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8일 화요일

극단의 시대 1장 총력전의 시대



1. 

...제1차 세계대전 대부분을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영국인과 프랑스인에게는 그 전쟁이 여전히 큰 '대전쟁'으로 기억된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징병연령 남성의 거의 20퍼센트를 잃었으며, 전쟁포로와 부상자, 그리고 영원히 불구가 되고 얼굴이 손상된 사람들-전쟁 잔산의 그리도 선명한 일부가 된 안면부상병-까지 포함한다면 상처없이 전쟁을 겪은 프랑스 군인은 3분의 1을 그리 넘지 않을 것이다. 500만명 내외의 영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승산도 거의 비슷했다. 영국인들은 특히 상층 계급에서 한 세대-50만명의 30세 이하 남성-를 잃었다. 문벌 좋은 남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장교가 될 운명이었던 상층 계급의 젊은이들은 자기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싸움터로 나갔고, 그 결과 맨 먼저 쓰러졌다.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에 대한 공포는 훨씬 더 어두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 자체가 당연히 전쟁과 정치 둘 다를 잔인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전쟁이 인명의 손실이나 여타의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채 행해질 수 있다면, 정치라고 해서 왜 그럴 수 없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복무한 대부분의 사람들-징집병이 압도적이었다-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확고한 전쟁혐오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감을 가지지 않은 채 이러한 종류의 전쟁을 겪었던 퇴역군인들은 때때로, 함께 목숨을 건 용기로 살았던 체험으로 인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수적 우월감-특히 여성 및 싸우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서-을 으꼈고 이러한 우월감이 전후 극우파의 초기 대열을 지배했다. 히틀러는, 일선의 군인이었던 것이 인격형성기의 체험이었던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반대의  반작용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가들에게는 1914-18년과 같은 피바다가 더이상 유권자들에 의해서 용인되지 않을 것임이 매우 명백한 사실로 보이게 되었다. 1918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전략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전략처럼 그러한 가정에 기초했다. 이는 단기적으로, 독일인들이 1940년에 서구에서 벌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와 영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데에 일조했다...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민주주의 정부들은 자국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적국 시민들의 생명은 마음대로 희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다루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왜 제1차 세계대전은 양쪽 진영의 주도적 열강 모두에 의해서 제로섬 게임으로, 즉 완전한 승리 아니면 완전한 패배만이 있을 수 있는 전쟁으로 수행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 전쟁이, 대체로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제한된 목표를 위해서 수행되었던 이전의 전쟁들과 달리 무제한적인 목표를 위해 수행되었다는 데에 있다. 제국의 시대에 정치와 경제가 융합되었다. 국제적 정치경쟁은 경제 성장 및 경제경쟁의 양상을 따랐는데 그것의 고유한 특징은 분명히, 한계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2. 

...제2차 세계대전은 양쪽 모두에게 종교전쟁 또는 근대적 용어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관련된 나라들 대부분에게 사활을 건 싸움이기도 했다...그러므로 전쟁은 무제한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계적으로 대량전을 총력전으로 확대했다. 

3. 

...1914년부터 줄곧, 전쟁은 여지없이 대량전이었다...수년동안 지속된 그러한 대중동원 수준은 현대적이고 생산성 높은 산업화된 경제와-또는 그러한 경제 대신에-주로 비전투원인구 부문에 맡겨진 경제가 없었더라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산업사회에서조차 그렇게 큰 인력동원은 노동력에 막대한 부담을 주며, 바로 그러한 사정이 현대의 대량전이, 조직된 노동자층의 힘을 강화한 동시에 가정 밖에서의 여성 고용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제1차 대전에서는 일시적으로, 2차대전에서는 영구적으로-이유이다. 

또한 20세기의 전쟁은 교전 중에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양의 생산물을 사용하고 파괴했다는 의미에서 대량전이었다...대량전은 대량생산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산은 조직과 관리 역시 요구했다. 비록 생산의 목표가 독일의 집단학살수용소에서처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생명을 합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일반적인 표현을 쓰자면, 총력전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알려진 것 중 최대의 사업-의식적으로 주직되고 관리되어야 하는-이었다. 

이는 또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정부들의 주된 문제는...어떻게 전쟁비용을 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전시경제의 지휘자로 보이게 된 것은 재무성이나 재무부였다...전쟁이 적어도 근대적인 규모로 수행되려면 전쟁비용을 계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시생산을-그리고 결국 경제 전체-을 관리하고 계획해야 했다...총력전은 의심의 여지없이 경영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양차 세계대전의 정부주도 전시계획경제들-총력전에서 이는 모든 전시경제를 의미했다-중에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전시경제가, 합리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행정의 전통과 이론을 갖춘 독일보다 훨씬 우월한 것으로 드러난 것은 기묘한 역설이다...(2차대전에서) 독일의 전시경제는 사실상 전 유럽을 이용해당으로 삼았으나, 서구의 교전국들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더 크게 파괴된 채 종전을 맞이했다. 그러나 더욱 가난해진 영국-1943년까지 민간인 소비량이 20퍼센트 이상 떨어졌다-은 평등과 공평한 희생과 사회적 정의를 좀 더 체계적으로 지향한 전시계획경제 덕분에, 대체로 주민들이 좀더 잘먹고 좀더 건강해진 상태로 종전을 맞이했다. 

