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1일 토요일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요약 정리



베링턴 무어에 따르면 근대 의회 민주주의의 확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르주아지 계급이다. 이 계급은 전통적인 토지소유계급, 즉 지주와 농업 노동계급, 즉 농민과 함께 근대화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세력이다.

중요한 것은 근대화의 과정이 반드시 의회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근대화된 국가는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이는 이후의 일이다. 근대화가 상당히 진전되던 시기인 20세기 초중반까지, 근대화의 길은 1가지가 아니었다. 무어는 근대화의 경로를 의회 민주주의 이외에도 권위주의적 독재정권과 그 심화된 형태인 파시즘, 그리고 농민혁명에 기초한 공산화 등 3가지로 나눈다.

근대화가 시작되는 그 때 당시 그 국가가 처한 국내의 정치사회적 상황, 즉 각 계급간의 역학 관계와 국가기구의 힘 등의 요소에 따라 각 국은 서로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핵심은 상업적, 산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시민, 즉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여부이다.

무어의 도식화를 살펴보면 부르주아가 얼마나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의회 민주주의냐,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냐, 농민혁명의 모습을 띈 공산화냐로 근대화 과정이 나뉜다.

부르주아 계급이 충분히 성장하고 지주 계급보다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대등하게 세력을 다툴 수 있는 경우 의회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이 그런 경우이며, 대혁명이 일어난 후 프랑스 역시 비슷하다. 이 과정이 평화적인 경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규모의 폭력이 일어나 구 질서와의 결정적 단절이 일어난다. 영국의 경우 청교도혁명과 인클로저, 미국의 남북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이 이런 경우다. 셋 모두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농업지배계급, 즉 지주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타도되거나 적어도 약화 또는 동화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 기구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국의 경우가 가장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었고, 국가 기구가 강했던 프랑스와 미국은 혁명이나 내전을 겪었다.

권위주의적 독재, 또는 파시즘은 주로 후발산업 국가에서 일어난다. 일본과 독일이 그런 경우다. 이 경우 자생적인 산업화가 일어난 국가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이 약하다.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계급은 급진적인 농민-노동자 동맹을 막기 위한 보수적 동맹을 맺는다.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 기구가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데, 그 축은 군비 확장이다. 농민들의 혁명적 잠재력은 억제된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인 농촌이 지주 계급과 강한 봉건적 유대가 있으며, 빠른 생산성 성장 등으로 착취가 상쇄됐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독일의 경우 융커들이 농노제를 다시 도입하면서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붕괴시키면서 혁명적 잠재력이 억제되었다. 농촌은 산업화에 따른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데, 보수정권은 그 중 몇몇 구호를 채택해 급진우익화하면서 파시즘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이 더디거나 거의 없고,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이 그대로인 곳에서는 농민 혁명에 기반한 공산화가 일어난다. 중국와 러시아가 그런 경우다. 두 경우 모두 전통적인 농업 사회의 질서가 거의 그대로인 채 다만 상층 지주 계급과의 연결고리가 끊기거나, 착취가 강화되는 경로를 겪었다. 이 때 공산당이 농민층과 제휴하면서 혁명의 모멘텀을 만들어냈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외부적 압력이 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경우 1차대전이 정부의 신뢰와 능력에 모두 압박을 가했고, 민중 봉기와 군대의 반란으로 권력의 진공 상태가 생겼다. 볼셰비키는 이 틈을 파고들어 권좌에 올랐다.

중국에서는 중일 전쟁이 공산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은 해안지역을 대부분 점거했다. 해안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와 전통적인 농촌 향신층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당은 일본의 침략으로 이런 지지세력의 쇠퇴를 겪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은 농촌 지역에서도 항일과 민족주의적 단합을 불러오는 요소였다. 이런 분위기에 올라탄 뒤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이 결합하면서 공산당은 권력에 다가갈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폭력적인 방식으로 농촌을 재조직화하고 전통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근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프랑스 역시 그런 농민사회가 도시 빈민들과 결합해 대혁명의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상층 농민들은 도시 빈민의 급진주의에 제동을 걸었고, 프랑스는 소농 중심의 사회와 산업화가 정치의 불안한 두축을 형성했다.

일본은 그와 달리 농촌 사회가 온전한채 근대화에 들어섰다. 일본의 독특한 점은 농촌 사회이 지주와 농민 사회 간에 봉건적 유대가 그대로 살아있어 혁명적 잠재력을 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동력 투입으로 생산이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는 쌀농사였다는 점도 혁명을 억제하는데 도움을 줬다. 1차 대전 이후 불황 속에 농민들의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는 육군 속에 흡수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군국주의에 동력을 제공했다.


2013년 9월 1일 일요일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
단편소설 전집

회고해 보면 헤밍웨이 문학 중 뛰어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들이 아니라 단편소설들이다. 단편소설 속에서는 그의 단점들이 드러날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호전성, 일부러 내세우는 남성성, 폭력과 강인함의 칭송, 허장성세, 낭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여성관 등이 짧은 단편소설 속에서는 모두 억제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강렬한 순간, 고립된 순간을 섬광처럼 빛내는 저 유명한 스타일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의 단편소설에는 진리에 대한 숭상, 독창적 산문,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대화, 감정의 분출 등이 돋보인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헤밍웨이는 전 세계 단편소설가들 중에서는 10대 작가 안에 들어간다.

