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8일 화요일

극단의 시대 1장 총력전의 시대



1. 

...제1차 세계대전 대부분을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영국인과 프랑스인에게는 그 전쟁이 여전히 큰 '대전쟁'으로 기억된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징병연령 남성의 거의 20퍼센트를 잃었으며, 전쟁포로와 부상자, 그리고 영원히 불구가 되고 얼굴이 손상된 사람들-전쟁 잔산의 그리도 선명한 일부가 된 안면부상병-까지 포함한다면 상처없이 전쟁을 겪은 프랑스 군인은 3분의 1을 그리 넘지 않을 것이다. 500만명 내외의 영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승산도 거의 비슷했다. 영국인들은 특히 상층 계급에서 한 세대-50만명의 30세 이하 남성-를 잃었다. 문벌 좋은 남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장교가 될 운명이었던 상층 계급의 젊은이들은 자기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싸움터로 나갔고, 그 결과 맨 먼저 쓰러졌다.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에 대한 공포는 훨씬 더 어두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 자체가 당연히 전쟁과 정치 둘 다를 잔인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전쟁이 인명의 손실이나 여타의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채 행해질 수 있다면, 정치라고 해서 왜 그럴 수 없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복무한 대부분의 사람들-징집병이 압도적이었다-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확고한 전쟁혐오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감을 가지지 않은 채 이러한 종류의 전쟁을 겪었던 퇴역군인들은 때때로, 함께 목숨을 건 용기로 살았던 체험으로 인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수적 우월감-특히 여성 및 싸우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서-을 으꼈고 이러한 우월감이 전후 극우파의 초기 대열을 지배했다. 히틀러는, 일선의 군인이었던 것이 인격형성기의 체험이었던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반대의  반작용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가들에게는 1914-18년과 같은 피바다가 더이상 유권자들에 의해서 용인되지 않을 것임이 매우 명백한 사실로 보이게 되었다. 1918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전략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전략처럼 그러한 가정에 기초했다. 이는 단기적으로, 독일인들이 1940년에 서구에서 벌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와 영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데에 일조했다...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민주주의 정부들은 자국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적국 시민들의 생명은 마음대로 희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다루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왜 제1차 세계대전은 양쪽 진영의 주도적 열강 모두에 의해서 제로섬 게임으로, 즉 완전한 승리 아니면 완전한 패배만이 있을 수 있는 전쟁으로 수행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 전쟁이, 대체로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제한된 목표를 위해서 수행되었던 이전의 전쟁들과 달리 무제한적인 목표를 위해 수행되었다는 데에 있다. 제국의 시대에 정치와 경제가 융합되었다. 국제적 정치경쟁은 경제 성장 및 경제경쟁의 양상을 따랐는데 그것의 고유한 특징은 분명히, 한계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2. 

...제2차 세계대전은 양쪽 모두에게 종교전쟁 또는 근대적 용어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관련된 나라들 대부분에게 사활을 건 싸움이기도 했다...그러므로 전쟁은 무제한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계적으로 대량전을 총력전으로 확대했다. 

3. 

...1914년부터 줄곧, 전쟁은 여지없이 대량전이었다...수년동안 지속된 그러한 대중동원 수준은 현대적이고 생산성 높은 산업화된 경제와-또는 그러한 경제 대신에-주로 비전투원인구 부문에 맡겨진 경제가 없었더라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산업사회에서조차 그렇게 큰 인력동원은 노동력에 막대한 부담을 주며, 바로 그러한 사정이 현대의 대량전이, 조직된 노동자층의 힘을 강화한 동시에 가정 밖에서의 여성 고용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제1차 대전에서는 일시적으로, 2차대전에서는 영구적으로-이유이다. 

또한 20세기의 전쟁은 교전 중에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양의 생산물을 사용하고 파괴했다는 의미에서 대량전이었다...대량전은 대량생산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산은 조직과 관리 역시 요구했다. 비록 생산의 목표가 독일의 집단학살수용소에서처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생명을 합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일반적인 표현을 쓰자면, 총력전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알려진 것 중 최대의 사업-의식적으로 주직되고 관리되어야 하는-이었다. 

이는 또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정부들의 주된 문제는...어떻게 전쟁비용을 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전시경제의 지휘자로 보이게 된 것은 재무성이나 재무부였다...전쟁이 적어도 근대적인 규모로 수행되려면 전쟁비용을 계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시생산을-그리고 결국 경제 전체-을 관리하고 계획해야 했다...총력전은 의심의 여지없이 경영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양차 세계대전의 정부주도 전시계획경제들-총력전에서 이는 모든 전시경제를 의미했다-중에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전시경제가, 합리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행정의 전통과 이론을 갖춘 독일보다 훨씬 우월한 것으로 드러난 것은 기묘한 역설이다...(2차대전에서) 독일의 전시경제는 사실상 전 유럽을 이용해당으로 삼았으나, 서구의 교전국들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더 크게 파괴된 채 종전을 맞이했다. 그러나 더욱 가난해진 영국-1943년까지 민간인 소비량이 20퍼센트 이상 떨어졌다-은 평등과 공평한 희생과 사회적 정의를 좀 더 체계적으로 지향한 전시계획경제 덕분에, 대체로 주민들이 좀더 잘먹고 좀더 건강해진 상태로 종전을 맞이했다. 

...총력전은 명백히 기술을 진보시켰다. 왜냐하면 선진 교전국들 사이의 싸움은 군대의 싸움일 뿐 아니라, 군대에 효율적인 무기와 여타의 필수적 시설을 공굽하기 위해서 앞을 다투는 기술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나치 독일 역시 핵물리학의 성과를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없었다면, 원자폭탄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며, 20세기에 어떠한 종류의 핵에너지를 생산하더라도 들게되는 막대한 경비를 지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 경제에게는 전쟁들이 명백히 유익했다. 양차 세계대전 때의 미국의 성장률은 엄청나게 높았다. 특히 2차대전 때에는 1년에 약 10퍼센트의 비율로 성장했는데, 이는 전무후무하게 빠른 속도였다. 양차 대전에서 미국은 싸움터로부터 거리가 먼 동시에 동맹국들의 주된 군수공장이라는 사실로 득을 보았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생산을 조직적으로 확대해가는 경제역량으로도 득을 보았다. 아마도 양차 대전의 가장 지속적인 경제적 영향은 단기 20세기 전 시기 동안 미국 경제가 전 세계적인 우위를 누리게 한 데에 있을 것이다. 

4. 

...전쟁의 총력전적인 성격과, 양쪽 편 모두 비용에 상관없이 무제한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는 결의가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없이는 20세기의 더해가는 야수성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야수화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기묘한 민주화였다. 민간인들과 민간인들의 생활이 전략의 적절하고 때때로 주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에서처럼 민주주의적인 전쟁들에서도 적들이 몹시 가증스럽거나 적어도 경멸할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악마화되기었기 때문에, 총력전은 '인민의 전쟁'이 되었다. 양쪽 모두 전문직업인이나 전문가, 특히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된 전쟁은 상호 존중과 규칙의 인정 또는 심지어 기사도까지 배제하지 않는다...정치와 외교의 전문직업인들은 유권자들의 표나 신문들의 요구에 구애받지 않을 때, 싸우러 나오기 전에 악수를 하고 싸우고 난 뒤 함께 술을 마시는 권투선수처럼 상대편에 대해서 아무런 적의없이 선전포고하거나 강화를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세기의 총력전들은 비스마르크적 유형이나 18세기적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적 국민 감정이 동원되는 어떠한 전쟁도 귀족전쟁처럼 제한될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전쟁의 새로운 비인격성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일이 스위치를 누르거나 레버를 당시는 원격조작의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근면한 독일 관료들은 자신이 직접 관계한다는 느낌을 덜 가진 채, 폴란드행 집단학살수용소행 죽음의 열차들을 정규적으로 배차하는 시간표를 짤 수 있었다. 우리 세기의 최대의 잔인한 행위는 원격조작시스템 및 기계적 절차에 의한 비인격적인 잔인행위-특히 그런 잔인행위가 유감스럽지만 작전상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때-였다. 그렇게 세계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강제퇴거와 살안에 익숙해졌는데, 그런 현상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어서 그것을 지칭할 새로운 단어가 발명되어야 했다. '무국적자'나 '대량학살'이 그 예이다. 

...1차대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다. 1차대전이 낳았던 희망들, 즉 국제연맹이 이끄는 국민국가들의 평화적, 민주적 세계에 대한 희망, 1913년의 세계경제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환호한 사람들이 품었던) 피억압자의 봉기로 몇년 또는 몇달 내에 세계 자본주의를 뒤엎을 것이라는 희망조차 좌절되었다...2차대전은 실제도, 적어도 몇십년 동안은 해결책들을 낳았다. 파국의 시대 자본주의의 극적인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사라진 것 같았다. 서방의 세계경제는 황금시대에 돌입했다. 서방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질생활의 엄청난 개선에 힘입어 안정되었고 전쟁은 제3세계로 추방되었다. 이전의 식민 제국들은 사라졌더나 곧 무너질 운명이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집합체-이제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소련을 중심으로 조직된-가 경제성장 경주에서 서방과 겨룰 준비가 된 것으로 보였다. 

...1차대전 끝에 이렁난 혁명과 2차대전 끝에 일어난 혁명조차 서로 달랐다. 1차대전 뒤의 혁명들은...그 젅쟁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수록 무의미한 살육으로 보았던 것에 대한 혐오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 혁명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2차대전 뒤의 혁명들은 적들-독일과 일본, 보다 일반적으로는 제국주의-과의 세계적 투쟁-아무리 무서운 투쟁이라도 그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느낀-에 대한 대중적 참여에서 나온 것이었다. 


2014년 2월 9일 일요일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ㅡ일본

5장 아시아의 파시즘: 일본


1.위로부터의 혁명:보수파와 개혁파의 위협에 대한 지배 계급의 대응

초기 일본 봉건제에는 서구에서 자유 사회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던 국면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주와 봉신을 연결하는 봉건적 유대, 즉 계약적인 요소가 일본에서는 매우 약했으며, 반대로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과 의무라는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루이 14세가 그의 신하들을 베르사이유에 살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쇼군도 다이묘들에게 일정 기간 수도인 에도에 살도록 요구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 효과 또한 어느정도 비슷했다. 각종 사치 취미의 과시를 장려함으로써 쇼군은 귀족들의 위치를 약화시켰고 동시에 도시 상인계급을 자극했다...봉건귀족들이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어쓰는 일은 흔했으며, 반면에 상인들은 정치적인 보호를 다이묘에 의존했다.

사무라이의 경제 사정이 실제로 어떠했던 간에 일본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는 의심할 바 없이 쇠퇴하고 있었다. 쌀로 받는 봉급이 전사로서의 생활을 위한 유일한 물질적 기반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강제된 평화 아래서 무사들이 해야할 두드러지게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상인들의 부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권위가 나타나 무사적인 미덕과 우열을 겨루기 시작했다.

많은 무사들은 영주와의 유대를 끊고 주인없이 떠돌아 다니는 낭인이 되어 때로는 폭력의 사용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들은 곧 도쿠가와 시대 후반기에 사회적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도쿠가와 치하의 평화가 무사 계급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생기게 된 이 잠재적 폭발력은, 외세의 위협과 지도층의 정치적 수완이 없었더라면 일본 사회를 곳곳에서 파열시켜 다시 한번 봉건적 무정부 상태로 몰아갈 뻔 했다.

(한편) 상인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로 인해 그들은 사회의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상인들은 봉건주의적 도덕률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사고 방식에 대항할 수 있는 지성적인 저항논리를 발전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1860년대 초반의 농민 문제는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주권 국가로서의 일본의 독립 뿐만 아니라 바로 일본 사회의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왕정 복고는) 중앙의 권위와 여러 영지 사이의 낡은 봉건적 투쟁이었다. 그리고 초슈 뿐 아니라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일본의 프러시아"인 사쓰마, 즉 막부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던 영지들은 전통적인 농경 사회와 봉건적 충성심이 비교적 강력한 곳이었다.

(왕정복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평화적 질서의 확립으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봉건적 조직이 부분적으로 붕괴한데 있다 할 것이다. 이 같은 붕괴는 외세의 침략과 함께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으며, 왕정복고는 그 해결로 향하는 하나의 중요한 걸음이었다. 이 해결책이 지니는 정치적인 반동적 면모는 천황의 친정 운동이 끌어들인 여러 집단으로 대부분 설명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도쿄에 있던 귀족의 일부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 조직이 특히 강력했던 영지(초슈, 사쓰마, 도사 등)의 몇몇 불만에 찬 지도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주인에게는 불만이 많았지만, 봉건사회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던 사무라이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인 계층 중에서도 보수적이고 역사가 깊은 상인들은 이 투쟁 자체에서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 미쓰이 재벌의 경우에는 어느 경우에도 다 이익이 되었다. 다만 농민들 사이에서는 봉건 조직에 반대하는 경향을 찾을 수 있다. 이론상으로 볼 때 왕정복고는 주로 유교적인 전통적 상징의 기치 하에 일어난 것이었다...전통적인 질서는 직접적인 지적 도전을, 특히 상업적 이해 관계에서 생겨난 도전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사회의 분열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농업적 지배 계급의 일부가 도쿠가와 체제에서 이탈해 위로부터의 혁명을 강행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서는 외세의 위협이 결정적인 것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정부는 일치단결된 힘으로 소수 엘리트의 특권을 보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나갔다.

구 제도하에서 몰락 상태에 있던 사무라이 계층이 대거 참여한 새로운 지배자들은 1868년 이래로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중앙집권적인 근대 국가의 건설이었고, 다른 또 하나의 문제는 근대적인 공업 경제의 건설이었다. 이 두 가지는 일본이 독립 국가로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근대 사회가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효과적인 중앙 정부의 창설을 위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조치가 1869년 3월에 취해졌다. 이때 서부 지방의 대영지인 쵸슈, 사쓰마, 히젠, 토사 등이 "신성불가침의 보편적인 권위와 단일한 중앙 정부가 있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면서 영지를 자진해서 천황에게 바쳤다...훨씬 중요한 사실은 다이묘들이 영지를 헌납하기에 앞서 광범위한 협상을 통해 그들 수입의 반을 그대로 차지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낸 일이었다...2년 뒤인 1871년 새 정부는 모든 봉건 영지를 중앙 정부 통치 하의 지방 행정 단위로 분할한다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최종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정부는 정치적인 지위를 확립해가면서 동시에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게 되는데 그 효과는 훗날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났다. 이런 조치들의 일반적인 목적은 사람과 물건의 자유로운 왕래를 봉쇄했던 종래의 봉건적인 장애를 철거시켜 자본주의적 노선으로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1896년 정부는 모든 사회 계급에 대해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언했고 교역과 통신의 지방적 장벽을 철폐했고, 작물 재배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개인의 토지 취득권을 인정했다. 토지는 도쿠가와 치하에서 봉건적 사슬을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이제서야 다른 물품과 마찬가지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의 성격을 얻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대중적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평화적으로 수행키 위해서는 적어도 구 체제의 핵심멤버들에게 만만치 않은 보상을 치러줘야 했다. 1869년 정부는 다이묘들이 영지를 헌납했을 때 그들 수입의 절반을 하사했다...1876년 정부는 다이묘들의 수입과 사무라이의 봉급을 강제로 삭감해야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중요한 다이묘들은 상당히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으나 소영주들과 대다수 사무라이는 가혹한 삭감을 감수해야 했다. 요컨대 메이지 정권은 소수의 주요 지지자들에게는 푸짐한 대접을 해주었으며, 반대로 과거의 질서를 무너뜨린 힘의 중요한 근원인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873년 징병 제도가 실시됨으로써 사무라이에게 남아있던 모든 권한이 사실상 완전히 없어졌다..새로운 정책의 요지가 분명해지자 봉건 세력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새 정부를 공격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된다. 1877년에 있는 사쓰마 반란 사건은 과거 봉건적 질서의 피비린내 나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사쓰마 반란을 진압하고 난 메이지 정권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메이지의 이 같은 성공에 이바지한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새 집권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회를 슬기롭게 이용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다이묘에게 커다란 물질적인 양보를 했고, 나중에는 사무라이를 제거하는 위협을 무릅쓰기도 했다. 무사들의 급료 삭감에 관해서는 그 당시 그들의 자원으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또한 섣불리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역사적 인과관계라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볼 때 도쿠가와 정권은 이미 정책적 차원에서 무사 계급의 권세를 무너뜨렸고 압도적인 혁명세력의 탄생을 막으면서 중앙집권적 국가로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이처럼 메이지 정권은 앞 시대의 추세의 계속이었으며, 앞으로 지적하겠지만, 많은 도쿠가와 시대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마지막으로 천황 제도는, 많은 일본 역사가들이 강조해온 것처럼,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의 집결지를 마련해놓았으며 합법적인 계승의 테두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 테두리 안에서 숱한 필요한 조정작업이 이뤄졌다.

