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미국의 남북전쟁: 최후의 자본주의 혁명
농장과 공장의 갈등은 불가피했는가?
미국이 근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길과 영국과 프랑스가 근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길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 것은 곧 미국이 늦게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봉건적 형태이든 관료적 형태이든 복잡하고도 뿌리가 깊은 농업사회를 해체할 필요가 없었다. 버지니아의 연초농장처럼 상업적 농업은 처음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고, 미국이 안정적인 자리를 잡게되자 급격하게 지배적이 되었다. 가령 유럽처럼 상업화 이전 단계의 토지 귀족과 군주 사이의 정치 투쟁과 같은 것은 미국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미국 사회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 거대한 농민 계급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이른바 도시적인 또는 부르주아적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는 세력이 감행한 혁명적인 공세 중 최후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말할 것은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노예제는 산업 자본주의의 경제적 족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미국 산업 성장의 초기 단계에 기여가 컸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19세기 독일의 역사는 발전된 공업이 고도의 노동억압체제에 바탕을 둔 농업 형태와도 잘 어울려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확실히 독일의 융커는 노예 소유주가 아니었고, 또 독일은 분명히 미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정확히 어디에 있을까? 융커들은 독립 자영농들을 그들의 영향력 하에 두면서 대공업가들과도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는 온정주의와 억압이 적절히 혼합된 방식으로 공장 노동자들을 제자리에 묶어두는데 융커들의 도움이 유익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생각할 때 독일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독일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만일 미국의 북부와 남부가 타협을 하게 되었다면 그 타협은 마침내 미국에서 그 뒤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희생시켰을 것이다...또한 독일의 경험은 우리가 어느 면을 중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암시하기도 한다. 왜 북부의 자본가들은 미국에서 산업자본주의를 확립하고 강화하는데에 융커와 같은 남부의 지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독일의 경우와 같은 공업가와 융커 간의 정치적 경제적 유대가 미국에는 없었을까? 미국에는 농민 대신에 독립 자영농과 같은 다른 집단들이 있었던가?...
2. 미국 자본주의 성장의 3가지 형태
18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국적으로 각기 다른 3가지 형태의 발전과정을 보였다. 즉 면화를 재배하는 남부와 자유농민의 경작지인 서부, 그리고 급격하게 산업화되는 북동부가 그 것이었다. 미국 사회 내의 분열과 협력이 항상 이런 구분선에 일치해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해밀턴이나 제퍼슨의 시대부터 농업 종사자와 도시의 상인, 금융업자 사이에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왔다.
남부 지방에서의 면화의 중요성을 잘 알려져있지만, 면화가 전반적인 자본주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1840년대부터 남북전쟁기까지 영국은 면화 총수입량의 5분의 4를 미국 남부 각주에서 들여왔다. 그러므로 노예 제도에 의해 경영되었던 농장은 결코 산업 자본주의에 기묘하게 접합된 시대착오적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것은 산업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며 세계 산업 자본주의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다.
미국 남부 사회에서 농장 경영주와 노예 소유주들은 매우 소수였다...백인 중 단지 7%의 인구가 전체 흑인 노예의 거의 4분의3을 소유했다. 제일 좋은 경작지는 점점 이들 극소수의 노예 소유주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정치의 실권도 역시 그러했다...남부 대부분의 소규모 자영농들은 대농장주들의 정치적 리더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왜냐하면 어떤 다른 분명한 대안도 없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 대농장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의 확실히 노예 제도는 당시의 남부사회의 내부 사정상 결코 소멸과정에 있지 않았다...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노예 제도가 경제적으로 유리했다는 사실이다...농장의 노예제는 수지가 맞았으며 나아가 면화나 특용 작물의 생산에 적합한 지역에서 발전한 하나의 효율적인 제도였다...플랜테이션 노예제가 남부로부터 점점 서부로 이동해감에 따라 그 것은 심각한 정치 문제를 조성했다.
