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5일 월요일
참고글: 막스 베버의 의회주의에 관한 단상
막스 베버에게 있어 현대의 정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관료제 지배를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느냐에 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버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가는, 한 마디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가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관료제의 지배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런 책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 지배 하에서 특정 정책이나 정치적 결정의 책임 소재는 흔히 모호해지며, 그 업무의 전문성이나 비밀성에 비춰볼 때 일반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기 어려운 성질을 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가의 중요한 임무는 그런 행정의 불투명성과 책임소재의 모호함으로 빚어지는 결과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 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베버가 간단히 제시하는 것은 의회의 조사권이다. 오늘날의 국정조사를 생각하면 된다. 베버는 의회의 조사권을 확대함으로써 행정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그 조사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즉 정치인들이 적절한 전문성을 쌓을 기회도 증대된다고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정조사가 그와 같은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따로 고찰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더 폭 넓게, 약간은 모호하게 말하자면, 베버는 행정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 우위는 행정 각 부의 장관과 같은 핵심적인 정무직을 엽관 인사로 채우는 것이다. 이 것은 오늘날 우리의 직관과 배치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되는 관료들이 장관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정치 실세들이 장관을 하면 행정부 전체가 정치논리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가.
베버는 그 같은 행정의 정치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베버 자신이 세상을 상쟁하는 가치들 간의 투쟁의 장이라 생각했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의회는 선거를 통해 인민들에게 주기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 즉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대해 비교적 투명하게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투명한 책임성 자체가 정지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책들의 결과에 대해 숙고하고, 장관 자리에 신중한 인사를 하게 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 같은 베버의 통찰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얼마나 유의미한가.
무엇보다 우려되는 일은 정치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정치적/당파적/분열적이라는 말은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된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능과 비생산적 세싸움, 막말의 대명사처럼 비춰진다. 50%도 안되는 투표율로 당선된 299명의 의원들이 사회 전체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균열, 즉 입장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국회의 정치적 대립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 정치적 대립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회 전체와 괴리된 상황에서 국회 자체의 무능은 더욱 도드라진다.
국회가 무능해진 이때 실제로 국가기구를 지배하는 이는, 대개 관료라 베버는 보았다. 한국에서는 관료와 재벌 및 기득권 세력, 보수 언론간의 삼각연합 체제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한다. 이 삼각연합이 독점하는 국가의 폭력수단은 거리에서는 곤봉과 방패로, 철거현장에서는 용역깡패로, 법원에서는 입법을 해대는 법관으로 현현한다. 방상훈의 개들은 그 뒤에서 법치를 노래하며 펜대를 굴린다. 덕분에 시민들은, 인민들은 거리에서는 곤봉에 얻어맞고 철거현장에서는 불에 타 죽으며 법원에서는 무전유죄를 선고받는다.
이러니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가족, 믿을 건 가족 뿐이다. 가장이 무너지면 다 같이 동반자살, 디 엔드. 자살률 1위의 혁혁한 공범자들이 자살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장 격하게 꾸짖는 개 같은 현실. 벤야민의 말처럼 "승리하는 적 앞에서는 죽은 자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정치적인 것이 귀환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현재 한국의 국가기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들의 연합에 균열을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에게 있어 정치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파적이고 주관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베버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의회주의의 확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의회는 책임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양성하는 (그나마 가장 나은) 현실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회에서 그 같은 것이 가능할까. 한국의 정치는 자꾸 거리로 나가고 있거나 인터넷 상으로 들어가고 있지 국회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최재천 같은 이들이 재선에 실패하고 전여옥 같은 이들이 당당히 재선뺏지를 다는 현실이라면 국회를 닫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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