그런 비약을 가능하게 했던 관료제적 요소가 일본식의 특수한 봉건제에는 상당히 가미되어 있었다. 자유롭게 선택된 계약관계가 아니라 신분과 충성심을 특히 강조한 일본적 봉건 유대관계의 특징은 곧 서구 자유주의 제도에 따르는 활력 중 중요한 한가지가 결여됐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일본 정치 체제의 관료주의적 요소는 전통적 질서에 도전할 줄 모르는 유순하고 수줍은 상인 계급을 그 특징적인 산물로 길러냈다. 지식인의 심각한 도전이 없었던 원인은 일본 역사의 보다 깊은 곳에 있겠지만 이 것 역시 역시 위와 같은 현상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지적이고 사회적인 도전은미미했다. 끝으로,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산업사회로의 이전 과정 전반을 통해 일본 지배층은 농민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통제하고 무마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농민 혁명도 없었다.


2. 농민혁명의 부재

일본이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농민 혁명이 없었던 까닭은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도쿠가와 막부의 세제는 농민들로 하여금 일정한 액수만 내면 그들이 정력적으로 생산한 추가 소득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세금을 요구치 않았다. 이 제도는 생산을 증대 시키는데 도움이 되어 농가 생산은 도쿠가와 시대 후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메이지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둘째,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농민사회는 처음에는 농민과 영주와의 관계가, 나중에는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가 긴말하게 결합된 사회였다. 동시에 역시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농민 사회는 현실적 및 잠재적 불평분자들을 기존 질서 속에 흡수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통제 제도를 구비하고 있었다. 이 것은 재산제도, 토지 보유권 및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지배적이었던 상속 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특수한 분업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셋째로, 구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억압적인 기구들과 아울러 근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기구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제반 제도는 상업적 농업에도 적용될 수 잇었다. 이런 변화의 핵심적 요소는 농민의 대거 진출로 형성된 새로운 지주 계급의 대두였다. 이들은 농민들로부터 쌀을 짜내어 시장에 팔기 위해 국가와 농촌의 전통적인 여러 기구를 이용했다. 봉건적 관계로부터 소작 관계로의 전환은 또한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농민들에게 다소 유리한 것이었다. 요컨대 파시즘을 대가로 해 지난날의 전통적 질서를 물려받아 농민 경제를 산업 사회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메이지의 정책은 농민을 자본 축적의 근원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상업적 영향이 침투할 수 있도록 농업 경제의 문호를 더 넓게 개방해야 했으며, 그 결과 생기는 긴장을 해소키 위해 농민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독립세력으로 규합시켜야 했다. 봉건제를 위에서부터 해체시키는 것은 그 것 자체가 목적이거나 정책이었다기 보다 다른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어째서 혁명적인 봉기 없이 이런 과정이 수행되었는가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보다 분명히, 또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전체적인 변화를 가능케 한 핵심적인 요인은 농업 생산성의 계속적인 증가였다...그러나 한가지 지적할 것은 프랑스 대혁명 절정기 때의 생활과는 달리 일본의 경우는 농민의 급진주의를 위해 평민들이 동맹해야 할 만큼 도시민이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보다 온건한 농민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손잡을 수 있는 강력한 시민 계급의 반봉건 정신이 도시에는 별로 없었다. 시장 제도의 도입으로 가난한 농민 계급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소작인의 규모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전보다 많은 땅을 스스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안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흥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지주 계급의 이해관계는...매우 분명한 것이었다. 이 계급은 대체로 도쿠가와 후기에 득세하기 시작한 부유한 농민층에서 나왔으며, 어떤 학자들의 견해로는 왕정복고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농민 엘리트의 일부는 지주가 되어 와해됨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전해졌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상업적 이득을 획득했기 때문에 구질서의 중대한 변화에 반대하지 않았다...가난한 농민들과 소작인들이 메이지 시대에 급진적인 요구를 제시했을 때 이들 부유층은 즉각 이들에 반대했다. 이처럼 일본의 농촌사회는 이런 역사적인 전환기에 심각한 반자본주의 봉기를 억제할 수 있었고, 새로운 사회 경향에 반대하는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벽을 가졌었다.

이 단계에서 극렬한 반자본주의 세력을 막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극렬한 반봉건적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방책을 가졌던 것이 일본이었다. 상호 감시를 위한 5인조 조직과 촌장을 통해 봉건적 영향이 일본 농촌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여기서 중요성을 띄게 된다. 반봉건적 세력에 대한 이와 같은 제동은 분노를 위험 지경까지 몰아갈 수도 있었으니, 봉건적 세력이 상업세력과 손을 잡고 농민을 최악의 상태로 억압했던 제휴가 몇몇 지방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근왕 운동의 중심지였던 초슈는 이런 제휴가 없었다. (초슈는 농민가 지도층 간의 봉건적 유대가 살아있었고, 이를 토대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기병대가 꾸려졌다-나의 주)

아직 상당한 활력을 갖고 있던 봉건주의와 이에 도전하는 상업 세력 사이의 갈등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사무라이들이 때때로 농민 봉기의 선봉에 설 때 물론 이들은 위험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권은 징집된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용해 반봉건적 감정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 것의 대표적인 예는 새로운 정부에 대해 가장 큰 위협이었던 사쓰마 반란의 진압에서 찾을 수 있다. 때때로 사태는 위급하기도 했으나, 메이지 정부는 적과 그 동맹 세력 사이에서 분열을 이용해 난국을 극복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많은 농민들이 외세의 위협을 심각한 것으로 의식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그 것은 분명히 중요한 작용을 했고 따라서 보수적인 세력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일본 사회의 혁명 세력은 그들 사진의 힘으로 근대화의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들이 강력한 국가 건설을 통해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지도자들을 위한 제한된 발판을 제공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3. 메이지 유신: 새로운 지주와 자본주의

1880년에 이르면 국립은행 주식의 약 44%는 주로 과거의 다이묘들과 황실의 공경들로 이뤄진 새로운 귀족의 소유가 되었다...19세기 후반 천황의 주위에는 봉건적 특권을 대가로 하여 자본가로 변신한 과거의 영주들과 소수의 옛 상인 가족 및 군부에서 올라온 신흥 귀족들로 구성된 집단이 있었다. 한편 수많은 신흥 상층지주 계급이 지방에서 형성되었으며...의미깊게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일본 사회의 "중산층"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근대 지주 계급은 도쿠가와 시대의 농업 경제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의 결과로서 대체로 농민층에서 출현한 것 같다. 도쿠가와 정권은 지배 계급의 많은 부분을 토지와의 직접적인 유대관계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이런 분리는 모든 산업화된 국가에서 빠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어도 여하튼 일어나게 되는데-이미 근대 세계를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일본은, 영국과는 달리, 농민을 도시에서 몰아냄으로써 거대한 토지 자본을 형성하는 식의 광범위한 농민 착취 과정을 겪지 않았다. 상업화의 물결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적 사회 조건에서는, 그 대신, 지주(서구의 기준에서 보면 대체로 소규모이다), 소작인 및 자작농의 체제를 형성하는 과거의 추세가 강화되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1차 대전 종식까지의 일본의 농업은 근대적 산업 사회의 요구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고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영국의 지주는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내쫓고 소수의 소작인들을 두기 이해 국가를 이용했다. 반대로 일본의 지주는 그들을 토지에서 몰아낸 것이 아니라, 그 대신 그들로부터 잉여를 수탈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서 예부터 내려오던 비공식적 수단은 물론 국가를 이용했다. ...일본에서는 근대 세계가 도래하면서 농업 생산이 증가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주로 자본주의적 기구와 봉건적인 기구의 복합 형태를 이용해서 농민들로부터 쌀을 약탈한 소토지 소유계급의 출현을 통해 이뤄졌다.

메이지 초기에 경제적 발전에 대한 주요 자극은 새로운 농촌 귀족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로부터 왔고, 또 도쿠가와 치하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유능하고 정력적인 몇몇 사무라이로부터 왔다. 기업은 종속적인 위치를 계속 면하지 못했다. 기업은 경제적으로 정부에 의존했는데, 정부는 외세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장차 외국을 정복할 의도를 가지고) 충분한 근대적 토대를 이룩하고, 아울러 꿈틀대던 농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업을 장려했다. 이와 같이 근대의 시발점에서부터 농업적인 이해와 상업적인 이해가 결합해 국내에서 민중을 안정시키는 한편 국외에서 군사적인 영광을 추구하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는 주로 농민 겸 직공 체제로 움직이던 소규모 공장 제도가 거의 전일본 방방곡곡의 가가호호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몇몇 대기업체에 의해 압도되었던 시기로 특정지을 수 있다. 재벌들은 공황 직전인 1929년에 번영의 절정을 누렸다. 자금 대여, 기술 혁명, 시장에 대한 영향력 등을 통해 재벌들은 이런 영향을 심지어 하찮은 농산품 및 소기업에까지 보편적으로 침투시켰다.

근본적으로 메이지의 토지 정리와 근대화 계획은 농업적 이해와 상업적 이해를 결합시켰다. 이와 같은 결합이 가능했던 것은 국내적으로는 민중 운동이 성공하면 그들(지주와 상업 계급)이 정치적, 경제적 권익이 공동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고, 국외적으로는 인도와 중국의 운명의 재판이나, 외국의 국토 분할에 대한 위협과 시장 및 군사적 승리의 영광의 유혹 때문이었다. 기업이 더욱 강력해짐에 따라 일본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이 손발이 잘 맞아들어간 결과는 더욱 눈에 띄고 더욱 위험한 것이 되었다.

왜 기업인과 농업가는 국내에서의 억압과 해외로의 확장 계획에서만 의견 일치를 보았을까. 이런 물음은 당연하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다른 무엇이 어쩌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은 정치적인 자살을 모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있긴 있었다고 믿는다.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은 상층 계급의 관점에서는 위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장에서 그들의 권위가 근거라는 거점이며, 또 폭리를 얻는 주요 수단의 하나인 착취적 온정주의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주들이 당하게 될 결과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진정한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는 번영하는 농민들이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지주의 모든 지위가 몰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정치적 귀결:일본 파시즘의 성격

메이지 왕정 복고 이후의 근대 일본의 정치사를 우리들은 편의상 세구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농업적 자유주의의 실패를 특징으로 하는 제 1기는 정식 헌법의 채택과 1889년 의회 민주주의의 몇몇 외부적인 특색이 나타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제 2기는 이런 제도가 강요한 장벽을 돌파하려던 민주 세력의 실패로써 끝나는데 이는 1930년대 초 대공황의 내습때까지는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결과이다. 1930년대의 실패는 전시 경제와 일본판 우익 전제주의 정권을 특징으로 하는 제 3기의 단초가 된다.

"자유주의" 운동은 메이지 왕정복고의 결과에 실망한 사무라이의 봉건적, 국수주의적 반동에서 일어났다...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유와 민권"을 부르직기 위해 모여 자유당을 결성한 집단은 메이지 시대의 귀족적, 금융적 과두체제의 지배에 반대한 소지주들의 저항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그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1870년대의 많은 지주들이 양조장이나 된장 공장 등의 주인을 겸한 소규모의 상업 자본가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메이지 지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문제는 농촌의 상층 계급을 새로운 실저에 어떻게 화해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해운업, 군수산업, 중공업의 육성을 열망했는데, 이는 토지세를 중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1881년 자유당 창당 대회는 해군 경비의 증액이라는 명목으로 부과된 세금들에 반대했다. 왕정복고의 혜택은 주로 다른 자들, 특히 정치 참여자들에게 돌아갔다고 느낀 이 농촌 상층 계급은 자신의 지지 세력 토대를 넓히려고, 심이저 농민층에게까지 침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주들이 그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극단적인 농민의 요구에 부딪치게 되자, 곧이어 자유당은 분열되고 붕괴했다.

메이지 정부의 주요 전술(자유주의와 농촌 상층 계급에 대항하는)은...첫째, 단도직입적으로 경찰에 의한 탄압과 둘째, 지배적인 집단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만의 근원을 개선하는 경제 정책과, 마지막으로 야당 지도자에게 메이지 관료제의 자리를 줌으로써 반대 세력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방식 등을 합친 것이었다.

농민의 미덕, 특히 농촌 상층계급을 뒷받침하는 그러한 미덕을 애국적인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상업의 침투로 고통당하는 농촌 사회의 한가지 특징이다. 일본에서 농촌 문제는 산업주의 시대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반동적 애국주의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농본주의는 보다 커다란 움직임의 한가지 측면에 불과했다. 그것의 선례는 도쿠가와 시대의 주요 사상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그 것은 또 청년 장교의 열광, 다시 말해서 1930년대의 전체주의적 정권을 등장시키게 했던 암살사건과 쿠데타 시도에 역사적으로 계승되었다.

1차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의 힘의 균형은 농촌 엘리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일본의 공업 발전을 촉진시켰고, 일본의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기업의 영향은 1920년대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야마가타는 1922년에 죽었다. 그 후 몇년 동안은 권력이 군국주의자의 손에서 상인계급과 의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1922년 워싱턴에서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된 후 상업적 이익을 대변하는 몇몇 신문들이 "정치에서 군부를 몰아내라"고까지 부르짖었다는 사실은 이런 정치 풍토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그러나 불경기가 내습함으로써 이런 희망은 끝장이 났다...1930년대초에 일러 그런대로 그때가지 유지되고 있었던 일본의 의회 민주주의는 대공황의 마지막 일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1930년대의) 쿠데타 사건은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대중에 의한 우파운동인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곧 "위로부터의 파시즘", 즉 지체높은 파시즘에 반자본주의적, 대중적 우파가 희생된 것으로써 정부고관들이 그들에게 유용한 국면만을 취하고 대중적인 요소를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지체 높은 파시즘은 이제 재빨리 번성해갔다. 국민 동원령이 내려졌고, 급진주의자들은 검거되었으며 정당들은 해산되어 서양의 전체주의적 정당을 어설프게 모방한 대정익찬회에 의해 대치되었다. 곧 이어서 일본은 반코민테른 3국동맹에 가담했으며 모든 노동조합을 해체시키고 그 대신 산업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단체(대일본산업보국회)를 들어앉혔다. 이와 같이 일본은 1940년말까지 유럽식 파시즘의 외형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일본의 대기업은 이윤을 애국심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군부가 권력을 잡은 파시즘의 시대는 그 시대 전체를 통해 기업에게 특혜를 베풀게 되었다. 공업 생산은 1930년의 60억엔에서 1941년에는 300억엔으로 늘어났다. 경공업과 중공업의 상대적인 지위는 뒤바뀌었다. 1930년 중공업은 전 공업생산의 38%밖에 점하지 못했으나, 1941년에는 73%에 달했다. 재벌들은 정부의 통제에 명목상으로 복종함으로써 전체 공업 분야를 거의 완전히 석권할 수 있었다. 미쓰이, 미쯔비시, 스미모토, 야스다와 같은 4대 재벌의 총 재산은...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30억엔이 넘었다. 재벌들에게 반자본주의는 실제로 좀 귀찮은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서 1936년경 이후 그들은 대체로 통제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국내적 억압과 해외로의 팽창 정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작은 대가였다.

일본에서의 농업적 우익 급진주의의 본래적인 한계와 광적인 천황 숭배는, 우리가 군부의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1920년에서 1927년 사이 사관학교 입학자의 약 30%는 소지주, 부농 및 도시 쁘띠부르주아지의 자제였다...이때쯤 되면 새로운 사회적 기반과 정치적 안목을 가진 새로운 집단이 군부의 고루하고 좀 더 귀족적인 지도층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까지 아라키 대장은 그들의 최고 대변인이었으며 금권주의자들과 황실 주변의 인물들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은 대표자였다...30년대의 전쟁 경기에서 기업가들이 커다란 이익을 보게되자 농업적 유대 관계가 있는 군부의 반대파들이 다시 소란을 피워 마침내 1940년 육군상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군부는 자급자족적인 작전 근거지를 만주에 세우려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재벌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만주는 거의 농업 지역이었는데, 일본의 관동군은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그것을 공업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일본 기업의 도움을 받았다. 군부가 이런 교훈을 인식하게 되고 만주에서 기업과의 협조가 필요하게 됨에 따라 군부와 기업은 보다 유착되어 중국 북부 지방의 점령이 가능하게 되었다.

