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혁명적 기원
1장 영국 그리고 폭력과 점진주의의 관계
농촌 지역의 자본주의에로의 전환에 영향을 미친 귀족의 추진력
"17세기 영국의 내란 기간에 폭발한 사회적 투쟁은 그보다도 몇 세기 전부터 시작됐던 복잡한 사회변동 과정 속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근대의 세속적인 사회는 중세의 봉건 제도와 가톨릭 교단의 왕성하고도 대단히 복잡한 과잉 성장을 통해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농촌과 도시에서 상업의 중요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봉건 제도가 와해되어가고,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절대군주제로 대치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몇가지 징후가 14세기 이래 계속 나타났다. 이러한 절대 군주제의 대체와 상업의 중요성 증대는 하나의 문화가 몰락하고 다른 새로운 문화가 대두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안과 고난의 반영이자 원인이기도 한, 점점 더 격화되는 종교적인 투쟁의 틀 속에서 전개되었다."
"왕의 평화 정책과 양모 교역은 서로 특별한 양식으로 결합되어 자본주의와 혁명으로 영국을 몰아간 중대한 동력의 하나를 형성했으며 그 혁명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다른나라들, 특히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강력한 통치자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그들의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통치자들의 성공이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사실이 의회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심대한 기여를 했다...영국적인 특수 상황의 핵심적인 열쇠는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도시나 농촌 지역의 상업 세력이, 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해도, 주로 왕실과의 대립 속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요먼은 농민 인클로저의 주요한 막후 세력이었다...요먼은 그들의 상황의 한계 안에서 전통적인 농업 관행을 깨뜨리고 이윤을 높이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데 너무나 열심이었다...구질서에 대한 투쟁에서 주요한 승자가 되어 농업 자본주의의 물결을 일으킨 사람들은 바로 요먼 출신이거나 좀 더 많이는 상층 지주 계급 출신이었다. 이러한 진보의 주요한 희생자들은 대개 일반 농민이었다."
"영국을 궁극적으로 근대의 세속적 사회로 이끌고 간 주된 담당 세력은 이 시대의 도시와 농촌의 상업 지향적인 사람들이 그 근본이 되었다. 프랑스에서와는 대단히 대조적으로 이들은 가부장적인 왕권의 지원이라는 우산도 쓰지 못한 채 그들 자신의 힘으로 밀고 나갔다...특히 내란이 가까와 올 무렵, 부유한 도시 상인들은 왕의 독점권에 반대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국왕이란 그들의 생산 활동에 방해자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그들 자신의 야망 성취에는 장벽이 된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튜어트 왕조의 1,2대 왕은 이러한 추세가 농민과 도시의 하층 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얼마간 노력했다. 유랑자 신세가 된 많은 농민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었는데, 간헐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어느 주의 깊은 역사가는 이 때의 정책을 일종의 발작적인 시혜 정책이라고 부르고 있다. 찰스 1세가 의회의 존재를 무시하고 스트라포드와 로드를 통해서 11년 간 전제 정치를 폈을 때, 시혜정책을 펴려는 노력은 더 적극적으로 추구된 것 같다.
...왕실재판소는 인클로저로 인해 농민이 농토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보호책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국왕의 이런 시혜 정책의 강화 노력에는 벌금에 의해서 왕실의 금고를 충실히 하는 의미 이상은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정책의 강화도 그 효력이 잘 미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군주와는 달리 영국 국왕은 자신의 의지를 잘 집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행정 및 사법 기구를 농촌 지역에까지 설치 할 수 없었다. 농촌 지역의 질서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젠트리로서 이들은 국왕의 농민 보호정책이 견제하려는 바로 그 당사자였다.
따라서 국왕이 추구한 이 정책의 주된 결과는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이 하고싶은-또 사회적으로 유익하다고 생각되는-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게 반기를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왕의 정책은 결국 도시와 농촌에서 여러가지 다른 유대로 묶여있던 상업 지향적인 분자들을 국왕에 반대하는 하나의 응집된 세력으로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스튜어트 왕조의 농업 정책은 분명히 실패했으며 '개인의 권리와 왕의 권위 간의 투쟁에서 최후의 수단으로서 종교적 구속력이 발동된 것에 다름 아닌' 내란을 촉진시키고 말았다."
2. 내란의 농업적 성격
"...상층 지주 계급 중에서, 그리고 그보다 수가 적지만 요먼(소규모 자본가, 차지농) 중에서 상업 지향적인 사람들은 구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왕과 왕당파에 대한 주된 대항세력이었으며, 이것이 내란(1642-1646, 1648-1652)이 일어나게 되었던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논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친 도시상업의 성장은 영국의 농촌지역에 농산물 시장을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농촌 지역 자체가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농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이 변혁에의 적응에 성공한 진취적인 안사들이 중심이 된 농촌 집단은 귀족과 요먼 사이에 산재한 광범한 계층, 말하자면 젠트리였다. 그러나 젠트리의 성공은 단지 농업적인 활동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던 젠트리는 도시의 상층 계급이나 또는 좁은 의미의 부르즈와지들과 온갖 개인적인 친분과 사업 상의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급으로서의 젠트리로부터 영국 농촌 사회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변형시킨 역사의 결정적인 흐름을 대표하는 주세력이 나왔던 것이다."
