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아시아의 파시즘: 일본
1.위로부터의 혁명:보수파와 개혁파의 위협에 대한 지배 계급의 대응
초기 일본 봉건제에는 서구에서 자유 사회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던 국면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주와 봉신을 연결하는 봉건적 유대, 즉 계약적인 요소가 일본에서는 매우 약했으며, 반대로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과 의무라는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루이 14세가 그의 신하들을 베르사이유에 살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쇼군도 다이묘들에게 일정 기간 수도인 에도에 살도록 요구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 효과 또한 어느정도 비슷했다. 각종 사치 취미의 과시를 장려함으로써 쇼군은 귀족들의 위치를 약화시켰고 동시에 도시 상인계급을 자극했다...봉건귀족들이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어쓰는 일은 흔했으며, 반면에 상인들은 정치적인 보호를 다이묘에 의존했다.
사무라이의 경제 사정이 실제로 어떠했던 간에 일본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는 의심할 바 없이 쇠퇴하고 있었다. 쌀로 받는 봉급이 전사로서의 생활을 위한 유일한 물질적 기반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강제된 평화 아래서 무사들이 해야할 두드러지게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상인들의 부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권위가 나타나 무사적인 미덕과 우열을 겨루기 시작했다.
많은 무사들은 영주와의 유대를 끊고 주인없이 떠돌아 다니는 낭인이 되어 때로는 폭력의 사용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들은 곧 도쿠가와 시대 후반기에 사회적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도쿠가와 치하의 평화가 무사 계급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생기게 된 이 잠재적 폭발력은, 외세의 위협과 지도층의 정치적 수완이 없었더라면 일본 사회를 곳곳에서 파열시켜 다시 한번 봉건적 무정부 상태로 몰아갈 뻔 했다.
(한편) 상인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로 인해 그들은 사회의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상인들은 봉건주의적 도덕률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사고 방식에 대항할 수 있는 지성적인 저항논리를 발전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1860년대 초반의 농민 문제는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주권 국가로서의 일본의 독립 뿐만 아니라 바로 일본 사회의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왕정 복고는) 중앙의 권위와 여러 영지 사이의 낡은 봉건적 투쟁이었다. 그리고 초슈 뿐 아니라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일본의 프러시아"인 사쓰마, 즉 막부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던 영지들은 전통적인 농경 사회와 봉건적 충성심이 비교적 강력한 곳이었다.
(왕정복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평화적 질서의 확립으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봉건적 조직이 부분적으로 붕괴한데 있다 할 것이다. 이 같은 붕괴는 외세의 침략과 함께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으며, 왕정복고는 그 해결로 향하는 하나의 중요한 걸음이었다. 이 해결책이 지니는 정치적인 반동적 면모는 천황의 친정 운동이 끌어들인 여러 집단으로 대부분 설명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도쿄에 있던 귀족의 일부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 조직이 특히 강력했던 영지(초슈, 사쓰마, 도사 등)의 몇몇 불만에 찬 지도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주인에게는 불만이 많았지만, 봉건사회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던 사무라이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인 계층 중에서도 보수적이고 역사가 깊은 상인들은 이 투쟁 자체에서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 미쓰이 재벌의 경우에는 어느 경우에도 다 이익이 되었다. 다만 농민들 사이에서는 봉건 조직에 반대하는 경향을 찾을 수 있다. 이론상으로 볼 때 왕정복고는 주로 유교적인 전통적 상징의 기치 하에 일어난 것이었다...전통적인 질서는 직접적인 지적 도전을, 특히 상업적 이해 관계에서 생겨난 도전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사회의 분열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농업적 지배 계급의 일부가 도쿠가와 체제에서 이탈해 위로부터의 혁명을 강행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서는 외세의 위협이 결정적인 것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정부는 일치단결된 힘으로 소수 엘리트의 특권을 보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나갔다.