근대 세계의 도래를 피해 달아나는 일본 군부의 모습은 일본 우익 세력의 농업적 교리의 무용성과 그것의 궁극적인 대기업 의존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대기업체들은 일본적 제국주의의 생활 양식에서 농촌 및 소시민적 애국주의자들에게, 구호는 아닐지라도, 실제로는 반자본주의적 자세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일본적 형태의 파시즘에서 군부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는 다소 다른 사회세력을 대변했고 정치적 역할도 달랐다. 독일에서 군부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전통적 엘리트 계층의 피난처였다...군부는 대체로 히틀러의 명령에 좌우되는 수동적인 기술도구였다...일본의 군부는 재벌에 반대하는 농촌과 도시의 소상인들의 압력에 대해 훨씬 더 민감했다. 이 차이는 일본과 독일 사회의 차이에서 추적해 볼 수 있다. 일본은 독일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고 농민 계급이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은 이들의 요구를 쉽게 물리칠 수 없었다.

이런 모든 차이점이 인정된 뒤에도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유사성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독일과 일본은 둘 다 뒤 늦게 공업 세계로 돌입했다. 이들 두 나라에서는 국내적인 억압과 해외로의 팽창을 주요 정책으로 삼은 정권이 대두했다. 양자의 경우 이런 계획을 수행한 사회적 주체 세력은 농민 및 산업 노동자와 대립하는 상공업 엘리트(이들은 미미한 위치에서 출발했다)와 전통적인 농촌 지배계층의 연합세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두 나라에서는 발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활하는 소시민과 농민의 비참함으로부터 우익적인 급진주의가 생겨났다. 이런 우익 급진주의는 이 두나라에서 억압적인 정권을 위한 몇 개의 구호를 제공해주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이윤과 능률이라는 요구 앞에 희생되었다.

이 시기(메이지부터 전간기-나의 주)의 일본 농촌 생활을 말해주는 세 가지 정설이 있다. 첫째는 소작제도의 개혁을 위한 토착적인 노력의 실패요, 둘째는 일본 총촌 경제에서 견직물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다는 것이요, 셋째는 대공황의 영향이다. 요컨대 일본의 농민을 세계 시장의 손아귀에 던져버리는 것이 메이지 시대 이후의 주요 추세였다는 것이다...잠사업은 농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력한 시장 조직으로 인해 도시의 대상인들이 이윤의 대부분을 수탈했다 농민의 반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성장에 알맞은 상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불경기는 쌀과 생사 모두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많은 농민이 몰락했다. 어떤 학자들은 농촌 경제가 받은 이런 동시적인 타격과 "자유주의적" 정부의 붕괴 및 군사적 침략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권력이 넘어간 것 등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과관계의 사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리는 군부-이들은 농민 출신의 사병과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과격한 민족주의적 호소에 동조하게 된 "소시민" 출신의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로 추정되고 있다.

미점령군에 의한 토지개혁(1946)때가지 일본의 촌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국면은 부자가 마을을 지배했으며 공공연한 갈등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락에서의 권위의 주요 토대는 토지 재산의 소유였다...미점령군에 의한 토지개혁의 결과 혹은 기타 다른 이유로 해서 경제적인 의존 관계가 사라진 곳에서는 신분 및 예의범절의 전통적인 구조가 붕괴되었다.

17세기 이래 일본 농촌의 역사를 돌이켜볼 대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것은 그것의 연속성이다. 과두정치적 구조, 내적인 결속, 고위 당국자들과의 효율적인 수직적 관계 등 모든 것이 시장을 위한 현대적 생산 양식으로의 젼환을 별다른 변화없이 수행했다...지주들이 옛 부락의 구조를 통해 많은 잉여를 수탈해 판매함으로써 높은 자르를 그래도 지킬 수 있었기 대문에 그것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그렇게 하는데 실패한 자들은 농촌적 사이비 급진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 사이비 혈족관계가 소작관계로 대치된 것이 유일하게 필요했던 제도적 변화였다. 이 모든 것은, 여러 사건이 보여주듯이,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생산성이 크게 늘어날 수 있는 쌀 농사에서만 가능했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ㅡ중국

4장. 청조의 쇠퇴와 중국 공산주의의 발생


상층계급과 황제 체제

(지주와 관료를 연결했던) 사회적 메카니즘으로서의 가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했다. 관직을 통해 획득한 재산은 토지에 투자되었는데, 이는 근대에까지 지배적인 관행이었다. 사람들은 가계를 위해 이와 같은 재산을 축적했다. 또 귀족의 학위 소유자, 또는 미래에 학위를 소유할 듯한 인물을 가족 중에 글어들임으로서 귀족가문임을 입증해야 했다. 학위 소유자는 그가 관직을 얻고 또 그것을 가문의 실질적 부를 증식하는데 사용하리라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희망에서 부양되었다. 관직을 통해 학자는 재산을 벌충하거나 증식시켰고, 가계의 지위를 유지했다...가계를 통한 관직과 부의 연결은 중국 사회를 가장 중요하게 특징짓고 있었다. 곧 사대부들과 지주들로 구성된 이 상층 계급을 향신으로 지칭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타당하다.

지주가 어떻게 하여 봉건적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농민들을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 수 있었는가...소작제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지주가 자기 몫을 화폐가 아닌 곡물로 받는 소작제가 지배적인 유형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심지어는 황제조차도 신하들로부터 곡물을 수납받는 최고의 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제도 아래에서 지주들은 불분명하나마 과잉인구라도 불러도 좋을 조건의 유지에 분명한 이해 관계가 있었다. 농민들의 과잉존재는 지주에게는 지대를 올릴 수 있는 경쟁 조건이 된다.

우선 인구의 압력이 지주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으려면, 그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해주고 지대의 수납을 뒷받침해주며 질서를 유지시킬 강력한 정부가 있어야만 한다. 이 것은 제국의 관료제의 임무였다...관료제는 기타 다른 중요한 몇 가지 방식으로 지주의 목표에 부응하였다. 지주는 그의 소작인들이 질 좋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관개수로의 마련에 강력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지방 지주 가문들은 정부 당국에 대해 수시시설을 건설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다...두번째로 토지 그 자체보다는 관료제가 가장 큰 물질적 유인을 제공했다. 전통적인 가문을 배경으로하지 못하는 한, 부유한 가문이라고 해도 재산을 분할 상속하는 경우, 몇 세대 못가서 영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중 중요한 것은 학문적 자질이 있는 자손들을 관료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되는 부패한 방식으로 재산을 모음으로써 가문의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토지에 기초한 부는 관료제에서 나왔고 또 관료제에 의존해 존속해갔다.

(중국 관료제의) 문제는 너무 가혹하게 수탈당한 농민들이 도망가서 비적이 되어버리거나, 혹은 상류 계급의 불평분자가 주도하는 반란의 지지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 같은 수탈을 방지할 유효한 메커니즘이 없었다는 사실이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적 취약성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전 산업사회에서도, 대규모의 관료제를 확립하려는 시도는 조만간 어려움에 직면한다. 즉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상급자에게 의존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자원을 인민들에게 이끌어내는 어려움이다. 통지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해나가는 방식이 곧 사회 구조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경우는 관직 매매였고, 러시아의 경우는 짜르에 대한 관직 봉사의 대가로 그 광대한 영토에 걸맞게 농노를 갖춘 영지를 주는 방식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다소간 공식적으로 부패를 허용해주는 것이 그 방식이 되었다.

이 체제는 고도로 착취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한 평가인 듯 하다. 이 것은 이 체제가 필수적인 공직 봉사의 형태로 사회에 되돌려 주는 것에 비해 더 큰 자원을 그 사회로부터 이끌어내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객관적인 기준에서의 평가이기도 하다. 반면에 체제가 그 작동을 위해 착취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변층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근대의 전체주의 저우건들이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재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고, 심지어는 공식적인 민주 정권들이 장기간의 국민적 위기의 시기에는 좁은 범위에서나마 국민들의 생활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방식도 사용할 수 없었다.

특히 청조 말기에 들어서 과거 제도는 전도양양한 관료들이 과잉 상태에 이름으로써 그들을 먹여살려야만 하게 되었다. 관료 체제의 최저변에는 막대한 숫자의 생원, 즉 관직을 차지할 자격은 갖추었으나 아직 임관되지 못한 과도적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이 향신의 정식 성원으로 계산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특권적 위계체제에서 그 바닥에 놓여있는 그들의 곤란한 지위는 19세기 일본의 하층 무사계급의 처지를 연상시킨다. 이 양자는 모두 지배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핵심 분자를 공급했다. 일본에서는 이 집단의 핵심적 소수가 국가 근대화의 추진력을 크게 제공했음에 비해서, 중국에서는 이들 에너지가 지배 체제의 틀 내에서의 반란과 정치적 전복의 무익한 시도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시켜 버렸다. 과거 제도의 동맥 경화적 효과가 이런 차이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 원인은 보다 더 깊은 곳으로 연결된다.


2. 향신층과 상업

청조의 중국 사회에서 도시 상공 계층이 형성된 적은 결코 없었다...부르주아지에 비견할만한 계층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이유의 하나로 황제권이 국가 통일에 성공한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도시 상인들은 교황과 황제, 왕과 귀족이 벌이던 다면적인 경쟁에 힘입어 상당히 큰 세력으로 성장함으로써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틀을 깨뜨리고 나올 수 있었다. 유럽에서 이런 돌파구가 처음 열린 곳이 봉건 제도가 대체로 약한 편이었던 이탈리아였던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중국의 과거 제도 또한 야심있는 사람들이 상업을 외면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영리 활동이 사대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향신층은 단기적으로나마 이러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통찰력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상업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상업을 국가의 독점사업으로 전환시켜 가장 돈이 잘 벌리는 자리는 자신들이 차지했다.

사대부들의 지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해안도시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나자 중국의 모든 개항장에는 매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부패해가는 중국 관료들과 외국 상인들 사이에서 갖가지 중개역할을 했으나, 그 지위는 분명치 않았다. 그들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안락하고 세련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많은 중국인들은 이들이 중국 사회으 토대를 파괴하고 있는 악질적인 외국인들의 종복이라고 비난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전반적인 사회사와 외교사는 이러한 혼종적인(hybrid) 집단에 제동을 걸기 위한 중국인들의 시도와 이런 집단을 상업적, 정치적 이득을 위한 디딤돌로 이용하려는 강대국들의 상반된 노력에 대한 기록으로 점철된다.

1860년대의 중국에서 산업화가 자체의 힘으로 조심스럽게 이뤄지기 시작했을 때, 이런 작업은 근대 기술을 그들 자신의 목적, 곧 지방 분리 독립에 이용하려고 했던 지방 향신층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군사적인 문제들이 가장 시급하였으므로, 초기의 공장들은 군수 공장이나 해군 조선소 등 거의 예외없이 군사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중국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능력은 주로 지방의 권력 중심지에서 이뤄졌을 뿐, 청조의 정부에서 주도한 것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산업화를 위한 노력은 단합보다는 혼란을 촉진하는 요인이었다.

중국은 러시아와 같이 중산층이 숫적으로 열세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종속된 상태에서 근대로 접어들었다. 중산층은 서구의 경우와 달리 독자적인 이념을 계발하지 못햇다. 그러나 관료국가의 저변을 허물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 집단을 형성하려는 시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안 지역에서 이루어진 중산층의 성장과 청조가 독립적인 지방으로 분할되는 과정은 일치했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군벌의 전성기(대략 1911-1927)와 그 뒤를 잇는 국민당 시대까지 계속되는 부르주아와 군국주의자들이 결탁할 여건을 조성했다. 이런 일반적 전개의 선례(1870-1895)는 이홍장이었다. 그는 25년간이나 외교업무, 해양업무에 따른 관세 수입의 지배, 병기 생산, 화북 지방의 군사력 완전 통제 등을 홀로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향신층(나중에 순수한 의미의 지주층이 된 것은 바로 이 향신층의 후계자들이었다)과 무역, 금융,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도시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점차적으로 견실한 제휴가 이뤄졌다. 이런 제휴는 국민당의 중요한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제국적 성격을 복원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인데, 이 시도는 중국 전래의 폭력주의와 허식적인 사이비 유교 윤리와의 혼합(이 것은 나중에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서구의 파시즘과 흥미로운 유사점을 보여준다)을 통해 지주층을 정치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상한 혼합은 향신층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서 상업적 영농 단계로 넘어가려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3. 상업농 정착의 실패

중국의 경우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농민들로부터 경제적 잉여를 거두어들여 문화적 여흥에 전용하기 위한 정치적 방책이었다...즉, 중국의 지주들로서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이 풍부한 여건에서는 도시의 시장이 고려하여 장원의 생산을 합리화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토지를 얻기 위한 농민들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장원이 도시 부근에 있다면 지주로서는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줌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힘 안들이고 수입을 올리는 편이 훨씬 더 간단하고 손쉬웠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다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 또한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수익성이 좋다는 사실을 쉽사리 깨달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도시 부근에서 부재 지주가 증가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구지주들과 보다 부유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 부분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언제 어디서든 시장이 생기면 향신층은 상업농이 되기보다는 정치적 연줄을 가진 랑띠에(지대 생활계급)로 변신했다. 상업농은 소수에 그쳤다.


4. 청조 체제의 붕괴와 군벌의 등장

서태후의 진정한 목표는 자기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정부를 대체로 독일이나 일본의 노선에 따라 확립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인상을 강력히 받게 된다. 우리가 규명하고자 하는 주요 논점은 그런 정권에 필요한 사회적 토대가 중국에는 결여되어 있었고, 심지어 러시아보다도 훨씬 더 그러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정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 것은 정치적 세력은 상당했지만, 경제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 지배층과 약간의 경제력은 있으나 정치적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상승 과정에 있던 상공업 엘리트의 제휴이다. 당시 중국 도시의 토착적인 상업 집단들은 그러한 연합에 필요한 상대자가 될 정도로 성장해 있지 않았다.

유학자들이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할 기회가 줄어들고 중앙 정부의 힘이 쇠약해짐에 따라 향신층은 지방 행정을 점점 더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9년에 공산당의 승리로 겨우 수습되는 오랜 혼란과 파멸적인 전쟁의 전조였다. 곳곳에서 형신층은 오로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청조는 상점주인이나 행상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저 유명한 내국관세인 이금을 신설함으로써 그 붕괴의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금은 태평천국의 난의 결과로 필요해진 자금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었기 떄문에 취한 긴급조처였다. 몇몇 복고주의적 지도자들이 토지에 대한 과중한 세금보다 이금을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조의 중앙 정부는 조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군벌의 원형인 새로운 지방당국은 이금 차제에 힘입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는 1911년에 청조가 멸망하고 1912년에 공화국이 선포된 사건에 의해 지방 장관이 실권을 장악하여 15년 이상이나 유지했다는 구조 상의 변화를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향신층 중 일부 강력한 세력은 이 기간 동안 군벌로 변신하거나 독립적인 군사세력과 제휴함으로써 권력을 지탱했다. 이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던 사회적 문화적 장치들은 대부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그들의 계승자들은 말 그대로 단순한 지주나 도적이 되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이 두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었다...지주와 강도집단 군벌은 공생하는 사이였다. 그런 관계는 노동이나 현물의 형태로 수탈하는 조세 제도의 운용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체제는 농민들로 하여금 지방 엘리트의 권력을 계속 보장하도록 강압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상인들 또한 나름의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당의 토대였던 상인 집단과 지주 계급의 제휴를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징발 제도는 향신층이 청조의 관료 체제 아래에서 꾸준히 정치에 관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정치 권력은 경제력을 낳아 유지시켰고 경제력은 또 다시 정치 권력을 생산했던 것이다. 중앙정부가 사라짐으로서 상층 지주 계급은 심각한 결함과 균열로 손상받았던 중국 사회가 그런대로 옛 모습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던 주요 장치들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20세기에는 새로운 세력들이 주역으로 등장했고, 전통적인 지배층의 계승자들은, 실패에 그치긴 했지만, 새로운 연합세력으로 변신하려 했다.