1830년대를 통해 북부 자본주의 자체의 성장을 가족화시켰던 이면의 동인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면화였다. 그 뒤 10년 동안 공업 성장의 속도는 마침내 북동부 지역이 공업 지대로 화할 정도로 가속화됐다. 바로 이런 공업의 팽창은 미국 경제가 단일한 특수 농산품에만 의존하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북동부와 서부는 예로부터 남부에 많은 곡물을 공급했으며 그 당시에도 이런 공급을 계속했던 터라 남부에 대한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북동부와 서부의 상호 의존은 더욱 더 강화됐다...북부의 공장 생산품들은 급격하게 발전하는 서부 지방과 대단히 빈번하게 교역되기 시작했다.
북부의 자본가들이 정부의 기능을 필요로했다면 그것은 사유재산 제도를 보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부의 대농장이나 노예의 소유주들이 사유재산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 것은 그 나름의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다. 또한 북부의 자본가들이 원했던 것은 자본의 축적이나 시장 경제의 전개 과정에서 정부의 건실한 지원이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호관세라든가 교통망 수립데 대한 지원, 건전 재정, 그리고 중앙은행 제도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북부의 유능한 지도자들은 주 정부나 지방 당국자들에게 어떤 부담도 지우지 않고서 기업활동을 전개하려 애썼다. 그들은 다름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시민임을 자랑으로 생각했고, 연방정부로부터 탈퇴의 움직임이 있었던 위기의 순간에는 미국이 분열돼 다수의 군소국가로 변모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그 당시 가장 첨예한 감정 마찰을 일으킨 경제 문제는 관세였다...북부인들이 관세 인상을 요구하고 남부인들이 그에 반대하는 것...(영국의 면방직 공업이 기술 우위로 인해 북부 산업이 위기에 있었으나 남부는 면화수출로 호황을 맞았던 상반된 경제적 차이가 영향을 주었을 것-나의 주)
북부 자본가들은 그들 나름의 임금 수준의 풍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그 당시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충원될 수 있었을까?...북부의 정계와 경제계 지도자들은 하나의 해결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서부의 농업 종사자들을 남부인들과 분리시켜서 북부와 연계시키는 것이었다...이런 경향을 이용함으로써 북부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더 이상 남부의 대지주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83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거대한 잉여 곡물들은 남부에 흘러들어서 그곳의 특수 작물재배 경제에 식량을 공급했다. 그런 경향은 지속되긴 했지만, 동부의 곡물소비 시장이 점점 중요해짐에 따라서 남부 시장의 중요성은 상실되기 시작했다...1830년대부터는 서부 곡물의 동부해안으로의 이송을 위한 점진적인 재조정이 시작되었다. 교통혁명, 즉 운하와 철도의 부설은 산을 넘어서 물건을 운송하는데 드는 운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서부 농산품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었다.
...서부 농산품에 대한 동부의 수요는 서부인들의 사회구조와 심리적인 태도를 점차 변모시켰으며, 마침내 새로운 연대가 생기데 되었다. 불동부 지방의 초기 시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소규모 자본가적인 사고방식이 서부 농가의 상층 지배계층으로 스며들어갔다...이런 결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켰다...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업과는 다른 성격의 농업 체제가 (서부에서) 한층 더 번성하게 되고 영농 노동력을 가족의 성원에 주로 의존하게 되면서 서부의 영농 방식이 노예 제도에 대한 상당한 위기 의식을 준 것은 분명하다...남부의 대농장주들은 19세기 중반이 되기 전에 서부의 가족 영농 체제의 확산이 노예 제도와 그들 자신의 영농 제도에 대한 위협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서부에 대한 남부인들의 적대감은 북부인들로 하여금 서부의 자영농들과 연합할 기회를 주었는데 북부인들은 이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이들 사이의 연합 세력은 1860년의 공화당의 강령이 링컨을 백악관의 주인이 되게끔 도와준 그 늦은 시각까지도 정치적 세력으로는 기능하지 못했다. 이 당시 대다수 농촌 지역 사람들이 링컨에게 반대표를 던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해의 역할은 사업가가 아니라 정치인과 언론인의 몫이었다. 서부의 땅을 가난한 정착민에게 개방하는 법안은 유산 교양 계층으로 이뤄진 정당이 일반 대중, 특히 도시의 노동자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타협의 본질은 단순했으며 직접적이었다. 즉 기업가들은 고율의 관세를 지지하는 대가로 땅을 원하는 농민들을 지원했는데, 노동 계급의 다수에게도 땅은 역시 인기가 있었다...이런 상황은 곳 철과 보리의 사이 좋은 결혼으로 나타났다. 이는 독일에서의 산업가와 융커의 결합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서부의 가족 영농 종사자들은 독일처럼 토지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합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독일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미개척 토지의 존재는 미국 자본주의의 시발단계에서부터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를 얽히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자본주의 초기 단계는 유럽에서는 폭력적인 급진운동의 대두라는 특징을 보여줬다. 