구 제도하에서 몰락 상태에 있던 사무라이 계층이 대거 참여한 새로운 지배자들은 1868년 이래로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중앙집권적인 근대 국가의 건설이었고, 다른 또 하나의 문제는 근대적인 공업 경제의 건설이었다. 이 두 가지는 일본이 독립 국가로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근대 사회가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효과적인 중앙 정부의 창설을 위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조치가 1869년 3월에 취해졌다. 이때 서부 지방의 대영지인 쵸슈, 사쓰마, 히젠, 토사 등이 "신성불가침의 보편적인 권위와 단일한 중앙 정부가 있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면서 영지를 자진해서 천황에게 바쳤다...훨씬 중요한 사실은 다이묘들이 영지를 헌납하기에 앞서 광범위한 협상을 통해 그들 수입의 반을 그대로 차지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낸 일이었다...2년 뒤인 1871년 새 정부는 모든 봉건 영지를 중앙 정부 통치 하의 지방 행정 단위로 분할한다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최종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정부는 정치적인 지위를 확립해가면서 동시에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게 되는데 그 효과는 훗날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났다. 이런 조치들의 일반적인 목적은 사람과 물건의 자유로운 왕래를 봉쇄했던 종래의 봉건적인 장애를 철거시켜 자본주의적 노선으로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1896년 정부는 모든 사회 계급에 대해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언했고 교역과 통신의 지방적 장벽을 철폐했고, 작물 재배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개인의 토지 취득권을 인정했다. 토지는 도쿠가와 치하에서 봉건적 사슬을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이제서야 다른 물품과 마찬가지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의 성격을 얻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대중적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평화적으로 수행키 위해서는 적어도 구 체제의 핵심멤버들에게 만만치 않은 보상을 치러줘야 했다. 1869년 정부는 다이묘들이 영지를 헌납했을 때 그들 수입의 절반을 하사했다...1876년 정부는 다이묘들의 수입과 사무라이의 봉급을 강제로 삭감해야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중요한 다이묘들은 상당히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으나 소영주들과 대다수 사무라이는 가혹한 삭감을 감수해야 했다. 요컨대 메이지 정권은 소수의 주요 지지자들에게는 푸짐한 대접을 해주었으며, 반대로 과거의 질서를 무너뜨린 힘의 중요한 근원인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873년 징병 제도가 실시됨으로써 사무라이에게 남아있던 모든 권한이 사실상 완전히 없어졌다..새로운 정책의 요지가 분명해지자 봉건 세력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새 정부를 공격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된다. 1877년에 있는 사쓰마 반란 사건은 과거 봉건적 질서의 피비린내 나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사쓰마 반란을 진압하고 난 메이지 정권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메이지의 이 같은 성공에 이바지한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새 집권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회를 슬기롭게 이용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다이묘에게 커다란 물질적인 양보를 했고, 나중에는 사무라이를 제거하는 위협을 무릅쓰기도 했다. 무사들의 급료 삭감에 관해서는 그 당시 그들의 자원으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또한 섣불리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역사적 인과관계라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볼 때 도쿠가와 정권은 이미 정책적 차원에서 무사 계급의 권세를 무너뜨렸고 압도적인 혁명세력의 탄생을 막으면서 중앙집권적 국가로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이처럼 메이지 정권은 앞 시대의 추세의 계속이었으며, 앞으로 지적하겠지만, 많은 도쿠가와 시대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마지막으로 천황 제도는, 많은 일본 역사가들이 강조해온 것처럼,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의 집결지를 마련해놓았으며 합법적인 계승의 테두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 테두리 안에서 숱한 필요한 조정작업이 이뤄졌다.
그런 비약을 가능하게 했던 관료제적 요소가 일본식의 특수한 봉건제에는 상당히 가미되어 있었다. 자유롭게 선택된 계약관계가 아니라 신분과 충성심을 특히 강조한 일본적 봉건 유대관계의 특징은 곧 서구 자유주의 제도에 따르는 활력 중 중요한 한가지가 결여됐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일본 정치 체제의 관료주의적 요소는 전통적 질서에 도전할 줄 모르는 유순하고 수줍은 상인 계급을 그 특징적인 산물로 길러냈다. 지식인의 심각한 도전이 없었던 원인은 일본 역사의 보다 깊은 곳에 있겠지만 이 것 역시 역시 위와 같은 현상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지적이고 사회적인 도전은미미했다. 끝으로,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산업사회로의 이전 과정 전반을 통해 일본 지배층은 농민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통제하고 무마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농민 혁명도 없었다.