"상업과 또한 얼마간의 공업으로 충격을 받은 영국 사회는 위로부터 아래로 균열이 다수 나타났으며, 그러한 충격으로 불만이 누적된 급진층이 대두하여 일시적으로 작열하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뒤에 적당한 데서 살펴보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련의 발전 단계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과 같은 주요한 근대 혁명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장기긴의 경제적 추세의 결과 밀려나고 있던 계층이 사회 표면에 부상하게 되는데, 바로 이 계층이 구체제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악역'을 주로 떠맏게 되며, 그 결과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위한 길을 깨끗하게 닦아 놓게 된다.
영국의 경우 이러한 비열한 행위의 대표적인 것은 찰스 1세를 처형한 상징성 깊은 사건이었다. 국왕을 재판하라고 부르짖는데 앞장섰던 세력은 군대였다. 여기에는 일반 대중의 영향력도 상당히 강하게 작용했다. 군인들은 젠트리 아래의 계층, 즉 도시의 저니맨이나 농민 출신이 무척 많았다."
"근대화론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을 하나의 같은 사회 계층으로 묶어주는 많은 끈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하층계급 즉 '미천한 부류'에 대한 공통된 공포감이었다. 바로 이러한 유대관계가 영국의 혁명 기간 동안 계급의 제휴 관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반란 지도자의 정책은 명확했으며, 또한 직선적이었다. 그들은 국왕이나 하층 계급의 급진주의자들이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침해하는데 반대했다."
"청교도 혁명의 혁명적인 결과는 법과 사회적 관계의 영역에서 심대하고 지속적이었다. 고등재판소의 폐지로, 농민은 인클로저의 진행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중요한 방어책을 잃어버리고 만다. 몇 가지 인클로저 시행저지 조처가 크롬웰 치하, 특히 주요 장군들의 통치 후반부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런 성격의 노력으로서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비록 혁명을 지지했던 젠트리의 사회적 성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문이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승자가 누구인가는 분명했다. 비록 전반적인 영향력이 한동안 실감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왕정복고와 함께 인클로저는 승자 앞에 모든 것을 갖다 주었다.' 국왕의 권력을 무너뜨림으로서 내란은 인클로저를 추진하는 영주들에게 부과되어왔던 중요한 제약을 완전히 제거시켰으며, 이와 동시에 영국이 일종의 '지주위원회'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 지주위원회란 18세기 의회에 대한 가식 없는 정확한 표현이다.
영국의 내란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그 투쟁이 부르조아의 정치 권력 장악으로 귀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점에서 정확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의 상층 계급은 정치기구에서 지배권을 계속 확고하게 장악했으며...18세기 동안만이 아니라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논의는 한낱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영향은 내란 이전부터 많은 농촌 지역에 침투하였고, 농촌을 변형시켰다. 인클로저를 추진했던 지주와 부르주와지 사이의 연관은 대단히 밀접하고도 두터웠기 때문에 그 당시의 복잡한 가계에서 어디까지가 지주의 끝이고 어디서부터가 부르주아지의 시작인지 구분하기가 종종 어렵다. 이 투쟁에서 의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동맹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현대 어느 역사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귀족 체제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데, 즉 출생이 아니라 돈이 그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의회 자체는 토지 자본자들의 도구가 되었으며, 국가는 휘그당이든 토리당이든간에 이들 지주 자본가들과 그 연합 세력을 위한 이익의 추구에 확고하게 전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기치로 내건 원칙은,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유 재산이 무제한적으로 사용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그 사회 전체의 부와 복지가 꾸준히 증대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마침내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걸쳐 도시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내란 이상의 폭력과 고통을 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향한 원래의 추진력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 시기에 도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 못지 않게 농촌에서도 강하게 불붙어서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끊임없는 바람을 받아 구질서를 불태워버리는 불길을 농촌 곳곳에 타오르게 했다.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은, 그 원칙들이 밀어내고 나아간 내란 기간 상당한 정도로 극복한 낡은 원칙들과는 전혀 대조적인 적이었으니, 그 낡은 원칙이란 신성시되어온 권위 체제와 경제영역에서 신성시된,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효용을 위한 생산의 우위였다. 17세기에 이와 같은 원칙들이 승리를 얻지 못했다면, 실제로 영국 사회가 평화적이었던 그 정도까지-18세기와 19세기의 그 사회가 어떻게 평화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었을까를-상상하기는 어려웠다."