5. 국민당의 등장과 그 의의

국민당은 토착 공산당과 소련의 도움에 크게 힘입어 1927년 후반에는 남부의 본거지로부터 시작해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간까지 국민당은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 퍼져있던 불만의 조류를 잘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즉 국민당은 군벌과는 다른 사회적 강령을 내세웠고, 이 점에서 군벌보다 유리했다.

국민당이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자, 민족주의적 통일 강령으로써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던 여러 요소의 균열이 표면화되어 투쟁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정예 군사력을 확고하게 손에 쥔 장개석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음모와 일련의 무력 기습을 통해 혁명 대열에서 이탈해나갔다. 그는 이런 이탈 끝에 결국 농민-부르주아의 고전적인 연합을 이용함으로써 노동자를 공격했다. 1927년 4월 12일(장개석의 상해 반공쿠데타)에 그의 하수인들은 프랑스, 영국, 일본의 경찰 및 군대를 비롯해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다른 세력과 함께 노동자, 지식인 및 그밖의 공산주의 동조 세력을 대량 학살했다...그는 자본주의적 요소들까지도 적대시해 구금 및 처형의 위협을 통해 재산을 몰수하거나 강제로 공채를 사도록 하기도 했다.

장개석의 승리로 중국의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민당은 말로나 행동으로나 국가 통일이 정치 및 농업 개력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임을 주장했다. 현실적으로 이런 생각은 군사력으로 농업 문제의 해결 모색, 즉 비적과 공산주의자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시도를 뜻했다.  

상공업 발전의 충격 아래 중국은 부의 격차가 현격한 부재 지주제가 점차 우세해져갔다. 이런 변화는 해안 지역, 특히 대도시 부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상업의 영향으로 농민의 소유권은 잠식당하고 일부 옛 지배계층과 도시의 신흥 세력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적 집단에 부가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합이 국민당의 주요한 사회적 기반이 됨에 따라 국민당은 현상 유지나 현상 회복을 시도하는 농업 정책을 채택하였다. 게다가 사실상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맞수인 공산주의자들의 존재로 상황이 첨예화됨으로써 국민당은 더욱 반동적이고 강압적인 정책을 쓰게 되었다. 국민당에 대해 호의적인 한 미국인 학자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때로 광적인 농민 반란의 후예들처럼 행동하고, 국민당 정부와 국민당은 관료의 후예처럼 행동한다."

국민당의 주요한 사회적 토대는 이미 살펴본 대로 향신층의 계승자들과 도시의 상업적, 금융적, 산업적 이해 집단 사이의 제휴 또는 기껏해야 그들간의 적대적 협력이었다. 국민당은 폭력 수단의 지배를 통해 그들 이해집단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기능하였다. 동시에 폭력의 통제로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도시의 자본가 집단을 갈취해 정부 기구를 운용할 수 있었다. 국민당은 이 두 가지 측면 중 어느 쪽으로나 히틀러의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과 비슷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사회적 기반에서나 역사적 상황에서나 유럽의 대응되는 정당과는 다른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반동적 국면이 비교적 미약했던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런 차이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가지 명백한 차이점은 중국에는 든든한 산업적 기반이 없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훨씬 빈약했었다는 사실이다. 또 이 집단의 영향력은 해안 도시의 일본 강제점령으로 말미암아 한층 더 감소되었다는 추측도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중국은 민족 감정의 직접적 목표물이 되었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반동적 국면에 접어들어서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파시즘처럼 해외 팽창을 전혀 할 수 없었다.


6. 반란, 혁명, 그리고 농민

(중국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결점들은 농민을 상층 계급 및 기존 정권과 이어주는 고리들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향신층의 구성원들은 잇따른 농사철에 감독자의 역할까지 포함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농민 공동체의 정당한 지도자로서 군림할 근거가 없었다. 중국에서 토지를 가진 향신과 보통 지주와의 사이에 나타나는 큰 차이 중의 하나가 향신이 육체 노동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학문과 교양을 닦는 일에만 전념했었다는 점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 하다...정부와 상층 계급에서는 농민이 그들의 생활방식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능(치안, 관개, 농업 기술 보급 등)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는 취약하고 대개는 인위적이었으므로 어떤 격심한 긴장이 있을 때에는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중국 농촌의 노동력은 풍부하거나 심지어 남아도는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도의 경우는 카스트 제도 아래, 일본의 경우에는 다른 형식으로 아직도 계속 존재하고 있는 계속성과 제도적 기반이 중국의 촌락에서 이뤄진 어떤 개인들의 경제적 협력에도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중국 농민 사회의 결속력은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 상당히 약했으며 너무 지나칠 정도로 토지 재산에 좌우되었던 것 같다. 인도의 경우를 다시 고려해보면,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은 카스트 제도에 힘입어 자기 나름의 활동 영역을 찾을 수 있었고, 촌락 내부의 분업 과정 속에 편입됨으로써 재산이 없어도 활동에 큰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

중국은 부싯깃-반란의 불꽃만 튀면 쉽사리 불붙을 수 있는-과 같은 인간 파편의 거대한 집단이 형성되기에 알맞은 사회였다...청대에 있어서 단순히 약탈이나 일삼던 비적 행위와 조직적인 반란 행위를 비교해보면 어떤 경우든 별 차이가 없었다. 더욱이 농촌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반란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중국 농촌의 사회 구조의 여건에서는 비교적 쉬운 일이기는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반란이 심각한 위협이 될 정도가 되려면, 반드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영토적 기반이 있어야 하며 그 영토를 구준히 확장해야만 한다. 또 영토적 기반의 획득은 그 영토 안에 있는 촌락들이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중국의 경우 그 것은 농민들에게 보다 나은 여건을 제공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향신층을 비롯한 지방 귀족들이 협력을 하도록 만드는 것도 뜻했다... (전통 사회에서 중국 농민들의 반란은) 향신층의 참여 및 지도력 행사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의 가능성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근대화와 상업의 침투로 인해) 재산과 사회적 결속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 논의하고 있는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국면은 극빈 농민집단이 촌락의 사회적 위계질서의 밑바닥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최근의 몇몇 지역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숫자는 지역 주민의 절반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이렇게 볼 때 1927년에 시작해서 1949년에 공산주의자의 승리로 끝난 혁명의 민중적 기반은 토지가 별로 없는 농민층이었다. 스페인과 쿠바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농촌 폭동의 원천이 되었던, 집단적으로 근대의 자본주의적 대농장에서 일하던 농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없었다. 중국의 상황은 또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도 성격이 달랐다. 프랑스에는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많이 있었지만, 혁명을 주도한 것은 부유한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혁명이 재산권을 확인하거나 봉건 제도의 잔재를 없애는 단계를 넘어서려는 기미를 보이자 오히려 혁명에 제동을 걸고자 했던 것이다.

전반적인 빈곤과 착취 그 자체가 혁명적 상황일 수는 없었고, 또 그 것만으로 혁명적 상황이 마련되기에는 불충분했다. 여기에는 희생자인 백성들의 새로운 부담을 강요당하거나 기왕의 부담을 어떤 이유 때문에 더이상 정당하다고 느낄 수 없게 되는 등 각종 부조리가 사회 구조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분위기도 있어야 했다. 중국 상층 계급의 부패는 바로 이런 필수적 요소로 작용했다. 향신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채 문자 그대로 지주 겸 고리대금업자로 탈바꿈해버렸다. 과거 제도의 폐지는 그들의 정당성과 이를 뒷받침하던 유교의 논리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뜻했다.

곤궁과 부패가 만연된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등장했지만, 이 또한 그 자체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은 일본의 침략 및 외세의 점령 정책이었다.

국민당의 관리와 지주들이 일본 군대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자 농민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일본군의 간헐적인 소탕 작전과 소각 전술은 농민들이 하나의 굳센 집단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공산주의자의 두 가지 본질적인 혁명 과업을 대신해준 셈이었다. 첫째는 구 시대의 엘리트를 제거해준 일이었고 둘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시켜준 일이었다.

북쪽의 촌락은 산서, 호북, 산동, 호남의 접경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곳의 경우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에 대한 민족적 저항 운동을 그들의 발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사회 투쟁에 이용할 수 있었다. 국민당의 잔재 세력을 비롯한 이 지역의 일부 부유층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인과 손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당시만 해도 아주 온건했던 사회 개혁 사업을 외세의 압제에 대한 투쟁으로 효과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촌락에서 기존 세력 몰래 차츰차츰 그들 자신의 정치 조직을 구축해갈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와 함께 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이익을 주고, 부유한 농민들에게는 부담을 지우는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이 사업 시행의 최초 성과는 그때까지 국민당의 주머니만 채워주고 새로운 부담을 지워온 조세제도를 폐지한 것이었다. 새로운 구호는 "부자는 재산으로 기여하고 노동자는 노동으로 기여하라"는 것이었다.

하나의 결정적인 위기는 일본인이 이 촌락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려 했을 때 닥쳐왔다. 무차별적으로 할당되는 일본인의 정액 세금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부유층에게 많은 부담을 지우는 공산주의자들의 안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촌락 전체를 부유층과 빈민층으로 분열시키는 데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들과 협조하여 곡물을 동굴 속에 숨기고 마을을 비워버렸다. 이에 따르지 않았던 부유층도 일본인이 마을을 점령해 그들의 곡식을 송두리째 빼앗아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결국 공산주의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따금 케케묵은 옛 통치 수법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빈농들, 나아가 중국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아왔던 집단인 여성들까지도 새로이 조직하였다. 그리고 특히 협동조합(농민협회)의 설립에서 볼 수 있는 지역적 자급자족 경제 계획을 통해 그리고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농민들이 굴종과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토지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뤄진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이 작업은 과거의 압제자와 부역자에 대한 보복과 함께 이뤄졌다.

토지는 가족단위로 분배된 것이 아니라 공평의 원칙에 따라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각 개인에게 분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소유와 가족 제도의 관계를 말살함으로써 촌락을 뿌리째 해체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친족 유대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거나 적어도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연령과 성별 뿐 아니라 계급 간의 적대감을 더욱 부채질한 셈이었다. 농민과 지주, 소작인과 마름, 지방 파락호와 그 희생자 사이의 투쟁은 이 이후에야 비로소 노골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공산정권은 촌락과 인민 정부 사이의 새로운 연결 체제를 만들어냈다. 모든 농민들은 자기의 일상생활이 국가의 정치 권력에 종속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공산주의자들은 이 연결 체계를 통해서 지주나 국민당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 과거보다 더 무거운 부담이 과거보다 더 공평하게 부과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변화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옛 질서를 파괴하고, 정부와의 연결 체제를 새로이 하고,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재산을 끌어내는 일, 이 모든 것은 열강이 무력으로 대결하는 와중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생산량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근본 과제를 해결하는데 예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ㅡ미국

3장 미국의 남북전쟁: 최후의 자본주의 혁명


농장과 공장의 갈등은 불가피했는가?

미국이 근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길과 영국과 프랑스가 근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길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 것은 곧 미국이 늦게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봉건적 형태이든 관료적 형태이든 복잡하고도 뿌리가 깊은 농업사회를 해체할 필요가 없었다. 버지니아의 연초농장처럼 상업적 농업은 처음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고, 미국이 안정적인 자리를 잡게되자 급격하게 지배적이 되었다. 가령 유럽처럼 상업화 이전 단계의 토지 귀족과 군주 사이의 정치 투쟁과 같은 것은 미국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미국 사회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 거대한 농민 계급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이른바 도시적인 또는 부르주아적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는 세력이 감행한 혁명적인 공세 중 최후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말할 것은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노예제는 산업 자본주의의 경제적 족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미국 산업 성장의 초기 단계에 기여가 컸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19세기 독일의 역사는 발전된 공업이 고도의 노동억압체제에 바탕을 둔 농업 형태와도 잘 어울려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확실히 독일의 융커는 노예 소유주가 아니었고, 또 독일은 분명히 미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정확히 어디에 있을까? 융커들은 독립 자영농들을 그들의 영향력 하에 두면서 대공업가들과도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는 온정주의와 억압이 적절히 혼합된 방식으로 공장 노동자들을 제자리에 묶어두는데 융커들의 도움이 유익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생각할 때 독일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독일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만일 미국의 북부와 남부가 타협을 하게 되었다면 그 타협은 마침내 미국에서 그 뒤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희생시켰을 것이다...또한 독일의 경험은 우리가 어느 면을 중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암시하기도 한다. 왜 북부의 자본가들은 미국에서 산업자본주의를 확립하고 강화하는데에 융커와 같은 남부의 지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독일의 경우와 같은 공업가와 융커 간의 정치적 경제적 유대가 미국에는 없었을까? 미국에는 농민 대신에 독립 자영농과 같은 다른 집단들이 있었던가?...


2. 미국 자본주의 성장의 3가지 형태

18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국적으로 각기 다른 3가지 형태의 발전과정을 보였다. 즉 면화를 재배하는 남부와 자유농민의 경작지인 서부, 그리고 급격하게 산업화되는 북동부가 그 것이었다. 미국 사회 내의 분열과 협력이 항상 이런 구분선에 일치해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해밀턴이나 제퍼슨의 시대부터 농업 종사자와 도시의 상인, 금융업자 사이에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왔다.

남부 지방에서의 면화의 중요성을 잘 알려져있지만, 면화가 전반적인 자본주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1840년대부터 남북전쟁기까지 영국은 면화 총수입량의 5분의 4를 미국 남부 각주에서 들여왔다. 그러므로 노예 제도에 의해 경영되었던 농장은 결코 산업 자본주의에 기묘하게 접합된 시대착오적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것은 산업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며 세계 산업 자본주의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다.

미국 남부 사회에서 농장 경영주와 노예 소유주들은 매우 소수였다...백인 중 단지 7%의 인구가 전체 흑인 노예의 거의 4분의3을 소유했다. 제일 좋은 경작지는 점점 이들 극소수의 노예 소유주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정치의 실권도 역시 그러했다...남부 대부분의 소규모 자영농들은 대농장주들의 정치적 리더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왜냐하면 어떤 다른 분명한 대안도 없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 대농장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의 확실히 노예 제도는 당시의 남부사회의 내부 사정상 결코 소멸과정에 있지 않았다...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노예 제도가 경제적으로 유리했다는 사실이다...농장의 노예제는 수지가 맞았으며 나아가 면화나 특용 작물의 생산에 적합한 지역에서 발전한 하나의 효율적인 제도였다...플랜테이션 노예제가 남부로부터 점점 서부로 이동해감에 따라 그 것은 심각한 정치 문제를 조성했다.

1830년대를 통해 북부 자본주의 자체의 성장을 가족화시켰던 이면의 동인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면화였다. 그 뒤 10년 동안 공업 성장의 속도는 마침내 북동부 지역이 공업 지대로 화할 정도로 가속화됐다. 바로 이런 공업의 팽창은 미국 경제가 단일한 특수 농산품에만 의존하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북동부와 서부는 예로부터 남부에 많은 곡물을 공급했으며 그 당시에도 이런 공급을 계속했던 터라 남부에 대한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북동부와 서부의 상호 의존은 더욱 더 강화됐다...북부의 공장 생산품들은 급격하게 발전하는 서부 지방과 대단히 빈번하게 교역되기 시작했다.

북부의 자본가들이 정부의 기능을 필요로했다면 그것은 사유재산 제도를 보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부의 대농장이나 노예의 소유주들이 사유재산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 것은 그 나름의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다. 또한 북부의 자본가들이 원했던 것은 자본의 축적이나 시장 경제의 전개 과정에서 정부의 건실한 지원이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호관세라든가 교통망 수립데 대한 지원, 건전 재정, 그리고 중앙은행 제도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북부의 유능한 지도자들은 주 정부나 지방 당국자들에게 어떤 부담도 지우지 않고서 기업활동을 전개하려 애썼다. 그들은 다름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시민임을 자랑으로 생각했고, 연방정부로부터 탈퇴의 움직임이 있었던 위기의 순간에는 미국이 분열돼 다수의 군소국가로 변모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그 당시 가장 첨예한 감정 마찰을 일으킨 경제 문제는 관세였다...북부인들이 관세 인상을 요구하고 남부인들이 그에 반대하는 것...(영국의 면방직 공업이 기술 우위로 인해 북부 산업이 위기에 있었으나 남부는 면화수출로 호황을 맞았던 상반된 경제적 차이가 영향을 주었을 것-나의 주)

북부 자본가들은 그들 나름의 임금 수준의 풍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그 당시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충원될 수 있었을까?...북부의 정계와 경제계 지도자들은 하나의 해결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서부의 농업 종사자들을 남부인들과 분리시켜서 북부와 연계시키는 것이었다...이런 경향을 이용함으로써 북부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더 이상 남부의 대지주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83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거대한 잉여 곡물들은 남부에 흘러들어서 그곳의 특수 작물재배 경제에 식량을 공급했다. 그런 경향은 지속되긴 했지만, 동부의 곡물소비 시장이 점점 중요해짐에 따라서 남부 시장의 중요성은 상실되기 시작했다...1830년대부터는 서부 곡물의 동부해안으로의 이송을 위한 점진적인 재조정이 시작되었다. 교통혁명, 즉 운하와 철도의 부설은 산을 넘어서 물건을 운송하는데 드는 운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서부 농산품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었다.