유럽에서 노동조합의 창설과 혁명적인 공약을 설정하게 했던 그 급진적인 열정이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원하든 원하지않든간에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유경작지를 주려는 계획 속에 흡수되었다...서부로의 이주 경향이 미쳤던 실질적인 영향은 사유 재산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킴으로써 초기의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공화당이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에게 정부의 토지 수용권을 빵과 오락 이상의 의미있는 선물로 공짜로 던져주었다는 비어드의 지적은 무척 재치있는 것이며, 사실 그 후 사회주의 운동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서부 개척이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미국을 위해 기여한 것은 사회 계급과 지리적 영역의 재편성에서였다. 북부의 산업가들과 서부의 자유 영농의 농민들 사이의 연계는 한동안 산업 성장에 따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고전적인 대응책을 무용지물화하게 만들었다. 산업가들과 남부 대농장주들이 제휴하여 노예, 소규모 자영농, 공장 노동자들과 대립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었다.(하지만 실현되진 않고 그 대신 두 세력은 대립함으로써-나의 주) 미국을 남북전쟁의 참화 속에 밀어넣었다.
3. 전쟁원인의 설명 논리
남부의 경우 플랜테이션 경제를 확장시키려 했던 분명한 압력을 찾아볼 수 있다. 최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신 개척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본의 필요성에 대한 압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와 함께 노동력의 공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가 더 많을수록 좋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플랜테이션 경제에서 전반적인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면화라든가 그보다 덜 중요하지만 다른 특산물들이 국제 시장에서 좋은 가격에 팔려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북부의 공업에는 일정한 정부 지원이 필요했다. 가령 자본 구성의 간접비나 기업 활동에 유리한 제도적 여건의 수립 같은 것에 대한 지원 말이다. 여기서 말한 유리한 제도란 수송 제도, 관세 제도, 채무자나 소액 자본가들에게 부당안 이익을 볼 수 없게 하는 엄격한 통화 정책 등이었다. 또한 노동력의 공급 면에서 산업체는 공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임노동자를 필요로 했다...마지막으로 공업 상장에 시장 확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 당시 이런 시장은 주로 농촌 지역에서 제공했다. 그 중에서도 서부가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 점에서 서부는 우리가 지금 설정한 미숙한 모델에서 북부의 일부로 여겨도 무방하다...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지역의 확대는 서부의 자영농들을 심각하게 자극했으리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한다-나의 주)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고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미국의 사회 구조는 19세기에 서로 다른 몇 가지 방향으로 발전했다. 남부에서는 농장 노예제에 바탕한 농업 사회가 발전했다. 북동부에서는 산업 자본주의가 확립되었으며 가족 중심의 영농 체제에 기반을 둔 서부 사회와 유대를 형성했다. 서부인들과 함께 북부인들이 형성한 사회와 문화는 남부인들의 사회, 문화와 가치의 측면에서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노예제도였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는 도덕적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네빈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조성시키고 지탱시킨 경제 구조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연방 정부의 통치기구가 어느 쪽 사회를 지지하는가로 점점 좁혀졌다. 바로 이 것이 관세문제와 같은 평범한 문제의 이면에 있던 의미였으며 남부인들이 관세 지불이란 북부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라고 열띄게 주장했던 동기였다. 중앙에서의 권력의 문제는 또한 준(세미)주에서의 노예제 문제를 중대 문제로 부각시켰다. 정치지도자들은 한주가 노예주에 가입하느냐 자유주에 가입하느냐가 연방정부의 균형을 바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족으로 갈수록 노예 제도의 문제가 미해결이었거나 부분적으로만 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상황은 지극히 유동적이었으며 어떤 타협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다. 