3. 인클로저와 농민층의 파괴
"18세기의 대지주들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은 부분적으로는 내란이 있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경향의 결과인데, 그 경향이란 주로 지방 명사들의 권위가 워낙 강하다는 것과 게다가 튜더 왕조나 스튜어트 왕조와 같은 절대 왕조 하에서도 이 권위를 제한할만한 강력한 관료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688년경부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 태토지 소유자들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개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한다. 국가의 중요한 요지마다 그들의 토지는 뻗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하층 젠트리를 희생시키기도 했고 특히 일반 농민을 희생시켰는데 이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인클로저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현상이라든지, 대지주가 농민의 공동지를 잠식했기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공동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시대는 농경 기술 면에서 진보의 시대였다. 즉 비료의 사용과 새로운 작물의 발견과 윤작이 이 기간에 확대된다. 새로운 경작방법은 공동 경작의 원칙으로 지배되는 경지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었고, 게다가 새로운 경작방법에 소요되는 비용은 소농이나 중농의 재산 정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작 단위가 클수록 비용이 적게 들고 수익이 높아진다는 것이 확실히 이 당시 농가 규모를 크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취해진 농업 발전의 세가지 중요한 방안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으니, 즉 그것은 보유지의 통합, 인클로저, 그리고 종신계약 차지를 연한부로 계약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상당 뿐에 걸쳐서 대농장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그것이 갈수록 상업적 원칙으로 경영됨에 따라 중세의 농민 공동체는 결국 붕괴되었다. 절대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8세가와 19세기 초기 의회의 인클로저 물결은 한동안 계속된 농민 토지의 침식을 법적으로 뒷받침한데 불과한 것 같다. 다른 나라들의 예에서도 보듯이 농민 공동체에 상업이 침투하면 일반적으로 소수의 수중에 토지가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영국에서 이런 경향은 늦어도 16세기면 눈에 띈다."
"산업의 성장과 함께 인클로저의 물결은 대지주들의 세력을 크게 강화시켰으며 반면에 농민들의 기반을 무너뜨려 그들 농민을 영국 정치 생활로부터 완전히 제외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되는 쟁점에 비추어 결국에는 이 것이 결정적인 점이다. 나아가서 '잉여' 농민들의 경우, 이들에 대한 도시나 공장의 흡인력이, 높은 농촌 세계의 축출력보다 중요한 작용을 했는지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든간에 그는 촌락 공동체의 전통적인 생활과 비교해볼 때 필경 전락과 고통을 의미하는 2가지 대안(임금 노동자화 또는 빈민구호대상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가 초래한 폭력이나 강제가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졌으며 또 그것이 주로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행해졌고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확고한 발판 위에 올려놓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그 것이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에 자행한 거대한 폭력이었다는 사실까지 은폐해서는 안될 것이다."
4.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귀족의 통치
"폭력적인 과거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왕을 희생시킨 대가로 의회가 강화된 것이었다. 의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사회 구성 요소들의 요구가 상승함에 따라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활동 장소가 되는, 그리고 이런 집단들 사이의 이해 다툼을 평화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구가 되는 융통성있는 제도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의회는 내란 시기에 상업 지향의 상층 지주계급의 도구로서 출범했지만, 의회는 단순히 그 도구만은 아니었고, 그 후의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상층 지주계급, 즉 젠트리와 작위 귀족들이 강한 상업적인 색채를 띠었다는 것은 또한 산업 발전 자체에 귀족들의 강한 반대가 없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상층 계급 중에서 반감을 표현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상층 지주계급의 가장 강력한 부분이 상업 및 산업 자본주의의 정치적 전위로서 행동하였다는 말은 정당하다."
"폭력적인 과거의 또다른 중요한 결과는 농민계층의 붕괴였다. 비록 무자비하고 몰인정하게 들리겠지만, 농민층의 붕괴가 평화로운 민주적 변화에 미친 기여는 의회의 강화만큼이나 중요했다고 주장하는데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에서의 근대화가 거대한 보수적, 반동적 세력을 온존시키지 않은 채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인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과 일본도 어느 정도 이 세력을 온존시킨 채 근대화를 해야 했다. 또한 이 사실은 러시아와 중국 방식의 농민혁명의 가능성이 역사의 일반적인 보편성과 다른 것임을 뜻한다."