...서부 농산품에 대한 동부의 수요는 서부인들의 사회구조와 심리적인 태도를 점차 변모시켰으며, 마침내 새로운 연대가 생기데 되었다. 불동부 지방의 초기 시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소규모 자본가적인 사고방식이  서부 농가의 상층 지배계층으로 스며들어갔다...이런 결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켰다...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업과는 다른 성격의 농업 체제가 (서부에서) 한층 더 번성하게 되고 영농 노동력을 가족의 성원에 주로 의존하게 되면서 서부의 영농 방식이 노예 제도에 대한 상당한 위기 의식을 준 것은 분명하다...남부의 대농장주들은 19세기 중반이 되기 전에 서부의 가족 영농 체제의 확산이 노예 제도와  그들 자신의 영농 제도에 대한 위협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서부에 대한 남부인들의 적대감은 북부인들로 하여금 서부의 자영농들과 연합할 기회를 주었는데 북부인들은 이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이들 사이의 연합 세력은 1860년의 공화당의 강령이 링컨을 백악관의 주인이 되게끔 도와준 그 늦은 시각까지도 정치적 세력으로는 기능하지 못했다. 이 당시 대다수 농촌 지역 사람들이 링컨에게 반대표를 던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해의 역할은 사업가가 아니라 정치인과 언론인의 몫이었다. 서부의 땅을 가난한 정착민에게 개방하는 법안은 유산 교양 계층으로 이뤄진 정당이 일반 대중, 특히 도시의 노동자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타협의 본질은 단순했으며 직접적이었다. 즉 기업가들은 고율의 관세를 지지하는 대가로 땅을 원하는 농민들을 지원했는데, 노동 계급의 다수에게도 땅은 역시 인기가 있었다...이런 상황은 곳 철과 보리의 사이 좋은 결혼으로 나타났다. 이는 독일에서의 산업가와 융커의 결합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서부의 가족 영농 종사자들은 독일처럼 토지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합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독일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미개척 토지의 존재는 미국 자본주의의 시발단계에서부터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를 얽히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자본주의 초기 단계는 유럽에서는 폭력적인 급진운동의 대두라는 특징을 보여줬다. 유럽에서 노동조합의 창설과 혁명적인 공약을 설정하게 했던 그 급진적인 열정이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원하든 원하지않든간에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유경작지를 주려는 계획 속에 흡수되었다...서부로의 이주 경향이 미쳤던 실질적인 영향은 사유 재산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킴으로써 초기의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공화당이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에게 정부의 토지 수용권을 빵과 오락 이상의 의미있는 선물로 공짜로 던져주었다는 비어드의 지적은 무척 재치있는 것이며, 사실 그 후 사회주의 운동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서부 개척이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미국을 위해 기여한 것은 사회 계급과 지리적 영역의 재편성에서였다. 북부의 산업가들과 서부의 자유 영농의 농민들 사이의 연계는 한동안 산업 성장에 따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고전적인 대응책을 무용지물화하게 만들었다. 산업가들과 남부 대농장주들이 제휴하여 노예, 소규모 자영농, 공장 노동자들과 대립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었다.(하지만 실현되진 않고 그 대신 두 세력은 대립함으로써-나의 주) 미국을 남북전쟁의 참화 속에 밀어넣었다.


3. 전쟁원인의 설명 논리

남부의 경우 플랜테이션 경제를 확장시키려 했던 분명한 압력을 찾아볼 수 있다. 최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신 개척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본의 필요성에 대한 압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와 함께 노동력의 공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가 더 많을수록 좋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플랜테이션 경제에서 전반적인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면화라든가 그보다 덜 중요하지만 다른 특산물들이 국제 시장에서 좋은 가격에 팔려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북부의 공업에는 일정한 정부 지원이 필요했다. 가령 자본 구성의 간접비나 기업 활동에 유리한 제도적 여건의 수립 같은 것에 대한 지원 말이다. 여기서 말한 유리한 제도란 수송 제도, 관세 제도, 채무자나 소액 자본가들에게 부당안 이익을 볼 수 없게 하는 엄격한 통화 정책 등이었다. 또한 노동력의 공급 면에서 산업체는 공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임노동자를 필요로 했다...마지막으로 공업 상장에 시장 확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 당시 이런 시장은 주로 농촌 지역에서 제공했다. 그 중에서도 서부가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 점에서 서부는 우리가 지금 설정한 미숙한 모델에서 북부의 일부로 여겨도 무방하다...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지역의 확대는 서부의 자영농들을 심각하게 자극했으리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한다-나의 주)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고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미국의 사회 구조는 19세기에 서로 다른 몇 가지 방향으로 발전했다. 남부에서는 농장 노예제에 바탕한 농업 사회가 발전했다. 북동부에서는 산업 자본주의가 확립되었으며 가족 중심의 영농 체제에 기반을 둔 서부 사회와 유대를 형성했다. 서부인들과 함께 북부인들이 형성한 사회와 문화는 남부인들의 사회, 문화와 가치의 측면에서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노예제도였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는 도덕적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네빈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조성시키고 지탱시킨 경제 구조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연방 정부의 통치기구가 어느 쪽 사회를 지지하는가로 점점 좁혀졌다. 바로 이 것이 관세문제와 같은 평범한 문제의 이면에 있던 의미였으며 남부인들이 관세 지불이란 북부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라고 열띄게 주장했던 동기였다. 중앙에서의 권력의 문제는 또한 준(세미)주에서의 노예제 문제를 중대 문제로 부각시켰다. 정치지도자들은 한주가 노예주에 가입하느냐 자유주에 가입하느냐가 연방정부의 균형을 바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족으로 갈수록 노예 제도의 문제가 미해결이었거나 부분적으로만 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상황은 지극히 유동적이었으며 어떤 타협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다. 북부와 남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상대방에게 유리할지도 모르는 조치나 움직임에 대해 더욱 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분업이 발달된 복잡한 사회에서, 특히 의회 민주주의 하의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권력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는 것이 정치가나 언론인, 보다 넓게는 성직자들의 특수한 필수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또한 그 사회의 구조를 변혁시키거나 그대로 유지시키기 위해 좋든 나쁘든간에 논의를 제공해야 한다. 정치가들이 때로는 소란을 피우고 때로는 분열을 심화시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특징이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고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꾸려가는 힘겨운 일에서 손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치가의 역할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몹시 역설적이다. 정치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기 위해 노상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정치가들은 현실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위기에 대해 일반의 여론을 일으킬 필요를 때때로 느끼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또 한가지, 근대의 여론이 전쟁에로의 흐름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해명 가능해진다. 남북을 통틀어 자산가들은 중도적 여론의  핵을 형성한다...대체로 온건론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정상적 운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미덕을 지녔다. 즉 반대파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며 타협하는 태도, 실용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그것이다. 이 온건론자들은 교조적인 사람과는 정반대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든 특징은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노예제 문제를 주로 옆으로 밀쳐두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온건론자들은 기본적인 상황에 기인한 일련의 문제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통제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교역이야말로 다양한 여러 지역으로 이뤄진 한 국가를 결속시킬 수 있는 확실한 요소이다. 남부의 면화가 주로 영국에 수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곧 북부와의 연관이 그만큼 더 약했음을 의미한다...이 사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속력을 저해하는) 다른 두 가지 요소가 보다 중요했을 것 같다. 한 가지는 이미 지적했는데, 즉 북부에는 산업 자본주의적 소유제에 위협을 가할 강력하고도 급진적인 노동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미국은 대외적으로 강력한 적대국가의 도전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상황은 독일이나 일본이 직면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런 요인들을 종합해보면 미국에는 농업 엘리트와 공업 엘리트의 전형적인 보수적 타협을 추진하는 세력이 별로 없었다.

대단히 간략하게 이런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두 개의 이질적인 경제제도가 발전했고 그에 따른 상이한 문화(다 같이 자본주의적이기는 하지만)는 노예제에 관해 타협할 수 없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북부의 자본주의와 서부의 자영농 체제의 결속은 도시 엘르트와 농촌 엘리트 간의 전형적인 반동적 연합을 한동안 불필요하게 했다. 이들의 연합이 이뤄졌다면 그것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타협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그 뒤 일어난 전쟁을 종식시킨 타협세력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 요소가 그런 타협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서부의 장래의 불확실성(노예제도의 서부로의 확산 문제-노예주 편입문제와 연방정부의 권력 균형)은 미국 중앙 정부에서의 권력 배분 문제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불신과 투쟁의 모든 요인을 격화시키고 심화시켰다. 둘째로...미국 사회에서의 중요한 결속력은 강력해지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미약했다.


4. 혁명의 추진력과 그 실패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지배 계급 내의 분열은 피지배 계층으로부터 급진적 경향이 들끓어오르게 했는데, 특히 프랑스 대혁명에서 더욱 그러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는 그에 비견할 급진적인 성향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개략적으로 보아도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미국 도시에서는 피억압 장인들이나 또는 상퀼로트가 될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서부의 광대한 미개간지는 간접적으로라도 폭발의 잠재성을 감소시켰다. 둘째로, 농민 폭동이 일어난 요건이 미국에는 없었다. 사회의 맨아랫층은 농민들의 차지가 아니었고, 남부의 경우 주로 흑인들의 차지였다. 이들 노예들은 혁명을 일으킬 힘이, 혹은 의지가 없었다.

혁명의 추진력으로 발전하는 도상에 있었던 것, 즉 기존 사회의 질서를 폭력으로 바꾸어보려했던 시도는 북부의 자본가들로부터 나타났다. 흔히 급진 공화파라고 알려진 집단들의 노예폐지론 사상은 제조업자들의 이해와 뒤얽혀 잠깐동안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으나 그 뒤 성격이 변질되고 만다. 이런 급진 공화파가 전쟁 내내 링컨의 진영에서 말썽을 일으켰지만, 링컨은 연방 유지의 관건적 노선, 즉 남부의 토지 재산권을 크게 침해하지 않는다는 노선에 주로 힘입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전쟁 직후 1865-1868년의 3년이라는 짧은 기간, 급진 공화파는 전쟁에 승리한 북부의 권력을 장악해 노예제의 남은 문제와 대농장제에 공세를 취하기도 했다...(급진파는)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도 노동자와 공업가, 그리고 일부철도업자들의 연합세력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남부를 재건하자는 급진파의 주장(대토지 소유를 해체하고 토지를 흑인들에게 분배하자는 주장-나의 주)은 북부의 군사적 힘에 의해 농장 귀족제를 무너뜨리고 흑인들의 투표권과 재산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창설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남부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이런 조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로부터 100년 후에 나타난 흑인인권 운동도 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그러므로 급진파가 얼마 못 가 패배한 것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북부의 자산가들의 이익과 마찰하게 되자마자 그 계획의 급진적인 부분이 무너지게 된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토지개혁안의 실패는 결정적이었으며...이런 계획들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남부의 백인 지주와 그 밖의 재산 소유자의 우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토지 몰수와 분배는 수포로 돌아가고 플랜테이션 체제는 새로운 노동 체제에 의해 부활되었다...노동력 관리가 극히 편리한 분익소작(sharecropping)제가 널리 퍼졌다...(대농장 경영을 겸했던) 지방 상인들은 소농이나 분익 소작농에게 일반 소매가격보다 더욱 비싼 값에 일용 잡화를 외상으로 줌으로써 이들 상인은 쉽사리 농민의 노동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이런 방법으로 대다수 흑인에게는 경제적인 사슬이 노예제도의 사살을 대신했다...중요한 변화는 은행은 농장주에게, 농장주는 소작농에게 환금작물을 재배하도록 압력을 사함에 따라 남부는 더더욱 단일 작물 농업경제가 된 데 있는 것 같다.

서부의 급진적인 자영농과 동부의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공세에 직면하자 북부의 특권 재산가들의 정당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흑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태도를 점차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남부의 융커들이 노예 소유주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점차로 도시의 기업적인 색채를 띄게 되고, 북부의 자본가들이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소요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이들 사이에는 전형적인 보수주의 연합이 이룩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 2의 미국혁명을 무산시킨 테르미도르 현상이 나타났다.



5. 전쟁의 의미

몇몇 중요한 정치적 변동이 북부의 승리에 수반되어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연방 정부는 자산가들의 성채가 되었으며, 그것도 주로 거대한 자산가의 점유물이 되었다. 마치 가진자가 얻게 되리라는 성서 구절을 실현시키는 기관처럼 된 것이다. 이런 성채는 무엇보다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미국 연방은 남북 전쟁 이후 서부에 사람들이 들어차게 되자 세계에서 가장 큰 국내시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현재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고율의 관세로 보호되는 시장이다...중앙 은행제도의 확립과 정화지불제도의 재개를 통해 통화 제도의 건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철도 건설은 정부의 거대한 금융 지원을 받았으며 공유지의 처분은 목재업에서나 광산업에서의 축재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이런 식으로 유출되는 노동력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 연방정부는 계속해서 이민의 문호를 개방했다.

북부의 승리가 비록 그 결과에 모호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남부가 승리했을 경우에 비교해볼 때 자유를 위한 정치적인 승리였음은 더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남부의 플랜테이션 체제가 19세기 중반에 서부에서 자생하게 되었고, 동북부로 확산되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미국은 오늘날 근대화의 도상에 있는 나라, 즉 라티푼디움 경제에다 반민주적 귀족이 지배하고, 취약하고 의존적인 상공업 계급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진할 힘도, 의지도 희박한 상태에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 것은 농업의 상업적 성격이 좀더 미약하긴 했지만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의 상황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급진적인 폭발적 해결이나, 준반동적 독재의 장기화가 여러가지 한계와 미비점을 가진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립보다 더 한층 가능성이 높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결정적 도약이었다. 이는 적어도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에서의 절대군주제도의 폐지와도 같은 행위였고 더 큰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본질적인 전제였다...연방 정부가 노예제도의 실시에 합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이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예컨대 조직 노동자들이 뒷날 법적,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어떤 곤란을 겪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자유의 영역과 의미를 확대하기 위한 운동이 남북전쟁 이후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그것은 대체로 1865년의 승리의 불완전한 성격과 그 뒤 남부와 북부의 자산가들의 보수 연합의 형성 대문이었다. 그 승리의 불완전한 성격은 산업 자본주의의 구조에 굳게 결합되었다. 이전의 억압의 많은 부분이 남부에서는 새로운, 한층 더 경제적인 모습(소작제-나의 주)으로 부활했으며 한편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과 확산에 따라 남부도 그외의 지역에서도 다같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 나타났다...연방정부는 새로운 경제적인 억압을 묵인하거나 억압에 봉사하는 성격을 띄었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베링턴 무어, 진덕규 역, 까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ㅡ프랑스

2장 프랑스에서의 진보와 혁명

영국과의 대비 및 대비의 근원

프랑스 귀족들은 한낱 국왕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후반부터 바뀌기 시작했지만, 궁극적인 결과로서 귀족의 몰락이 나타났다. 상층 지주계급은 영국식으로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하는 대신에 주로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각종 의무를 통해 약탈적인 위치에 섬으로써 부르봉 군주 체제 하에서 귀족적인 생활을 영위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농민들의 재산이 이처럼 약탈과 파괴를 당하고 있는 반면에 상층 지주 계급은 대혁명의 전후 시기에는 점점 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프랑스의 공업은 영국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18세기 영국 귀족들과 비교해볼 때 프랑스의 귀족들은 대부분 그들의 영지 농민들로부터 현금이나 현물에 의한 부과조(dues)로 살고 있었다.