2. 농민혁명의 부재
일본이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농민 혁명이 없었던 까닭은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도쿠가와 막부의 세제는 농민들로 하여금 일정한 액수만 내면 그들이 정력적으로 생산한 추가 소득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세금을 요구치 않았다. 이 제도는 생산을 증대 시키는데 도움이 되어 농가 생산은 도쿠가와 시대 후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메이지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둘째,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농민사회는 처음에는 농민과 영주와의 관계가, 나중에는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가 긴말하게 결합된 사회였다. 동시에 역시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농민 사회는 현실적 및 잠재적 불평분자들을 기존 질서 속에 흡수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통제 제도를 구비하고 있었다. 이 것은 재산제도, 토지 보유권 및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지배적이었던 상속 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특수한 분업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셋째로, 구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억압적인 기구들과 아울러 근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기구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제반 제도는 상업적 농업에도 적용될 수 잇었다. 이런 변화의 핵심적 요소는 농민의 대거 진출로 형성된 새로운 지주 계급의 대두였다. 이들은 농민들로부터 쌀을 짜내어 시장에 팔기 위해 국가와 농촌의 전통적인 여러 기구를 이용했다. 봉건적 관계로부터 소작 관계로의 전환은 또한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농민들에게 다소 유리한 것이었다. 요컨대 파시즘을 대가로 해 지난날의 전통적 질서를 물려받아 농민 경제를 산업 사회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메이지의 정책은 농민을 자본 축적의 근원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상업적 영향이 침투할 수 있도록 농업 경제의 문호를 더 넓게 개방해야 했으며, 그 결과 생기는 긴장을 해소키 위해 농민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독립세력으로 규합시켜야 했다. 봉건제를 위에서부터 해체시키는 것은 그 것 자체가 목적이거나 정책이었다기 보다 다른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어째서 혁명적인 봉기 없이 이런 과정이 수행되었는가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보다 분명히, 또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전체적인 변화를 가능케 한 핵심적인 요인은 농업 생산성의 계속적인 증가였다...그러나 한가지 지적할 것은 프랑스 대혁명 절정기 때의 생활과는 달리 일본의 경우는 농민의 급진주의를 위해 평민들이 동맹해야 할 만큼 도시민이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보다 온건한 농민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손잡을 수 있는 강력한 시민 계급의 반봉건 정신이 도시에는 별로 없었다. 시장 제도의 도입으로 가난한 농민 계급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소작인의 규모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전보다 많은 땅을 스스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안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흥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지주 계급의 이해관계는...매우 분명한 것이었다. 이 계급은 대체로 도쿠가와 후기에 득세하기 시작한 부유한 농민층에서 나왔으며, 어떤 학자들의 견해로는 왕정복고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농민 엘리트의 일부는 지주가 되어 와해됨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전해졌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상업적 이득을 획득했기 때문에 구질서의 중대한 변화에 반대하지 않았다...가난한 농민들과 소작인들이 메이지 시대에 급진적인 요구를 제시했을 때 이들 부유층은 즉각 이들에 반대했다. 이처럼 일본의 농촌사회는 이런 역사적인 전환기에 심각한 반자본주의 봉기를 억제할 수 있었고, 새로운 사회 경향에 반대하는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벽을 가졌었다.