...총력전은 명백히 기술을 진보시켰다. 왜냐하면 선진 교전국들 사이의 싸움은 군대의 싸움일 뿐 아니라, 군대에 효율적인 무기와 여타의 필수적 시설을 공굽하기 위해서 앞을 다투는 기술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나치 독일 역시 핵물리학의 성과를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없었다면, 원자폭탄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며, 20세기에 어떠한 종류의 핵에너지를 생산하더라도 들게되는 막대한 경비를 지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 경제에게는 전쟁들이 명백히 유익했다. 양차 세계대전 때의 미국의 성장률은 엄청나게 높았다. 특히 2차대전 때에는 1년에 약 10퍼센트의 비율로 성장했는데, 이는 전무후무하게 빠른 속도였다. 양차 대전에서 미국은 싸움터로부터 거리가 먼 동시에 동맹국들의 주된 군수공장이라는 사실로 득을 보았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생산을 조직적으로 확대해가는 경제역량으로도 득을 보았다. 아마도 양차 대전의 가장 지속적인 경제적 영향은 단기 20세기 전 시기 동안 미국 경제가 전 세계적인 우위를 누리게 한 데에 있을 것이다. 

4. 

...전쟁의 총력전적인 성격과, 양쪽 편 모두 비용에 상관없이 무제한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는 결의가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없이는 20세기의 더해가는 야수성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야수화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기묘한 민주화였다. 민간인들과 민간인들의 생활이 전략의 적절하고 때때로 주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에서처럼 민주주의적인 전쟁들에서도 적들이 몹시 가증스럽거나 적어도 경멸할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악마화되기었기 때문에, 총력전은 '인민의 전쟁'이 되었다. 양쪽 모두 전문직업인이나 전문가, 특히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된 전쟁은 상호 존중과 규칙의 인정 또는 심지어 기사도까지 배제하지 않는다...정치와 외교의 전문직업인들은 유권자들의 표나 신문들의 요구에 구애받지 않을 때, 싸우러 나오기 전에 악수를 하고 싸우고 난 뒤 함께 술을 마시는 권투선수처럼 상대편에 대해서 아무런 적의없이 선전포고하거나 강화를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세기의 총력전들은 비스마르크적 유형이나 18세기적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적 국민 감정이 동원되는 어떠한 전쟁도 귀족전쟁처럼 제한될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전쟁의 새로운 비인격성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일이 스위치를 누르거나 레버를 당시는 원격조작의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근면한 독일 관료들은 자신이 직접 관계한다는 느낌을 덜 가진 채, 폴란드행 집단학살수용소행 죽음의 열차들을 정규적으로 배차하는 시간표를 짤 수 있었다. 우리 세기의 최대의 잔인한 행위는 원격조작시스템 및 기계적 절차에 의한 비인격적인 잔인행위-특히 그런 잔인행위가 유감스럽지만 작전상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때-였다. 그렇게 세계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강제퇴거와 살안에 익숙해졌는데, 그런 현상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어서 그것을 지칭할 새로운 단어가 발명되어야 했다. '무국적자'나 '대량학살'이 그 예이다. 

...1차대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다. 1차대전이 낳았던 희망들, 즉 국제연맹이 이끄는 국민국가들의 평화적, 민주적 세계에 대한 희망, 1913년의 세계경제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환호한 사람들이 품었던) 피억압자의 봉기로 몇년 또는 몇달 내에 세계 자본주의를 뒤엎을 것이라는 희망조차 좌절되었다...2차대전은 실제도, 적어도 몇십년 동안은 해결책들을 낳았다. 파국의 시대 자본주의의 극적인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사라진 것 같았다. 서방의 세계경제는 황금시대에 돌입했다. 서방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질생활의 엄청난 개선에 힘입어 안정되었고 전쟁은 제3세계로 추방되었다. 이전의 식민 제국들은 사라졌더나 곧 무너질 운명이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집합체-이제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소련을 중심으로 조직된-가 경제성장 경주에서 서방과 겨룰 준비가 된 것으로 보였다. 

...1차대전 끝에 이렁난 혁명과 2차대전 끝에 일어난 혁명조차 서로 달랐다. 1차대전 뒤의 혁명들은...그 젅쟁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수록 무의미한 살육으로 보았던 것에 대한 혐오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 혁명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2차대전 뒤의 혁명들은 적들-독일과 일본, 보다 일반적으로는 제국주의-과의 세계적 투쟁-아무리 무서운 투쟁이라도 그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느낀-에 대한 대중적 참여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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