비록 극명하지는 않지만 보다 뚜렷하게 규정된 법적 지위와 농민 부과조에의 의존이라고 하는 두 가지 특성에 의해 그 뒤의 역사는 영국의 젠트리와 프랑스의 귀족을 구별하게 된다. 또 다른 생활의 방도가 제공된 도시의 성장에 의해 농촌 지역의 노동 수요가 늘어난 것에 편승한 농민들은 인신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대혁명의 시기까지는 농민들도 실질적인 토지 소유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16세기 동안 금과 은의 공급 증가가 가격 상승을 유발시켰을 때 영주의 수입에 일종의 위기가 오고 있는 징조가 나타났다. 상당수의 전사 귀족, 즉 대검귀족의 수입 격감은 심각했다. 그들의 경제적 토대의 소멸로 국왕이나 유능한 재상들이 왕권을 쉽사리 확대할 수 있었으며 이런 과정은 루이 14세의 장기 집권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파국적인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이전으로 되돌아가 랑띠에(지대, 이자, 임대 수입으로 생활하는 기생계급)의 위치를 종식시키고 직영지를 다시 구축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영국에서 그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했던 양모 교역과 같은 경제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다.

도시에서 돈을 벌어서 몰락 귀족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했던 부르주아지는 어느 정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바로 이런 과정이 15세기에 시작되었으며, 18세기 동안 계속되었다...17세기의 프랑스에서의 부르주아지의 이윤은 시장에서의 농산물 판매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농민들로부터 지대의 징수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국왕 중심의 관료적 기능의 확장은 이전의 구귀족과의 대항 과정에서 법률가를 필요로 했다. 토지를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귀족의 작위를 받거나 또는 관직 매매제를 통해 사회의 상층부로 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법복귀족이 때때로 국왕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그들은 옛 전쟁귀족들과 지방 분권주의자들과의 투쟁 과정에서는 절대주의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국왕이 관료들에게는 때때로 상당한 액수의 부수입이 생겼으며, 특히 왕권이 미약해졌던 18세기에서 그러했는데, 따라서 그런 매력이 영국식 농장 운영의 관리 경향을 감소시켰다.

대토지 소유는 영국이나 동부 독일같이 프랑스에서는 거의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농촌 지역의 토지 대부분은 농민의 손에 있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토지제도는 대규모 단위의 경지와 소규모 단위의 경지가 공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광범위한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농민들의 소작료가 그들의 생활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유지에 관심을 두었다.

대검귀족의 몰락은 국왕의 왕권확장 및 그 확립의 과정과 동시에 나타났다. 16세기의 전 기간과 그 이후 국왕은 귀족들의 법적인 특권을 상당히 제약했고, 군대를 늘렸고 귀족들의 토지에 대해 세금을 더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일에 전반적으로 관여했으며 그들을 국왕의 고등법원에 종속시켰다. 루이 14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은 베르사이유에서 호사를 누리며 빈둥거리거나 지방에서 태평스럽게 무위도식하는 존재로 영락해버렸다.
2. 상업적 농업에 대한 귀족의 반응

프랑스에서의 포도 재배는 영국에서 상업적 농업의 결과로 발생한 거대한 인클로저와 같은 변동을 농민들에게 가져다주지 못했다...중요한 차이점은 대단히 단순하다. 즉 프랑스의 귀족들은 농민들을 그들의 토지에 속박하여 봉건적인 지렛대를 동원해서 더 많은 생산물을 뽑아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그런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팔았다. 포도주의 경우에는 귀족들의 법적 특권은 대단히 유용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특권을 이용해 농부들이 포도주를 보르도로 가져갈 수 없도록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보르도에서는 귀족들의 성에서 가져온 포도주와 농민들이 가져온 포도주 사이에 경쟁이 생길 수 있었다. 포도주를 도시로 가져갈 수 있는 권리가 없었고 이와 동시에 최고 가격이 될 때까지 판매를 지연시킬 정도의 재고가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생산업자들은 그들의 포도주를 차라리 지주 귀족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18세기 보르도에서는 포도주를 기반으로 해 큰 재산을 모았던 인사들은 단지 법복 귀족들 중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출신은 주로 부르주아지였다.

중요한 문제는 프랑스 농촌 귀족들이 토지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고 생산품을 시장에 내다파는 과정에서, 인클로저를 강하게 밀어부쳤던 영국처럼 프랑스 농촌의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랑스 농촌에서 상업적인 발전을 이끌던 일부 귀족들은 농민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착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즉 귀족들은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동원해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곡물을 수탈해 팔았던 것이다. 귀족들이 이렇게 할 능력이 없고, 곡물을 수탈해가는 것에 대한 농민의 반항을 억누를 수 없었다면, 아마도 도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1세기 후 중국과 일본의 일부 지방과 비슷하게, 프랑스 농민들은 땅의 소유권은 가지고 있었으나, 사실상 상업적 지주였던 귀족들로 하여금 더 많은 곡물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련의 의무들을 지고 있었다. 이 것이 영국의 상황과 달랐던 중요한 차이점이다.

영국과 대조적으로 프랑스 농촌에 침투했던 상업의 영향력은 봉건 구조를 침식하거나 파괴하지 않았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은 구질서 속에 새로운 생활양식을 용해시켰을 뿐이다...(구체제의 종말이 오기 직전) 귀족들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봉건주의 아래서는 정치적 질서와 안전을 제공하는 등 정치사회적 기여를 했지만, 이 모든 기여는 왕정의 관리들이 대체했다. 귀족은 지방의 사법권에 대해 어느정도 권리를 보유했고, 이런 권리를 경제적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완전히 성숙한 자본가적인 농장주는 되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토지 소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특정 부류의 토지 소유권이었다. 그 소유권의 본질은 국가의 강압적 장치를 통해 경제적 잉여의 특정 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였다.

영국에서는 지방과 도시 사이의 연합(상층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연합)이 주로 왕권에 대항하기 위해 이뤄졌는데, 이런 현상은 내란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지방과 도시 사이의 연합이 왕을 통해 이뤄졌으며, 영국과는 매우 상이한 정치적 사회적 결과를 가져왔다.


3. 계급관계와 절대왕정

17세기 왕정 하에서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이미 그과 같은 역할을 완수한 영국의 부르주아지와 달리 프랑스의 농촌 지역을 아직 보이지 않는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근대화의 선봉 위치에 서지는 못했다. 그 대신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국왕의 보호를 크게 받고 있었으며 왕실의 규칙을 지키고 단제 제한된 고객을 위해서 사치품과 무기를 생산했다. 고도의 통제와 고도의 기술, 특히 무기 제조 기술이 대단히 발전된 것만 제외하면 당시의 상황은 같은 시대의 영국보다는 오히려 일본 후기 도쿠가와 시대나 심지어 악바르 시대의 인도의 경우와 대단히 비슷했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근대 사회의 기반을 이룩하게 되는 추진력, 즉 통합된 국가와 정확, 복종의 관습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왕실 관료체제에서 연원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의 왕실행정 집행은 러시아의 차르 전제 정치와 인도의 무굴왕조, 중국의 청조에서 행쟁체제처럼 농업 관료를 괴롭히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전 산업사회에서는 관료들을 왕권에 실질적으로 종속하도록 보장하는 충분한 급료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잉여가치를 산출하거나 추출할 수 없었다...프랑스 군주는 이와 같은 문제는 관직 매매에 의해 해결할 것을 시도했다. 관직 매매가 왕실 관료 전체에 침투했던 방식과 프랑스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방법은 프랑스와 다른 국가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오랫동안 관직 매매는 긍정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관직 매매에 의해 부르주아지가 왕실 행정 집행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경우에는 부르주아지는 단결이 가능했다. 아마도 당시 프랑스적인 상황으로는 그 것이 왕권을 창출하는 불가피한 제도일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구귀족을 밀어내고, 근대 국가의 기초 건설을 위한 봉건 장벽을 건설하는데 불가피한 제도였다. 특히 국왕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국왕 자신의 중요한 세입원이 되었으며, 동시에 값싸게 행정을 집행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엇다.

관직 매매는 사실상 관직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되는 개인적인 재산의 형태로 그 모습이 변했다. 따라서 국왕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통제하는 힘을 점점 상실하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이런 상황에 맞서서 국왕들은 새로운 관료, 즉 다른 관료의 행위를 감시하는 지사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직책도 곧 간접적으로 사고파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최초에는 관직 매입에 의한 귀족 지위는 매입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세습적이 것이 되었다...재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욕구는 왕실 관료체제를 통해 상당할 정도로 충족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얻으려 했던 부르주아지의 욕구는 부르주아지가 귀족이 됨으로써 점점 둔화되고 말았다.

프랑스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미 그 체제는 내재적 모순과 역설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일 관직 매매와 같은 방법이 없었다면 태양왕 루이 14세조차 아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함으로써 국민의 동의를 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관직매매는 국왕이 귀족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에 서있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었으며 의회의 어떤 실제적인 통제도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왕권 신장의 초기 단계에서 관직 매매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봉선 제도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던 국왕의 지지 세력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이런 제도의 지속적인 유지 역시 점차 부르주아지에게 봉건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되었음이 드러났다...평민 출신의 부르주아지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해서 그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게 함으로써, 관직 매매는 그들에게 외부 영향력의 배제, 집단 의식, 공동체적 일체감 같은 것을 조성시키게 되었다. 관직 보유자들은 왕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 지방의 이익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하게 옹호하게 되었다.

프랑스 사회는 영국과 같은 방법으로 도시의 부르주아적 사고를 가진 지주들로 이뤄진 의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낮았다. 왕정의 성장은 상층 지주 계급의 정치적인 책임감을 박탈하였으며, 부르주아지의 추진력을 그 자신의 이익 추구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었다...분명히 왕이 어떤 능동적인 정책을 추구했다면 그는 지배의 효율적인 기구로 쇄신된 관료 제도를 다시 창설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관직 매매와 재판관직 매매와 같은 제도의 폐지를 의미하며 보다 공평하게 부담을 분배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세입을 징수하기 위한 세제의 개혁을 의미한다. 그런 개혁은 최소한 당분간은 전쟁이나 사치를 위한 값비싼 정책의 감소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18세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독립적인 활력의 조짐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상업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여전히 존재하던 교역에 대한 내부 장벽이 제거되어야했고, 법 체계가 상당히 근대화 되어야 했을 것이다. 콜베르에서 튀르고에 이르는 탁월한 정치가들이 바로 이와 같은 계획의 대부분을 실현시키려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 지배체제는 이런 개혁에 실패했다.)

아마도 프랑스는 독일이나 일본이 나아갔던 것과 같은 보수적인 근대화의 길을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전체적인 설명에서 점차 드러나게 되는 이유들로 인해 프랑스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그 장애는 보다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군주정치는 일관성있는 정책을 추구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데에는 농업 문제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귀족의 공격과 절대 체제의 붕괴

18세기 후반기의 상황은 상업적, 자본주의적 관행이 봉건주의적 방법을 통해 농업에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보다 더 광범위하게 되었다. 이런 침투에 의해 발생한 한 형태는 이미 거부된 바 있었던 봉건적 권리와 부과조의 부활이었다.

절대 군주제도와 결부되었던 봉건 제도들은 정치 기구를 구성하였으며 이 기구를 통해 프랑스의 토지귀족들은 농민들로부터 경제 잉여를 착취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기구가 없었다면 농촌 지역에서의 경제 제도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공고한 특권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프랑스의 귀족과 영국의 상층 지주 계급을 구분하는 본질적인 특징이었다. 영국의 지주계급은 농민들의 잉여 착취 방법이 프랑스의 귀족들과 완전히 달랐다. 바로 이런 점에서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적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단순한 논리가 사람들을 혼란으로 이끌 수 있다. 정치 기구가 오히려 결정적인 것이었으며, 대혁명 시기의 농민들은 그들을 압제해왔던 이런 장치들을 무너뜨리려고 공격했을 때 가장 본질적인 정치적 본능을 나타냈다.

자본주의는 틈만 있으면 프랑스의 농촌 지방으로 스며들었는데 그것은 때로는 영주의 반동을 통한 봉건주의의 형태로, 때로는 봉건주의에 대한 공격의 형태로 또는 공식적으로 지지되던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진보와 이성의 깃발 하에 스며들기 시작했다...비록 한정적인 자본주의적 침투가 18세기 동안 농업을 혁명화하는 데 실패했고, 농민들을 봉건 체제에서 분리시키는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그 것은 분명히 농민들에게 구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적대감을 증대시켰다. 농민들은 그 당시 교묘한 법률가들이 만들어 놓은 봉건 부과조의 증가와 이미 사멸된 형태의 봉건 부과조의 부활에 분노했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인클로저에 대한 정부의 농간이 농민들로 하여금  군주에 대항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1789년 꼬뮌의 많은 책자들은 열정적으로 구질서의 회복을 주장했고, 인클로저 칙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움직임은 제 3신분을 뭉치게 만들었고, 많은 농민과 도시 거주민들의 한 분파가 구체제의 질서에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루이 16세 하에서 국왕의 사법기구는 부유한 평민들을 기존 지배 체제 속으로 흡수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기존 지배 체제는 개혁을 반대했던 핵심이었다...다수의 부르주아지가 귀족 계층으로 흡수된 이런 사실은 지금까지 프랑스대혁명을 설명해온 일반적인 논리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상승적 이동과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융해를 둘러싼 전반적 상황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융해 현상이 대부분 국왕의 영향력을 벗어나 행해졌으며, 오히려 국왕에게 대항해 발생했다. 인클로저 운동을 전개했던 지주들은 그들의 휘하에 있었던 농민들의 문제에 대해 국왕이 관여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부유한 도시인들도 왕실이 몇몇 특정 업종에서 기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의 중요한 이들 계급들은 사멸된 봉건체제나 절대왕정 체제로부터 어떤 정치적 무기를 지원 받을 필요도 없었고, 또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프랑스의 경우 군주 체제는 평민들을 토지귀족으로 전환시켜 봉건 제도의 옹호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므로 군주 체제는 그들로 하여금 특권의 강고한 옹호자가 되게했고, 개혁에 대한 그 체제 자체의 노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방법은 결국 구질서에 동화되지 못한 부르주아지들을 적대세력으로 만들었다.

18세기 후반기 동안 이런 구질서에 동화되지 못한 부르주아지들은 점점 더 강력해졌다...상업과 그보다는 정도가 낮았지만 공업은 그때까지 교역과 생산에 부과되었던 제약을 파괴하려는 욕구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시켰다.  튀르고가 바로 이런 세력의 대변자로서 봉사했다. 그는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명된 전제주의의 산업과 농업에서의 생산과 교역의 자유를 신봉했다. 튀르고의 개혁안은...과세 제도의 개혁, 농작물의 자유거래, 부역과 길드에 대한 제재, 노동자들의 직업 선택 자유 등이 그 속에 포함되었다.

튀르고 정책은 농작물의 자유거래로 일어난 물가 폭등에 의해 식료품 소비자들을 적대감에 가득차게 했다. 소요가 전국으로 확산했다...옛날식의 통제 경제, 즉 생산의 증가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국왕의 자비로운 권위가 가난한 사람에게 필수품의 공정 분배를 보장하는 경제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가 있었다. 하층 농민과 도시의 서민, 곧 유명한 상퀼로트를 기반으로 한 이런 감정이 대혁명 그 자체에 급진적인 조처를 부여하게 된 주요 원천이었다. 그 밖에도 튀르고의 정책 제안은 관료 제도의 부패로부터 이익을 취했던 금용가와 제조업자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국내 산업, 특히 제철, 면직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고, 또 산업에 필수적인 천연자원의 수출을 금지하는 것에 튀르고가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제조업자들은 분노했다.

튀르고에 반대해 결속한 이익집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준다. 즉, 봉건 제도의 수명이 다해가는 족쇄를 파괴하고 사유재산 및 자유경쟁과 유사한 그 무엇을 수립하려고 노력했던 세력이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의 지배적인 세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이 18세기 대부분의 기간을 통해 강해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점은 사실이었다. 이런 단순한 의미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는 종종 봉건주의적 가면을 쓴 채 나타났으며, 이런 현상은 농촌에서 특히 심했다. 관직매매나 영주들의 반동이 보여준 바, 지배적 제도 내에서 토지 소유권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강했다.