북부와 남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상대방에게 유리할지도 모르는 조치나 움직임에 대해 더욱 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분업이 발달된 복잡한 사회에서, 특히 의회 민주주의 하의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권력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는 것이 정치가나 언론인, 보다 넓게는 성직자들의 특수한 필수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또한 그 사회의 구조를 변혁시키거나 그대로 유지시키기 위해 좋든 나쁘든간에 논의를 제공해야 한다. 정치가들이 때로는 소란을 피우고 때로는 분열을 심화시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특징이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고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꾸려가는 힘겨운 일에서 손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치가의 역할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몹시 역설적이다. 정치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기 위해 노상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정치가들은 현실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위기에 대해 일반의 여론을 일으킬 필요를 때때로 느끼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또 한가지, 근대의 여론이 전쟁에로의 흐름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해명 가능해진다. 남북을 통틀어 자산가들은 중도적 여론의 핵을 형성한다...대체로 온건론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정상적 운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미덕을 지녔다. 즉 반대파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며 타협하는 태도, 실용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그것이다. 이 온건론자들은 교조적인 사람과는 정반대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든 특징은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노예제 문제를 주로 옆으로 밀쳐두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온건론자들은 기본적인 상황에 기인한 일련의 문제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통제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교역이야말로 다양한 여러 지역으로 이뤄진 한 국가를 결속시킬 수 있는 확실한 요소이다. 남부의 면화가 주로 영국에 수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곧 북부와의 연관이 그만큼 더 약했음을 의미한다...이 사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속력을 저해하는) 다른 두 가지 요소가 보다 중요했을 것 같다. 한 가지는 이미 지적했는데, 즉 북부에는 산업 자본주의적 소유제에 위협을 가할 강력하고도 급진적인 노동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미국은 대외적으로 강력한 적대국가의 도전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상황은 독일이나 일본이 직면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런 요인들을 종합해보면 미국에는 농업 엘리트와 공업 엘리트의 전형적인 보수적 타협을 추진하는 세력이 별로 없었다.
대단히 간략하게 이런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두 개의 이질적인 경제제도가 발전했고 그에 따른 상이한 문화(다 같이 자본주의적이기는 하지만)는 노예제에 관해 타협할 수 없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북부의 자본주의와 서부의 자영농 체제의 결속은 도시 엘르트와 농촌 엘리트 간의 전형적인 반동적 연합을 한동안 불필요하게 했다. 이들의 연합이 이뤄졌다면 그것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타협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그 뒤 일어난 전쟁을 종식시킨 타협세력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 요소가 그런 타협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서부의 장래의 불확실성(노예제도의 서부로의 확산 문제-노예주 편입문제와 연방정부의 권력 균형)은 미국 중앙 정부에서의 권력 배분 문제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불신과 투쟁의 모든 요인을 격화시키고 심화시켰다. 둘째로...미국 사회에서의 중요한 결속력은 강력해지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미약했다.
4. 혁명의 추진력과 그 실패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지배 계급 내의 분열은 피지배 계층으로부터 급진적 경향이 들끓어오르게 했는데, 특히 프랑스 대혁명에서 더욱 그러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는 그에 비견할 급진적인 성향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개략적으로 보아도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미국 도시에서는 피억압 장인들이나 또는 상퀼로트가 될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서부의 광대한 미개간지는 간접적으로라도 폭발의 잠재성을 감소시켰다. 둘째로, 농민 폭동이 일어난 요건이 미국에는 없었다. 사회의 맨아랫층은 농민들의 차지가 아니었고, 남부의 경우 주로 흑인들의 차지였다. 이들 노예들은 혁명을 일으킬 힘이, 혹은 의지가 없었다.