이 단계에서 극렬한 반자본주의 세력을 막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극렬한 반봉건적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방책을 가졌던 것이 일본이었다. 상호 감시를 위한 5인조 조직과 촌장을 통해 봉건적 영향이 일본 농촌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여기서 중요성을 띄게 된다. 반봉건적 세력에 대한 이와 같은 제동은 분노를 위험 지경까지 몰아갈 수도 있었으니, 봉건적 세력이 상업세력과 손을 잡고 농민을 최악의 상태로 억압했던 제휴가 몇몇 지방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근왕 운동의 중심지였던 초슈는 이런 제휴가 없었다. (초슈는 농민가 지도층 간의 봉건적 유대가 살아있었고, 이를 토대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기병대가 꾸려졌다-나의 주)
아직 상당한 활력을 갖고 있던 봉건주의와 이에 도전하는 상업 세력 사이의 갈등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사무라이들이 때때로 농민 봉기의 선봉에 설 때 물론 이들은 위험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권은 징집된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용해 반봉건적 감정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 것의 대표적인 예는 새로운 정부에 대해 가장 큰 위협이었던 사쓰마 반란의 진압에서 찾을 수 있다. 때때로 사태는 위급하기도 했으나, 메이지 정부는 적과 그 동맹 세력 사이에서 분열을 이용해 난국을 극복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많은 농민들이 외세의 위협을 심각한 것으로 의식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그 것은 분명히 중요한 작용을 했고 따라서 보수적인 세력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일본 사회의 혁명 세력은 그들 사진의 힘으로 근대화의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들이 강력한 국가 건설을 통해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지도자들을 위한 제한된 발판을 제공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3. 메이지 유신: 새로운 지주와 자본주의
1880년에 이르면 국립은행 주식의 약 44%는 주로 과거의 다이묘들과 황실의 공경들로 이뤄진 새로운 귀족의 소유가 되었다...19세기 후반 천황의 주위에는 봉건적 특권을 대가로 하여 자본가로 변신한 과거의 영주들과 소수의 옛 상인 가족 및 군부에서 올라온 신흥 귀족들로 구성된 집단이 있었다. 한편 수많은 신흥 상층지주 계급이 지방에서 형성되었으며...의미깊게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일본 사회의 "중산층"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근대 지주 계급은 도쿠가와 시대의 농업 경제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의 결과로서 대체로 농민층에서 출현한 것 같다. 도쿠가와 정권은 지배 계급의 많은 부분을 토지와의 직접적인 유대관계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이런 분리는 모든 산업화된 국가에서 빠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어도 여하튼 일어나게 되는데-이미 근대 세계를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일본은, 영국과는 달리, 농민을 도시에서 몰아냄으로써 거대한 토지 자본을 형성하는 식의 광범위한 농민 착취 과정을 겪지 않았다. 상업화의 물결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적 사회 조건에서는, 그 대신, 지주(서구의 기준에서 보면 대체로 소규모이다), 소작인 및 자작농의 체제를 형성하는 과거의 추세가 강화되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1차 대전 종식까지의 일본의 농업은 근대적 산업 사회의 요구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고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영국의 지주는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내쫓고 소수의 소작인들을 두기 이해 국가를 이용했다. 반대로 일본의 지주는 그들을 토지에서 몰아낸 것이 아니라, 그 대신 그들로부터 잉여를 수탈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서 예부터 내려오던 비공식적 수단은 물론 국가를 이용했다. ...일본에서는 근대 세계가 도래하면서 농업 생산이 증가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주로 자본주의적 기구와 봉건적인 기구의 복합 형태를 이용해서 농민들로부터 쌀을 약탈한 소토지 소유계급의 출현을 통해 이뤄졌다.
메이지 초기에 경제적 발전에 대한 주요 자극은 새로운 농촌 귀족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로부터 왔고, 또 도쿠가와 치하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유능하고 정력적인 몇몇 사무라이로부터 왔다. 기업은 종속적인 위치를 계속 면하지 못했다. 기업은 경제적으로 정부에 의존했는데, 정부는 외세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장차 외국을 정복할 의도를 가지고) 충분한 근대적 토대를 이룩하고, 아울러 꿈틀대던 농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업을 장려했다. 이와 같이 근대의 시발점에서부터 농업적인 이해와 상업적인 이해가 결합해 국내에서 민중을 안정시키는 한편 국외에서 군사적인 영광을 추구하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는 주로 농민 겸 직공 체제로 움직이던 소규모 공장 제도가 거의 전일본 방방곡곡의 가가호호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몇몇 대기업체에 의해 압도되었던 시기로 특정지을 수 있다. 재벌들은 공황 직전인 1929년에 번영의 절정을 누렸다. 자금 대여, 기술 혁명, 시장에 대한 영향력 등을 통해 재벌들은 이런 영향을 심지어 하찮은 농산품 및 소기업에까지 보편적으로 침투시켰다.