...자본주의는 구체제에 침투해 농민 뿐 아니라 특권 계급의 중요한 계층들까지도 왕정에 적대하는 방향으로 구체제를 혼란시켜서 왕정에 등을 돌리게 했다.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상퀼로트와 농민들에게 기반을 두었던 대혁명 배후의 급진적인 추진력이 강력한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부유한 농민층은 이런 급진적인 반자본주주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구체제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운 사유재산권을 추구하던 배후 세력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중요한 승리를 얻었다. 이런 승리를 얻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들의 가장 강력한 적들로부터의 도움까지도 필요로 했지만 말이다.


5. 대혁명 시기의 농민들과 급진주의의 관계

(대혁명 이전 프랑스는) 영국과 같은 상업혁명도 없었고, 프러시아와 러시아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일어났던 봉건적 반동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많은 프랑스 농민들은 소토지 소유자들이 되었다...보유토지가 부족하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의 수가 (대혁명 전) 2세기 동안 꾸준히 늘어났다는 것이다.

...오랜 촌락 사회가 근대화의 동력에 따라 분해됨에 따라 프랑스의 빈농은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주된 희생자가 되었다...빈농들이 처한 상황은 그들 대다수를 격렬한 평등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빈농들에게 있어, 근대화란 부농들이 대혁명 기간의 몰수 토지는 물론 토지 분할에서 빈농들을 축출하는 것이었으며, 토지의 근대적 사적 소유를 추진하는 일환으로 그들의 이삭줍기와 방목권을 규제해 결국 굶주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대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도시와 농촌의 급진주의 세력들은 손을 잡았으며, 이런 사실은 영국 혁명과 비교해 프랑스 혁명에서 폭력과 격렬함이 일층 더 심각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농민 혁명은 단일하게 일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도시와 수도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과 때로는 합류했고, 때로는 대적했다. ...1789년 까지도 농민들이 적극적인 혁명 세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심한 충격이 있어야 했다. 이 충격은 머지 않아 도래했다. 그 충격의 하나를 유발한 것은 삼부회를 전후한 귀족의 행동과 국왕의 우유부단한 태도였다.

...보수 세력이 대혁명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할 때마다 아래로부터 급진주의의 공세가 이 혁명을 거세게 밀고 나갔다 3대 민중 봉기, 즉 유명한 3대 투쟁일은 일련의 좌경 사태를 특징짓는 사건이었다...각 봉기의 주요한 추진 세력은 파리의 상퀼로트였다. 각 봉기는 그것이 농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한도 내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런 지지가 고갈되거나 상퀼로트의 요구와 토지 소유 농민의 요구가 서로 갈등하게 될 때에는 급진적 혁명을 이끄는 추진력은 감소되었고 도시의 잔여 세력은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농민이 대혁명의 주된 추진 세력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것의 조정자라고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나아가 농민은 혁명의 주된 추진 세력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매우 중요한 세력이었음, 돌이켜볼 때 혁명의 가장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성과라 할 수 있는 봉건 제도의 해체에 깊이 간여한 세력이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급진주의 혁명의 지원이 필요했다. 이 두 혁명은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움직였고 서로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두 혁명은 소유에 대한 태도의 대립 때문에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다. 이 것은 재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양립 불가능성이었다. 급진주의의 흐름이 분열하게 되고 유산계급에게 더이상 급진주의 혁명의 도움이 필요없게 될 때 대혁명은 정지될 수 밖에 없었다.

대혁명의 급진주의적 국면은 많은 지역의 경우, 비록 짧고 일관성이 없었지만, 유산 농민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가장 나빴던 것은 도시민이나 외부인이 농촌 지역에서 공물을 징발하는 일을 맡았던 것인데, 그들은 예전의 국왕의 행정관리나 징세청부업자들보다도 무자비한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혁명 군대의 지원까지 받았다.

혁명의 급진주의적 국면에서 분명하고 결정적인 사실은 이렇다. 도시의 상퀼로트는 자코뱅 지도자들로 하여금 혁명 수호의 정책을 추진하도록 밀어부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농민은 혁명을 이반하게 되었다...대혁명의 급진적인 국면에서 도시의 상퀼로트의 요구와 열망은 농촌 지역 대다수의 주민들과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인 갈등을 보이게 되었다. 이 갈등의 뚜렷한 징후는 도농간 교류의 악화, 특히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의 악화였는데, 이는 나중에 러시아 혁명에서도 혁명의 진로와 귀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된다. 1793년말에서 1794년 초의 겨울에 파리의 상퀼로트의 경제 상황은 극심하게 악화되었는데, 이런 상황은 상퀼로트 조직이 농촌 지역에 다니면서 약탈 행위를 자행한 것에 분노한 농민들이 농산품의 공급을 점점 줄인데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고 그나마의 경제 통제력이 와해된 이후 파리 빈민의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된 상태였다. 그들의 이런 상황은 1795년 봄 폭동으로 나타났다....폭도들은 국민 공회 회의장에 난입했으며, 공회 의원 한 사람을 살해해 그의 머리를 창에 꽂고 다녔다. 그러나 이런 민중의 혁명적 열기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다. 농촌 민중은 파리 민중과 공동 보조를 거부했다. 또한 혁명 정부도 급진주의 세력에 양보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국왕은 전혀 영향권 밖에 놓여있었으며, 귀족들도 역시 같은 형편이었고, 혁명 군대는 전선에서 승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질서와 재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상퀼로트의 최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군대가 민중의 반란에 적대적으로 움직였다. 뒤이은 탄압은 백색테러의 막을 열었다. 도시민들이 아무리 급진적이었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의 도움이 없는 한 아무 것도 이룩할 수 없었다.


6. 대혁명에 저항했던 농민: 방데의 농민

반혁명이 일어났던 방데 지역의 주도적인 농민들이 사적 토지 소유의 주요한 혜택을 이미 향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혁명이 도래할 때 그것을 좌경으로 몰고 나갈만한, 토지에 굶주린 준프롤레타리아트적 농업 노동자가 이 지역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혁명에서도 반혁명이나 내란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때껏 알아오고 받아들여온 세계와 돌이킬 수 없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결정적인 시점이 도래한다. 어떠한 계급이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기존 제도가 붕괴되어 가는 순간순간마다 놀라운 새로운 진실을 연속적으로 느끼게 된다. 또한 유니크한 순간 혹은 결단이 있으니, 즉 왕궁을 습격한다든지 국왕을 교수형에 처한다든지, 역으로 혁명적 독재자를 전복한다든지, 그런 일들이 한번 일어난 후에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런 행동을 통해 새로운 위법행위가 새로운 합법성의 기반이 된다. 인구의 거대한 층이 사회 질서의 일부가 된다. 방데의 반혁명은 이런 모습들을 다른 격렬한 사회 변혁과 공유한다.


7. 혁명적 공포 정치의 사회적 결과

공포정치가 효과적인 정책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즉 의미있는 정치적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대중의 추진력을 어느 정도 합리적이며, 중앙집중화된 통제 하에 놓아둘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추진력은 주로 상퀼로트로부터 나왔다. 기요틴 처형제를 요구했던 주장 속에는 처음부터 순수한 분노 이상의 어떤 것이 포함돼 있었다. 그 것은 유례없는 참상을 낳은 시장 기능에 대한 항의였으며, 부유한 투기꾼들에게 그들이 삼킨 축재물을 토해내게 강요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급진주의 혁명은 그 본질에서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었기에 사유재산 제도와 인권을 위한 혁명에서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었다. 상퀼로트 혁명의 반자본주의적 요소와 빈농들의 저항은 구체제의 후반기와 대혁명 기간 동안 자본주의의 특징이 점진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생긴 고통에 대한 반응이었다. 급진주의자들을 극단주의 도당으로 치부하는 것,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파생된 기형적 돌출물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코 앞에 두고도 회피하는 것이다. 급진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급진주의자들의 압력이 없었으면 부르주아 혁명이 그렇게 깊숙이 진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귀족적인 특권의 얽히고섥힌 연관 체계 전체, 즉 국와과 토지귀족, 봉건 영주의 권리 등 구체제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던 복합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런 타격은 사유재산과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졌다. 대혁명이 가장 우선시한 추구 대상이자 또 그것이 남긴 주된 결과가 부르주아적이며, 자본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강변이다...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모든 세력이 궁극적으로 성취했던 결과는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 앞의 평등에 기초한 정치 제도와, 사유재산 제도에 기초한 경제제도의 승리였다는 것, 그리고 대혁명은 그런 전반적인 발전에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낯익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의 관점에서 볼 때 토지 귀족의 정치 권력이 거세된 것은 프랑스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중대한 계기였다...절대왕정 체제는 그 당시 독자적인 경제 기반의 구축에 어려움을 겪던 귀족들을 회유하기도 했고, 통제하기도 했다. 혁명은 바로 부르봉 왕조의 이런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는 토크빌이 오래 전 지적한 대로다. 그 결과는 산업화의 진전이 가져온 충격 하에 파시즘으로 치닫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 우익권위주의 정부의 사회적 기반 중 핵심-토지귀족-이 프랑스에서 파괴된 것이었다. 이런 광의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 이전의 면모를 벗은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대신하는 부분적 대응물로서, 또는 역사적인 대안으로서의 성격을 띈다. 부르주아 혁명의 추진력이 미약했거나 그 것이 유산된 곳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른 국가의 경우 파시즘이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였다. 이런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적 귀결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 토지 귀족의 근대로의 이월을 막아버림으로써(그것도 18세기 후반에)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따라서 토지 귀족의 처리라는 면에서 프랑스 혁명은 긍정적 기여를, 그것도 결정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지 귀족을 무너뜨렸던 바로 그 변혁 과정은 또한 소농을 기초로 한 토지 소유를 창출했다. 바로 이런 면에서 그 결과는 한층 이중적이다...대혁명의 급진적 국면에서 행해진 곡물의 강제 징발이라든가 곡물 가격의 최고 가격제 실시라든가, 농업 노동자나 소토지 보유농의 보호 조치는 상층 농민을 결정적으로 공화정에 반대하게 만들었다. 이 것은 오랫동안 공화정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첫째, 영향력있는 농민들은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재산과 마을에서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기를 원했다. 구체적으로 이런 요구는 국유재산의 매각을 통해 확보된 토지 소유를 귀족의 도전이나 토지 재분배를 내포하는 어떤 급진적인 사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둘째, 자본주의 공업의 지속적인 발전은 소농적 토지 소유를 위협하는 경향이 있으며, 소농들은 시장 생산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농민의 대변자들은 농산물의 거래 조건이 농민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종종 불평했다. 이런 이유들이 복합된 결과 소농에 기초한 토지소유는 이중적 결과를 낳았다. 즉 소농적 토지 소유는 한편에서 대토지 소유-자본주의적 형태건 전자본주의적 인 귀족적 형태건 간에-에 대한 위협으로, 또 한편에서는 그런 대토지 소유를 보호하는 외벽으로 나타났다. 20세기에 이런 이중성은 농민들이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데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8. 요약

프랑스 사회는 영국처럼 부르주아 색채를 띈 지주들의 의회를 창설하지 않았으며 아마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혁명 이전 프랑스의 사회 추세는 상층계급으로 하여금 자유 민주주의의 우호적 안내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적이 되게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려면 어떤 제도들이 떨어져 나가야 했다.

절대왕정이라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상층 지주 계급은 농민들에게 지우는 부담을 늘림으로써 자본주의의 점진적 침투에 적응했고, 한편으로는 농민들로 하여금 사실상의 토지 소유에 근접하게 했다.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의 근대화는 왕을 통해 이뤄졌다. 이런 과정의 일환으로 영국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융합이 이뤄졌다. 이런 융합은 국왕에 대한 대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왕을 통해 이뤄졌으며, 다소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 유용한 약어를 쓰자면, 상당수의 부르주아지의 봉건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는데...이 사태는 결국 국왕의 행동 반경을 심하게 제한했으며 사회의 어떤 계층이 어떤 부담을 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도 제약이 따르게 되었다. 국왕에 대한 이런 제약에 루이 16세의 성격적인 결함이 겹친 것이 내 생각에는 계급이나 집단간의 어떤 특별한 심각한 이해 갈등 보다도 프랑스 혁명을 불러 일으킨 중요한 요인이다. 만일 대혁명이 없었다면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융합은 그대로 지속되었을 것이며, 그 연합 세력은 프랑스를 위로부터의 보수적 근대화라는 방향으로 끌고 나갔을 텐데, 이런 방향은 그 골격이 독일과 일본에서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았다. 대혁명은 이미 경제력의 지배적 우위를 차지한 부르주아지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아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 내부에서도 이렇게 변신해가는 집단이 있었지만, 절대 왕정의 이전 역사는 부르주아지가 제 힘으로 많은 것을 성취할만큼 강해지는 것을 억제했다. 오히려 일단의 부르주아지는 신분제와 군주제의 붕괴로 터져나온 도시 민중의 급진주의 운동에 편승해 권좌에 오르기도 했다. (혁명 보수파를 가리키는 말인 듯)

이 급진주의 세력은 혁명이 후퇴하거나 이 일단의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한 시점에서 혁명이 멈추는 것을 막았다. 한편 농민들은, 이 시점에서는 그 중에서도 주로 상층 농민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용해 대혁명의 주된 성과인 영주 제도의 해체를 밀고 나갔다. 한동안 농촌과 도시의 급진주의는 다 같이 소규모의 재산제와 복고적인 집산주의라는 모순된 지향이 뒤섞인 가운데 공동전선을 펼 수 있었는데, 이 공동전선은 대혁명이 가장 급진적 국면에 이르는 동안, 그리고 그 국면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과 혁명군대는 식량 공급의 필요상 부농들의 이익과 대립관계에 서게 되었다.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파리의 상퀼로트에게 가는 식량공급이 끊어졌고, 이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앗아가 결국 급진주의 혁명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로 이어졌다. 상퀼로트가 부르주아 혁명을 만들었고, 농민들이 그 혁명이 어디까지 진전될 것인가를 결정한 셈이었다.

독재와 민주주의 사회적 기원 ㅡ 영국

1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혁명적 기원


1장  영국 그리고 폭력과 점진주의의 관계

농촌 지역의 자본주의에로의 전환에 영향을 미친 귀족의 추진력

"17세기 영국의 내란 기간에 폭발한 사회적 투쟁은 그보다도 몇 세기 전부터 시작됐던 복잡한 사회변동 과정 속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근대의 세속적인 사회는 중세의 봉건 제도와 가톨릭 교단의 왕성하고도 대단히 복잡한 과잉 성장을 통해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농촌과 도시에서 상업의 중요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봉건 제도가 와해되어가고,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절대군주제로 대치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몇가지 징후가 14세기 이래 계속 나타났다. 이러한 절대 군주제의 대체와 상업의 중요성 증대는 하나의 문화가 몰락하고 다른 새로운 문화가 대두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안과 고난의 반영이자 원인이기도 한, 점점 더 격화되는 종교적인 투쟁의 틀 속에서 전개되었다."

"왕의 평화 정책과 양모 교역은 서로 특별한 양식으로 결합되어 자본주의와 혁명으로 영국을 몰아간 중대한 동력의 하나를 형성했으며 그 혁명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다른나라들, 특히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강력한 통치자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그들의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통치자들의 성공이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사실이 의회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심대한 기여를 했다...영국적인 특수 상황의 핵심적인 열쇠는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도시나 농촌 지역의 상업 세력이, 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해도, 주로 왕실과의 대립 속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요먼은 농민 인클로저의 주요한 막후 세력이었다...요먼은 그들의 상황의 한계 안에서 전통적인 농업 관행을 깨뜨리고 이윤을 높이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데 너무나 열심이었다...구질서에 대한 투쟁에서 주요한 승자가 되어 농업 자본주의의 물결을 일으킨 사람들은 바로 요먼 출신이거나 좀 더 많이는 상층 지주 계급 출신이었다. 이러한 진보의 주요한 희생자들은 대개 일반 농민이었다."