 그는 죽음, 열정, 패배, 인간 희망의 끈덕짐 등 궁극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는 실제에 있어서 그리 폭넓지 않다. 그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소설가들 중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더 넓게 탐구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를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스탕달 곁에 세워 놓으면 그는 청년처럼 보인다. 헨리 제임스 옆에 서면 원시인처럼 보이고, 톨스토이 옆에서는 미성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적지 않다. 마크 트웨인이 쌓아놓은 기초 위에다 그는 영어 문장을 문학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어떤 한 순간의 진실, 통찰, 체험을 단 한 단어의 낭비도 없이 간결하게 드러낸다. 그가 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이런 테크닉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도덕적인 기여도 했다. 헤밍웨이는 언어의 정직성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그의 훌륭한 단편소설들(여기에는 중편소설 <노인과바다>도 들어간다)은 <립 밴 윙클>이나 <어셔 가의 몰락>처럼 미국 문학의 유산이 되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패배되지 않는 자>, <나의 아버지>, <살인자들>, <5만 달러>와 수십 편의 단편소설들은 지금 읽어도 또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생생하다. 저자가 느꼈던 그 심정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헤밍웨이의 인생관을 받아들이든 말든, 우리는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 투우장, 술집, 스키장, 경마장, 프로 복싱, 미시건의 삼림 등르 다룬 이 단편소설들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 단편소설들은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스타일을 초월한다. 정서와 정서의 통제가 여기에서는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직한 예술가가 진실을 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노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단편 전집>은 소위 핑카 비히아판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일한 전집본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

1799-1850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사촌누이 베트

스탕달(발자크는 스탕달의 진면목을 알아본 최초의 소수 중 하나였다)과는 다르게 발자크는 오늘날 널리 읽혀야 마땅한데도 잘 읽히지 않는다. 모두들 발자크의 업적을 인정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는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인가? 그 대답은 분명치 않다. 19세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결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저급한 취미, 거의 탐정소설 같은 멜로드라마의 선호, 변화하고 발전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능력의 부족, 지능의 부족 등이 그런 결점들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다 할 우뚝한 걸작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의 작품 중 잘 알려진 것 세 편을 추천했으나, 이 작품들이 그를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다른 작품 셋을 추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발자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써낸 50내지 60편의 장편소설들을 모두 읽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할 일은 너무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 다만 힘차고 다양하게 사회를 묘사한 작가라는 점에서는 발자크를 따를 자가 없다.

발자크는 스탕달식의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이였다.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야심만만한 젊은이 라스티냐크는 파리 시내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소리친다. "이제 우리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구나" 발자크 소설에는 많은 라스티냐크가 나온다. 젊은 시절의 발자크는 연필을 잡고서 키 작은 하나(나폴레옹)의 그림 밑에다 이렇게 썼다. "나폴레옹이 칼로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

이런 정복을 늘 염두에 두고서 발자크는 미친 사람처럼 살았고 51세에 과로로 죽었다. 어쩌면 항간에 들려오는 말처럼 5만 잔의 커피를 마신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방면에 별 재주도 없으면서 금융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연애에다 엄청난 정력을 소진했고 굉장히 많은 빚을 졌다. 그는 20여 년 동안 쓰고, 쓰고, 또 썼다. 하루에 열네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을 일했다. 오로지 학자들만이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써냈는지 알고 있는데 총 350권이 넘을 것이다. 그 중 100권 정도가 "인간 코미디"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의 광적인 포괄적 계획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역사와 비펴을 모두 담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악과 원칙을 모두 탐구하는 그런 방대한 계획을 구상 중이다. 이런 계획에서 나온 내 작품들에 '인간 희극'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암암리에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작가는 단테인데, 두 사람은 사실상 닮은 점이 거의 없다.

발자크는 당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하여 거대한 벽화를 완성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다.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사촌누이 베트>는 이 미완성 건물에 들어가는 세 개의 벽돌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작품은 비합리적인 열정을 다룬 것인데, 두 딸에 대한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코넬리아 없는 리어왕을 다루되 그 무대가 중산층 가정이라는 점만 다르다. 두 번째 작품은 탐욕을 연구한 것이고, 세 번째 작품은 여성의 복수심을 다룬 것이다. 세 작품 모두 발자크 소설의 단골 메뉴인 편집증 환자를 다룬다.

<고리오 영감>은 파리의 세속적 사회를 묘사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시골의 풍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강력한 힘과 생생한 세부사항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발자크는 현대 리얼리즘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세 작품 모두 발자크의 주요 관심사인 돈 문제에 집중한다. 그는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 돈을 잃고, 돈을 사랑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배신이 아니라 파산이었다. 발자크 이전의 작가들 중에서 발자크처럼 돈의 세계를 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경제경영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독특한 인물들의 악마 같은 힘을 추가해야 한다. 마담 마르네프, 그랑데, 곱세크, 고리오, 세자르 비로토 등은 입체적인 인물은 아닐지 몰라도 견고한 인물들이다. 발자크의 엄청난 작품 수, 확고한 현실 파악, 객관적이고 생생한 세부 사항 등을 감안할 때 이 결점 많은 거인에게 경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