근본적으로 메이지의 토지 정리와 근대화 계획은 농업적 이해와 상업적 이해를 결합시켰다. 이와 같은 결합이 가능했던 것은 국내적으로는 민중 운동이 성공하면 그들(지주와 상업 계급)이 정치적, 경제적 권익이 공동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고, 국외적으로는 인도와 중국의 운명의 재판이나, 외국의 국토 분할에 대한 위협과 시장 및 군사적 승리의 영광의 유혹 때문이었다. 기업이 더욱 강력해짐에 따라 일본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이 손발이 잘 맞아들어간 결과는 더욱 눈에 띄고 더욱 위험한 것이 되었다.
왜 기업인과 농업가는 국내에서의 억압과 해외로의 확장 계획에서만 의견 일치를 보았을까. 이런 물음은 당연하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다른 무엇이 어쩌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은 정치적인 자살을 모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있긴 있었다고 믿는다.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은 상층 계급의 관점에서는 위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장에서 그들의 권위가 근거라는 거점이며, 또 폭리를 얻는 주요 수단의 하나인 착취적 온정주의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주들이 당하게 될 결과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진정한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는 번영하는 농민들이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지주의 모든 지위가 몰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정치적 귀결:일본 파시즘의 성격
메이지 왕정 복고 이후의 근대 일본의 정치사를 우리들은 편의상 세구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농업적 자유주의의 실패를 특징으로 하는 제 1기는 정식 헌법의 채택과 1889년 의회 민주주의의 몇몇 외부적인 특색이 나타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제 2기는 이런 제도가 강요한 장벽을 돌파하려던 민주 세력의 실패로써 끝나는데 이는 1930년대 초 대공황의 내습때까지는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결과이다. 1930년대의 실패는 전시 경제와 일본판 우익 전제주의 정권을 특징으로 하는 제 3기의 단초가 된다.
"자유주의" 운동은 메이지 왕정복고의 결과에 실망한 사무라이의 봉건적, 국수주의적 반동에서 일어났다...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유와 민권"을 부르직기 위해 모여 자유당을 결성한 집단은 메이지 시대의 귀족적, 금융적 과두체제의 지배에 반대한 소지주들의 저항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그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1870년대의 많은 지주들이 양조장이나 된장 공장 등의 주인을 겸한 소규모의 상업 자본가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메이지 지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문제는 농촌의 상층 계급을 새로운 실저에 어떻게 화해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해운업, 군수산업, 중공업의 육성을 열망했는데, 이는 토지세를 중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1881년 자유당 창당 대회는 해군 경비의 증액이라는 명목으로 부과된 세금들에 반대했다. 왕정복고의 혜택은 주로 다른 자들, 특히 정치 참여자들에게 돌아갔다고 느낀 이 농촌 상층 계급은 자신의 지지 세력 토대를 넓히려고, 심이저 농민층에게까지 침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주들이 그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극단적인 농민의 요구에 부딪치게 되자, 곧이어 자유당은 분열되고 붕괴했다.
메이지 정부의 주요 전술(자유주의와 농촌 상층 계급에 대항하는)은...첫째, 단도직입적으로 경찰에 의한 탄압과 둘째, 지배적인 집단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만의 근원을 개선하는 경제 정책과, 마지막으로 야당 지도자에게 메이지 관료제의 자리를 줌으로써 반대 세력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방식 등을 합친 것이었다.