"지주 계급의 결속된 정치적, 경제적 힘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절정에 달했다. 따라서 이들 지주 계급은 힘의 잠식이 매우 느리게 일어난 반면, 경제적인 기반이 계속 확고했기 때문에 자기 방어와 양보가 훨씬 쉬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는 흔히 쓰는 기계적 대조는 피해야 한다. 즉 도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성장했다 할지라도, 상층 지주계급은 전혀, 그것도 짧은 기간동안 몰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가 되면 도시의 보다 근대적인 자본가들은 그들의 경제적인 성취 기반을 통해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해놓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의 역사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할 수가 있었던 보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주 계급의 지도하에서 그들 근대적 자본가들을 위한 길이 순조롭게 닦인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자본가들은 프러시아의 융커와 같은 존재에 의지해 국가 통일을 이룩한다든가 국내의 관세장벽을 무너드린다든다 단일한 법 체계와 근대적인 화폐체제를 확립한다든가 그 밖의 산업화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충족할 필요가 없었다. 영국에서는 정치 체제가 합리화되어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근대 국가가 이룩되어 있었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그 국가로부터 근소한 도움만 받고서도 최초의 성숙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로서 전 세계의 넓은 지역을 그들의 교역 무대로 할 수 있었다...그들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란의 결과라든가 군주제 이전에 겪었던 경험, 또 영국이 육군보다도 해군에 의존하고 있었던 점으로 인해 영국 국가의 성격이 비교적 덜 억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러시아와 같은 육군과 관료에 의존하는 강력한 군주제가 없었던 사실이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 발전을 손 쉽게 했다."
"19세기 전반기와 그 훨씬 뒤까지도 영국의 상황은 당대의 독일의 상황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독일에서는 세력이 훨씬 약한 부르주아지가 일반 대중의 불만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근대화에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토지 귀족에 의지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지주들이 어느 정도는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까지 해야 했다. 1840년 이후 지주 계급은 공장법을 지지하는 것이 곡물법에 대한 제조업자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편리한 방법이란 것을 알게되었다...그러므로 19세기 영국의 토지 귀족 중에서 민주주의의 전개에 완고하게 반대한 사람들은 드물었고 소수파였다...영국의 상층 지주 계급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반적 발전에 동참했고 부르주아지와 자본가다운 면모를 확득해왔기 때문에, 유럽 대륙의 상층 지주계급에 비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의 발전에 반대할 이유가 훨씬 적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끝나고 증기선이 발달함에 따라 미국의 농작물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농업 불황이 이 시기에 초래되었는데, 상층 지주계급의 경제적인 기반을 심각하게 잠식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으며, 따라서 영국을 독일과 비교해보는 것이 다시 도움이 된다. 융커들은 자기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온존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할 수 있었으며, 독일의 다른 지역의 토지 소유 농민들과 농업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어떤 점에서도 독일에서는 곡물법 폐지에 비견될만한 경험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산업의 선도부문은 철과 보리의 결혼을 성사시켰으며(1892년 관세에서 이 결합은 극치에 달했다) 이런 타협의 결과 얻게 된 것이 해군 증강 계획이었다. 융커, 농민, 기업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제국주의와 반동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데 결속한 것이 독일 민주주의에 파국적 결과를 가져왔다.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이와 같은 결합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그보다 훨씬 오랜 역 사가 있었다.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성숙한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한 전혀 새로운 사회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대안, 오히려 자유무역 정책의 부속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농업 문제에서 1874-1879년간 보수당 정부는 단지 소극적인 미봉책만을 취했다. 이와는 달리 1880년 이후 자유당 정부는 이 문제를 되는대로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농업 부문 이익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전반적으로 농업은 될대로 되라는 식이 되었는데, 체면상 눈물을 뿌리면서 품위있게 자살하도록 내버려두는 격이었다. 그 당시 영국 상층 계급이 거의 농업적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은 산업과 무역으로 바뀌었다."
"19세기를 뒤돌아 볼 때, 영국을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게 하는데에 두드러진 역할을 한 것은 어떤 요소들이었을까? 폭력적인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대로였다. 즉 의회가 비교적 강력하고 독립적이었고 상공업 세력이 고유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심각한 농민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그 밖에 다른 요소들도 19세기에는 특수했다. 상층 지주계급은 산업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국면에서도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요소들을 자신의 대열에 흡수했으며, 동시에 대중의 지지를 놓고 새로운 세력과 경쟁하거나 최소한 때맞춰 양보하면서 심각한 패배를 피했다. 이런 타협정책은 어떤 억압적인 정치기구가 결여된 상황에서는 필연적이었다. 이것은 통치 계급의 경제적인 지위 붕괴가 서서히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하나의 경제적 기반으로 최소한의 어려움만을 겪으면서 전환할 수 있었기데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필요하기도 했고 또 가능했던 정책들이 현실에 옮겨진 이유는 영향력있는 지도자들이 충분히 또 정확히 때를 놓치지 않고 문제를 파악하고 처리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의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지주 젠트리와 귀족의 왕권으로부터의 독립,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상공업 계급의 성장, 이에 발맞춘 젠트리와 귀족의 상업적 농업 경영 방식의 채택, 그리고 농민 문제의 소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