신중한 인사를 하게 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 같은 베버의 통찰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얼마나 유의미한가.
무엇보다 우려되는 일은 정치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정치적/당파적/분열적이라는 말은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된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능과 비생산적 세싸움, 막말의 대명사처럼 비춰진다. 50%도 안되는 투표율로 당선된 299명의 의원들이 사회 전체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균열, 즉 입장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국회의 정치적 대립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 정치적 대립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회 전체와 괴리된 상황에서 국회 자체의 무능은 더욱 도드라진다.
국회가 무능해진 이때 실제로 국가기구를 지배하는 이는, 대개 관료라 베버는 보았다. 한국에서는 관료와 재벌 및 기득권 세력, 보수 언론간의 삼각연합 체제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한다. 이 삼각연합이 독점하는 국가의 폭력수단은 거리에서는 곤봉과 방패로, 철거현장에서는 용역깡패로, 법원에서는 입법을 해대는 법관으로 현현한다. 방상훈의 개들은 그 뒤에서 법치를 노래하며 펜대를 굴린다. 덕분에 시민들은, 인민들은 거리에서는 곤봉에 얻어맞고 철거현장에서는 불에 타 죽으며 법원에서는 무전유죄를 선고받는다.
이러니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가족, 믿을 건 가족 뿐이다. 가장이 무너지면 다 같이 동반자살, 디 엔드. 자살률 1위의 혁혁한 공범자들이 자살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장 격하게 꾸짖는 개 같은 현실. 벤야민의 말처럼 "승리하는 적 앞에서는 죽은 자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정치적인 것이 귀환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현재 한국의 국가기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들의 연합에 균열을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에게 있어 정치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파적이고 주관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베버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의회주의의 확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의회는 책임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양성하는 (그나마 가장 나은) 현실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회에서 그 같은 것이 가능할까. 한국의 정치는 자꾸 거리로 나가고 있거나 인터넷 상으로 들어가고 있지 국회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최재천 같은 이들이 재선에 실패하고 전여옥 같은 이들이 당당히 재선뺏지를 다는 현실이라면 국회를 닫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고글: 의회 리더십과 관료제의 관계/막스 베버
"현대 의회는 우선 관료제라는 수단에 지배받는 피지배자들의 대표단체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층의 최소한의 내적 동의는 모든 지배가, 심지어 가장 잘 조직화된 지배까지도 지속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공적 권력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의회와 사전 협의를 거친 법 제정이 의무적이며, 무엇보다 예산안이 필수적이다. 신분차등법이 생겨난 후 지금까지 국가의 자금조달 방식, 즉 예산권에 대한 처분은 의회의 결정적인 권력수단이었다.
물론 의회가 정부 지출과 법령의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또는 별 의미가 없는 발의를 함으로써 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강력하게 피력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정치적 지배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아니다. (이 경우) 의회는 '소극적 정치'만을 할 수 있으며, 적대적 권력과도 같은 행정 지도자들과 대립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회는 행정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얻을 뿐이며, 단지 제동장치로서, 즉 무능한 불평꾼들과 잘난체 하는 자들의 모임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한편 관료제는 의회와 유권자에게는 엽관 운동가와 심복의 카스트로 나타나는데, 이들 엽관 운동가와 심복은 인민을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활동의 대상으로 취급할 뿐이다.
의회가 다음과 같은 것을 관철시키면 상황은 달라진다. 행정 지도자는 의회에서 곧장 충원되든지(본래의 의미에서의 '의회제도'), 명백하게 표현된 다수의 신뢰를 얻거나 최소한의 불신을 피해야만 행정 지도자가 관직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의회를 통한 지도자 선출), 행정 지도자는 이러한 근거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고 의회와 그 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지도자의 의회에 대한 책임성), 행정은 의회에서 선택된 노선을 따라야 한다는 것(행정에 대한 의회의 통제) 등이 관철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회의 지배 정당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국가 행정의 적극적인 공동 참여자이다. 이 때 의회는 적극적 정치의 한 요소가 된다."
- 막스 베버,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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