농민의 미덕, 특히 농촌 상층계급을 뒷받침하는 그러한 미덕을 애국적인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상업의 침투로 고통당하는 농촌 사회의 한가지 특징이다. 일본에서 농촌 문제는 산업주의 시대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반동적 애국주의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농본주의는 보다 커다란 움직임의 한가지 측면에 불과했다. 그것의 선례는 도쿠가와 시대의 주요 사상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그 것은 또 청년 장교의 열광, 다시 말해서 1930년대의 전체주의적 정권을 등장시키게 했던 암살사건과 쿠데타 시도에 역사적으로 계승되었다.
1차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의 힘의 균형은 농촌 엘리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일본의 공업 발전을 촉진시켰고, 일본의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기업의 영향은 1920년대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야마가타는 1922년에 죽었다. 그 후 몇년 동안은 권력이 군국주의자의 손에서 상인계급과 의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1922년 워싱턴에서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된 후 상업적 이익을 대변하는 몇몇 신문들이 "정치에서 군부를 몰아내라"고까지 부르짖었다는 사실은 이런 정치 풍토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그러나 불경기가 내습함으로써 이런 희망은 끝장이 났다...1930년대초에 일러 그런대로 그때가지 유지되고 있었던 일본의 의회 민주주의는 대공황의 마지막 일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1930년대의) 쿠데타 사건은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대중에 의한 우파운동인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곧 "위로부터의 파시즘", 즉 지체높은 파시즘에 반자본주의적, 대중적 우파가 희생된 것으로써 정부고관들이 그들에게 유용한 국면만을 취하고 대중적인 요소를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지체 높은 파시즘은 이제 재빨리 번성해갔다. 국민 동원령이 내려졌고, 급진주의자들은 검거되었으며 정당들은 해산되어 서양의 전체주의적 정당을 어설프게 모방한 대정익찬회에 의해 대치되었다. 곧 이어서 일본은 반코민테른 3국동맹에 가담했으며 모든 노동조합을 해체시키고 그 대신 산업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단체(대일본산업보국회)를 들어앉혔다. 이와 같이 일본은 1940년말까지 유럽식 파시즘의 외형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일본의 대기업은 이윤을 애국심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군부가 권력을 잡은 파시즘의 시대는 그 시대 전체를 통해 기업에게 특혜를 베풀게 되었다. 공업 생산은 1930년의 60억엔에서 1941년에는 300억엔으로 늘어났다. 경공업과 중공업의 상대적인 지위는 뒤바뀌었다. 1930년 중공업은 전 공업생산의 38%밖에 점하지 못했으나, 1941년에는 73%에 달했다. 재벌들은 정부의 통제에 명목상으로 복종함으로써 전체 공업 분야를 거의 완전히 석권할 수 있었다. 미쓰이, 미쯔비시, 스미모토, 야스다와 같은 4대 재벌의 총 재산은...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30억엔이 넘었다. 재벌들에게 반자본주의는 실제로 좀 귀찮은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서 1936년경 이후 그들은 대체로 통제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국내적 억압과 해외로의 팽창 정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작은 대가였다.
일본에서의 농업적 우익 급진주의의 본래적인 한계와 광적인 천황 숭배는, 우리가 군부의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1920년에서 1927년 사이 사관학교 입학자의 약 30%는 소지주, 부농 및 도시 쁘띠부르주아지의 자제였다...이때쯤 되면 새로운 사회적 기반과 정치적 안목을 가진 새로운 집단이 군부의 고루하고 좀 더 귀족적인 지도층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까지 아라키 대장은 그들의 최고 대변인이었으며 금권주의자들과 황실 주변의 인물들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은 대표자였다...30년대의 전쟁 경기에서 기업가들이 커다란 이익을 보게되자 농업적 유대 관계가 있는 군부의 반대파들이 다시 소란을 피워 마침내 1940년 육군상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군부는 자급자족적인 작전 근거지를 만주에 세우려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재벌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만주는 거의 농업 지역이었는데, 일본의 관동군은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그것을 공업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일본 기업의 도움을 받았다. 군부가 이런 교훈을 인식하게 되고 만주에서 기업과의 협조가 필요하게 됨에 따라 군부와 기업은 보다 유착되어 중국 북부 지방의 점령이 가능하게 되었다.