"영국을 궁극적으로 근대의 세속적 사회로 이끌고 간 주된 담당 세력은 이 시대의 도시와 농촌의 상업 지향적인 사람들이 그 근본이 되었다. 프랑스에서와는 대단히 대조적으로 이들은 가부장적인 왕권의 지원이라는 우산도 쓰지 못한 채 그들 자신의 힘으로 밀고 나갔다...특히 내란이 가까와 올 무렵, 부유한 도시 상인들은 왕의 독점권에 반대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국왕이란 그들의 생산 활동에 방해자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그들 자신의 야망 성취에는 장벽이 된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튜어트 왕조의 1,2대 왕은 이러한 추세가 농민과 도시의 하층 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얼마간 노력했다. 유랑자 신세가 된 많은 농민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었는데, 간헐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어느 주의 깊은 역사가는 이 때의 정책을 일종의 발작적인 시혜 정책이라고 부르고 있다. 찰스 1세가 의회의 존재를 무시하고 스트라포드와 로드를 통해서 11년 간 전제 정치를 폈을 때, 시혜정책을 펴려는 노력은 더 적극적으로 추구된 것 같다.

...왕실재판소는 인클로저로 인해 농민이 농토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보호책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국왕의 이런 시혜 정책의 강화 노력에는 벌금에 의해서 왕실의 금고를 충실히 하는 의미 이상은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정책의 강화도 그 효력이 잘 미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군주와는 달리 영국 국왕은 자신의 의지를 잘 집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행정 및 사법 기구를 농촌 지역에까지 설치 할 수 없었다. 농촌 지역의 질서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젠트리로서 이들은 국왕의 농민 보호정책이 견제하려는 바로 그 당사자였다.

따라서 국왕이 추구한 이 정책의 주된 결과는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이 하고싶은-또 사회적으로 유익하다고 생각되는-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게 반기를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왕의 정책은 결국 도시와 농촌에서 여러가지 다른 유대로 묶여있던 상업 지향적인 분자들을 국왕에 반대하는 하나의 응집된 세력으로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스튜어트 왕조의 농업 정책은 분명히 실패했으며 '개인의 권리와 왕의 권위 간의 투쟁에서 최후의 수단으로서 종교적 구속력이 발동된 것에 다름 아닌' 내란을 촉진시키고 말았다."


2. 내란의 농업적 성격

"...상층 지주 계급 중에서, 그리고 그보다 수가 적지만 요먼(소규모 자본가, 차지농) 중에서 상업 지향적인 사람들은 구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왕과 왕당파에 대한 주된 대항세력이었으며, 이것이 내란(1642-1646, 1648-1652)이 일어나게 되었던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논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친 도시상업의 성장은 영국의 농촌지역에 농산물 시장을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농촌 지역 자체가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농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이 변혁에의 적응에 성공한 진취적인 안사들이 중심이 된 농촌 집단은 귀족과 요먼 사이에 산재한 광범한 계층, 말하자면 젠트리였다. 그러나 젠트리의 성공은 단지 농업적인 활동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던 젠트리는 도시의 상층 계급이나 또는 좁은 의미의 부르즈와지들과 온갖 개인적인 친분과 사업 상의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급으로서의 젠트리로부터 영국 농촌 사회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변형시킨 역사의 결정적인 흐름을 대표하는 주세력이 나왔던 것이다."

"상업과 또한 얼마간의 공업으로 충격을 받은 영국 사회는 위로부터 아래로 균열이 다수 나타났으며, 그러한 충격으로 불만이 누적된 급진층이 대두하여 일시적으로 작열하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뒤에 적당한 데서 살펴보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련의 발전 단계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과 같은 주요한 근대 혁명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장기긴의 경제적 추세의 결과 밀려나고 있던 계층이 사회 표면에 부상하게 되는데, 바로 이 계층이 구체제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악역'을 주로 떠맏게 되며, 그 결과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위한 길을 깨끗하게 닦아 놓게 된다.

영국의 경우 이러한 비열한 행위의 대표적인 것은 찰스 1세를 처형한 상징성 깊은 사건이었다. 국왕을 재판하라고 부르짖는데 앞장섰던 세력은 군대였다. 여기에는 일반 대중의 영향력도 상당히 강하게 작용했다. 군인들은 젠트리 아래의 계층, 즉 도시의 저니맨이나 농민 출신이 무척 많았다."

"근대화론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을 하나의 같은 사회 계층으로 묶어주는 많은 끈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하층계급 즉 '미천한 부류'에 대한 공통된 공포감이었다. 바로 이러한 유대관계가 영국의 혁명 기간 동안 계급의 제휴 관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반란 지도자의 정책은 명확했으며, 또한 직선적이었다. 그들은 국왕이나 하층 계급의 급진주의자들이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침해하는데 반대했다."

"청교도 혁명의 혁명적인 결과는 법과 사회적 관계의 영역에서 심대하고 지속적이었다. 고등재판소의 폐지로, 농민은 인클로저의 진행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중요한 방어책을 잃어버리고 만다. 몇 가지 인클로저 시행저지 조처가 크롬웰 치하, 특히 주요 장군들의 통치 후반부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런 성격의 노력으로서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비록 혁명을 지지했던 젠트리의 사회적 성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문이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승자가 누구인가는 분명했다. 비록 전반적인 영향력이 한동안 실감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왕정복고와 함께 인클로저는 승자 앞에 모든 것을 갖다 주었다.' 국왕의 권력을 무너뜨림으로서 내란은 인클로저를 추진하는 영주들에게 부과되어왔던 중요한 제약을 완전히 제거시켰으며, 이와 동시에 영국이 일종의 '지주위원회'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 지주위원회란 18세기 의회에 대한 가식 없는 정확한 표현이다.

영국의 내란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그 투쟁이 부르조아의 정치 권력 장악으로 귀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점에서 정확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의 상층 계급은 정치기구에서 지배권을 계속 확고하게 장악했으며...18세기 동안만이 아니라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논의는 한낱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영향은 내란 이전부터 많은 농촌 지역에 침투하였고, 농촌을 변형시켰다. 인클로저를 추진했던 지주와 부르주와지 사이의 연관은 대단히 밀접하고도 두터웠기 때문에 그 당시의 복잡한 가계에서 어디까지가 지주의 끝이고 어디서부터가 부르주아지의 시작인지 구분하기가 종종 어렵다. 이 투쟁에서 의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동맹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현대 어느 역사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귀족 체제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데, 즉 출생이 아니라 돈이 그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의회 자체는 토지 자본자들의 도구가 되었으며, 국가는 휘그당이든 토리당이든간에 이들 지주 자본가들과 그 연합 세력을 위한 이익의 추구에 확고하게 전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기치로 내건 원칙은,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유 재산이 무제한적으로 사용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그 사회 전체의 부와 복지가 꾸준히 증대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마침내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걸쳐 도시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내란 이상의 폭력과 고통을 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향한 원래의 추진력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 시기에 도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 못지 않게 농촌에서도 강하게 불붙어서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끊임없는 바람을 받아 구질서를 불태워버리는 불길을 농촌 곳곳에 타오르게 했다.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은, 그 원칙들이 밀어내고 나아간 내란 기간 상당한 정도로 극복한 낡은 원칙들과는 전혀 대조적인 적이었으니, 그 낡은 원칙이란 신성시되어온 권위 체제와 경제영역에서 신성시된,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효용을 위한 생산의 우위였다. 17세기에 이와 같은 원칙들이 승리를 얻지 못했다면, 실제로 영국 사회가 평화적이었던 그 정도까지-18세기와 19세기의 그 사회가 어떻게 평화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었을까를-상상하기는 어려웠다."


3. 인클로저와 농민층의 파괴

"18세기의 대지주들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은 부분적으로는 내란이 있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경향의 결과인데, 그 경향이란 주로 지방 명사들의 권위가 워낙 강하다는 것과 게다가 튜더 왕조나 스튜어트 왕조와 같은 절대 왕조 하에서도 이 권위를 제한할만한 강력한 관료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688년경부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 태토지 소유자들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개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한다. 국가의 중요한 요지마다 그들의 토지는 뻗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하층 젠트리를 희생시키기도 했고 특히 일반 농민을 희생시켰는데 이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인클로저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현상이라든지, 대지주가 농민의 공동지를 잠식했기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공동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시대는 농경 기술 면에서 진보의 시대였다. 즉 비료의 사용과 새로운 작물의 발견과 윤작이 이 기간에 확대된다. 새로운 경작방법은 공동 경작의 원칙으로 지배되는 경지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었고, 게다가 새로운 경작방법에 소요되는 비용은 소농이나 중농의 재산 정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작 단위가 클수록 비용이 적게 들고 수익이 높아진다는 것이 확실히 이 당시 농가 규모를 크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취해진 농업 발전의 세가지 중요한 방안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으니, 즉 그것은 보유지의 통합, 인클로저, 그리고 종신계약 차지를 연한부로 계약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상당 뿐에 걸쳐서 대농장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그것이 갈수록 상업적 원칙으로 경영됨에 따라 중세의 농민 공동체는 결국 붕괴되었다. 절대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8세가와 19세기 초기 의회의 인클로저 물결은 한동안 계속된 농민 토지의 침식을 법적으로 뒷받침한데 불과한 것 같다. 다른 나라들의 예에서도 보듯이 농민 공동체에 상업이 침투하면 일반적으로 소수의 수중에 토지가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영국에서 이런 경향은 늦어도 16세기면 눈에 띈다."

"산업의 성장과 함께 인클로저의 물결은 대지주들의 세력을 크게 강화시켰으며 반면에 농민들의 기반을 무너뜨려 그들 농민을 영국 정치 생활로부터 완전히 제외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되는 쟁점에 비추어 결국에는 이 것이 결정적인 점이다. 나아가서 '잉여' 농민들의 경우, 이들에 대한 도시나 공장의 흡인력이, 높은 농촌 세계의 축출력보다 중요한 작용을 했는지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든간에 그는 촌락 공동체의 전통적인 생활과 비교해볼 때 필경 전락과 고통을 의미하는 2가지 대안(임금 노동자화 또는 빈민구호대상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가 초래한 폭력이나 강제가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졌으며 또 그것이 주로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행해졌고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확고한 발판 위에 올려놓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그 것이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에 자행한 거대한 폭력이었다는 사실까지 은폐해서는 안될 것이다."


4.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귀족의 통치

"폭력적인 과거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왕을 희생시킨 대가로 의회가 강화된 것이었다. 의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사회 구성 요소들의 요구가 상승함에 따라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활동 장소가 되는, 그리고 이런 집단들 사이의 이해 다툼을 평화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구가 되는 융통성있는 제도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의회는 내란 시기에 상업 지향의 상층 지주계급의 도구로서 출범했지만, 의회는 단순히 그 도구만은 아니었고, 그 후의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상층 지주계급, 즉 젠트리와 작위 귀족들이 강한 상업적인 색채를 띠었다는 것은 또한 산업 발전 자체에 귀족들의 강한 반대가 없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상층 계급 중에서 반감을 표현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상층 지주계급의 가장 강력한 부분이 상업 및 산업 자본주의의 정치적 전위로서 행동하였다는 말은 정당하다."

"폭력적인 과거의 또다른 중요한 결과는 농민계층의 붕괴였다. 비록 무자비하고 몰인정하게 들리겠지만, 농민층의 붕괴가 평화로운 민주적 변화에 미친 기여는 의회의 강화만큼이나 중요했다고 주장하는데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에서의 근대화가 거대한 보수적, 반동적 세력을 온존시키지 않은 채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인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과 일본도 어느 정도 이 세력을 온존시킨 채 근대화를 해야 했다. 또한 이 사실은 러시아와 중국 방식의 농민혁명의 가능성이 역사의 일반적인 보편성과 다른 것임을 뜻한다."

"지주 계급의 결속된 정치적, 경제적 힘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절정에 달했다. 따라서 이들 지주 계급은 힘의 잠식이 매우 느리게 일어난 반면, 경제적인 기반이 계속 확고했기 때문에 자기 방어와 양보가 훨씬 쉬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는 흔히 쓰는 기계적 대조는 피해야 한다. 즉 도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성장했다 할지라도, 상층 지주계급은 전혀, 그것도 짧은 기간동안 몰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가 되면 도시의 보다 근대적인 자본가들은 그들의 경제적인 성취 기반을 통해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해놓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의 역사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할 수가 있었던 보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주 계급의 지도하에서 그들 근대적 자본가들을 위한 길이 순조롭게 닦인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자본가들은 프러시아의 융커와 같은 존재에 의지해 국가 통일을 이룩한다든가 국내의 관세장벽을 무너드린다든다 단일한 법 체계와 근대적인 화폐체제를 확립한다든가 그 밖의 산업화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충족할 필요가 없었다. 영국에서는 정치 체제가 합리화되어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근대 국가가 이룩되어 있었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그 국가로부터 근소한 도움만 받고서도 최초의 성숙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로서 전 세계의 넓은 지역을 그들의 교역 무대로 할 수 있었다...그들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란의 결과라든가 군주제 이전에 겪었던 경험, 또 영국이 육군보다도 해군에 의존하고 있었던 점으로 인해 영국 국가의 성격이 비교적 덜 억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러시아와 같은 육군과 관료에 의존하는 강력한 군주제가 없었던 사실이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 발전을 손 쉽게 했다."

"19세기 전반기와 그 훨씬 뒤까지도 영국의 상황은 당대의 독일의 상황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독일에서는 세력이 훨씬 약한 부르주아지가 일반 대중의 불만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근대화에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토지 귀족에 의지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지주들이 어느 정도는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까지 해야 했다. 1840년 이후 지주 계급은 공장법을 지지하는 것이 곡물법에 대한 제조업자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편리한 방법이란 것을 알게되었다...그러므로 19세기 영국의 토지 귀족 중에서 민주주의의 전개에 완고하게 반대한 사람들은 드물었고 소수파였다...영국의 상층 지주 계급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반적 발전에 동참했고 부르주아지와 자본가다운 면모를 확득해왔기 때문에, 유럽 대륙의 상층 지주계급에 비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의 발전에 반대할 이유가 훨씬 적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끝나고 증기선이 발달함에 따라 미국의 농작물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농업 불황이 이 시기에 초래되었는데, 상층 지주계급의 경제적인 기반을 심각하게 잠식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으며, 따라서 영국을 독일과 비교해보는 것이 다시 도움이 된다. 융커들은 자기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온존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할 수 있었으며, 독일의 다른 지역의 토지 소유 농민들과 농업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어떤 점에서도 독일에서는 곡물법 폐지에 비견될만한 경험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산업의 선도부문은 철과 보리의 결혼을 성사시켰으며(1892년 관세에서 이 결합은 극치에 달했다) 이런 타협의 결과 얻게 된 것이 해군 증강 계획이었다. 융커, 농민, 기업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제국주의와 반동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데 결속한 것이 독일 민주주의에 파국적 결과를 가져왔다.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이와 같은 결합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그보다 훨씬 오랜 역 사가 있었다.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성숙한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한 전혀 새로운 사회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대안, 오히려 자유무역 정책의 부속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농업 문제에서 1874-1879년간 보수당 정부는 단지 소극적인 미봉책만을 취했다. 이와는 달리 1880년 이후 자유당 정부는 이 문제를 되는대로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농업 부문 이익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전반적으로 농업은 될대로 되라는 식이 되었는데, 체면상 눈물을 뿌리면서 품위있게 자살하도록 내버려두는 격이었다. 그 당시 영국 상층 계급이 거의 농업적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은 산업과 무역으로 바뀌었다."

"19세기를 뒤돌아 볼 때, 영국을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게 하는데에 두드러진 역할을 한 것은 어떤 요소들이었을까? 폭력적인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대로였다. 즉 의회가 비교적 강력하고 독립적이었고 상공업 세력이 고유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심각한 농민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그 밖에 다른 요소들도 19세기에는 특수했다. 상층 지주계급은 산업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국면에서도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요소들을 자신의 대열에 흡수했으며, 동시에 대중의 지지를 놓고 새로운 세력과 경쟁하거나 최소한 때맞춰 양보하면서 심각한 패배를 피했다. 이런 타협정책은 어떤 억압적인 정치기구가 결여된 상황에서는 필연적이었다. 이것은 통치 계급의 경제적인 지위 붕괴가 서서히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하나의 경제적 기반으로 최소한의 어려움만을 겪으면서 전환할 수 있었기데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필요하기도 했고 또 가능했던 정책들이 현실에 옮겨진 이유는 영향력있는 지도자들이 충분히 또 정확히 때를 놓치지 않고 문제를 파악하고 처리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의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지주 젠트리와 귀족의 왕권으로부터의 독립,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상공업 계급의 성장, 이에 발맞춘 젠트리와 귀족의 상업적 농업 경영 방식의 채택, 그리고 농민 문제의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