근대 세계의 도래를 피해 달아나는 일본 군부의 모습은 일본 우익 세력의 농업적 교리의 무용성과 그것의 궁극적인 대기업 의존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대기업체들은 일본적 제국주의의 생활 양식에서 농촌 및 소시민적 애국주의자들에게, 구호는 아닐지라도, 실제로는 반자본주의적 자세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일본적 형태의 파시즘에서 군부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는 다소 다른 사회세력을 대변했고 정치적 역할도 달랐다. 독일에서 군부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전통적 엘리트 계층의 피난처였다...군부는 대체로 히틀러의 명령에 좌우되는 수동적인 기술도구였다...일본의 군부는 재벌에 반대하는 농촌과 도시의 소상인들의 압력에 대해 훨씬 더 민감했다. 이 차이는 일본과 독일 사회의 차이에서 추적해 볼 수 있다. 일본은 독일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고 농민 계급이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은 이들의 요구를 쉽게 물리칠 수 없었다.
이런 모든 차이점이 인정된 뒤에도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유사성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독일과 일본은 둘 다 뒤 늦게 공업 세계로 돌입했다. 이들 두 나라에서는 국내적인 억압과 해외로의 팽창을 주요 정책으로 삼은 정권이 대두했다. 양자의 경우 이런 계획을 수행한 사회적 주체 세력은 농민 및 산업 노동자와 대립하는 상공업 엘리트(이들은 미미한 위치에서 출발했다)와 전통적인 농촌 지배계층의 연합세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두 나라에서는 발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활하는 소시민과 농민의 비참함으로부터 우익적인 급진주의가 생겨났다. 이런 우익 급진주의는 이 두나라에서 억압적인 정권을 위한 몇 개의 구호를 제공해주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이윤과 능률이라는 요구 앞에 희생되었다.
이 시기(메이지부터 전간기-나의 주)의 일본 농촌 생활을 말해주는 세 가지 정설이 있다. 첫째는 소작제도의 개혁을 위한 토착적인 노력의 실패요, 둘째는 일본 총촌 경제에서 견직물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다는 것이요, 셋째는 대공황의 영향이다. 요컨대 일본의 농민을 세계 시장의 손아귀에 던져버리는 것이 메이지 시대 이후의 주요 추세였다는 것이다...잠사업은 농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력한 시장 조직으로 인해 도시의 대상인들이 이윤의 대부분을 수탈했다 농민의 반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성장에 알맞은 상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불경기는 쌀과 생사 모두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많은 농민이 몰락했다. 어떤 학자들은 농촌 경제가 받은 이런 동시적인 타격과 "자유주의적" 정부의 붕괴 및 군사적 침략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권력이 넘어간 것 등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과관계의 사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리는 군부-이들은 농민 출신의 사병과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과격한 민족주의적 호소에 동조하게 된 "소시민" 출신의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로 추정되고 있다.
미점령군에 의한 토지개혁(1946)때가지 일본의 촌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국면은 부자가 마을을 지배했으며 공공연한 갈등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락에서의 권위의 주요 토대는 토지 재산의 소유였다...미점령군에 의한 토지개혁의 결과 혹은 기타 다른 이유로 해서 경제적인 의존 관계가 사라진 곳에서는 신분 및 예의범절의 전통적인 구조가 붕괴되었다.
17세기 이래 일본 농촌의 역사를 돌이켜볼 대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것은 그것의 연속성이다. 과두정치적 구조, 내적인 결속, 고위 당국자들과의 효율적인 수직적 관계 등 모든 것이 시장을 위한 현대적 생산 양식으로의 젼환을 별다른 변화없이 수행했다...지주들이 옛 부락의 구조를 통해 많은 잉여를 수탈해 판매함으로써 높은 자르를 그래도 지킬 수 있었기 대문에 그것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그렇게 하는데 실패한 자들은 농촌적 사이비 급진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 사이비 혈족관계가 소작관계로 대치된 것이 유일하게 필요했던 제도적 변화였다. 이 모든 것은, 여러 사건이 보여주듯이,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생산성이 크게 늘어날 수 있는 쌀 농사에서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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