혁명의 추진력으로 발전하는 도상에 있었던 것, 즉 기존 사회의 질서를 폭력으로 바꾸어보려했던 시도는 북부의 자본가들로부터 나타났다. 흔히 급진 공화파라고 알려진 집단들의 노예폐지론 사상은 제조업자들의 이해와 뒤얽혀 잠깐동안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으나 그 뒤 성격이 변질되고 만다. 이런 급진 공화파가 전쟁 내내 링컨의 진영에서 말썽을 일으켰지만, 링컨은 연방 유지의 관건적 노선, 즉 남부의 토지 재산권을 크게 침해하지 않는다는 노선에 주로 힘입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전쟁 직후 1865-1868년의 3년이라는 짧은 기간, 급진 공화파는 전쟁에 승리한 북부의 권력을 장악해 노예제의 남은 문제와 대농장제에 공세를 취하기도 했다...(급진파는)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도 노동자와 공업가, 그리고 일부철도업자들의 연합세력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남부를 재건하자는 급진파의 주장(대토지 소유를 해체하고 토지를 흑인들에게 분배하자는 주장-나의 주)은 북부의 군사적 힘에 의해 농장 귀족제를 무너뜨리고 흑인들의 투표권과 재산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창설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남부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이런 조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로부터 100년 후에 나타난 흑인인권 운동도 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그러므로 급진파가 얼마 못 가 패배한 것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북부의 자산가들의 이익과 마찰하게 되자마자 그 계획의 급진적인 부분이 무너지게 된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토지개혁안의 실패는 결정적이었으며...이런 계획들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남부의 백인 지주와 그 밖의 재산 소유자의 우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토지 몰수와 분배는 수포로 돌아가고 플랜테이션 체제는 새로운 노동 체제에 의해 부활되었다...노동력 관리가 극히 편리한 분익소작(sharecropping)제가 널리 퍼졌다...(대농장 경영을 겸했던) 지방 상인들은 소농이나 분익 소작농에게 일반 소매가격보다 더욱 비싼 값에 일용 잡화를 외상으로 줌으로써 이들 상인은 쉽사리 농민의 노동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이런 방법으로 대다수 흑인에게는 경제적인 사슬이 노예제도의 사살을 대신했다...중요한 변화는 은행은 농장주에게, 농장주는 소작농에게 환금작물을 재배하도록 압력을 사함에 따라 남부는 더더욱 단일 작물 농업경제가 된 데 있는 것 같다.
서부의 급진적인 자영농과 동부의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공세에 직면하자 북부의 특권 재산가들의 정당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흑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태도를 점차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남부의 융커들이 노예 소유주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점차로 도시의 기업적인 색채를 띄게 되고, 북부의 자본가들이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소요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이들 사이에는 전형적인 보수주의 연합이 이룩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 2의 미국혁명을 무산시킨 테르미도르 현상이 나타났다.
5. 전쟁의 의미
몇몇 중요한 정치적 변동이 북부의 승리에 수반되어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연방 정부는 자산가들의 성채가 되었으며, 그것도 주로 거대한 자산가의 점유물이 되었다. 마치 가진자가 얻게 되리라는 성서 구절을 실현시키는 기관처럼 된 것이다. 이런 성채는 무엇보다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미국 연방은 남북 전쟁 이후 서부에 사람들이 들어차게 되자 세계에서 가장 큰 국내시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현재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고율의 관세로 보호되는 시장이다...중앙 은행제도의 확립과 정화지불제도의 재개를 통해 통화 제도의 건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철도 건설은 정부의 거대한 금융 지원을 받았으며 공유지의 처분은 목재업에서나 광산업에서의 축재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이런 식으로 유출되는 노동력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 연방정부는 계속해서 이민의 문호를 개방했다.
북부의 승리가 비록 그 결과에 모호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남부가 승리했을 경우에 비교해볼 때 자유를 위한 정치적인 승리였음은 더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남부의 플랜테이션 체제가 19세기 중반에 서부에서 자생하게 되었고, 동북부로 확산되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미국은 오늘날 근대화의 도상에 있는 나라, 즉 라티푼디움 경제에다 반민주적 귀족이 지배하고, 취약하고 의존적인 상공업 계급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진할 힘도, 의지도 희박한 상태에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 것은 농업의 상업적 성격이 좀더 미약하긴 했지만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의 상황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급진적인 폭발적 해결이나, 준반동적 독재의 장기화가 여러가지 한계와 미비점을 가진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립보다 더 한층 가능성이 높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결정적 도약이었다. 이는 적어도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에서의 절대군주제도의 폐지와도 같은 행위였고 더 큰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본질적인 전제였다...연방 정부가 노예제도의 실시에 합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이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예컨대 조직 노동자들이 뒷날 법적,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어떤 곤란을 겪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자유의 영역과 의미를 확대하기 위한 운동이 남북전쟁 이후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그것은 대체로 1865년의 승리의 불완전한 성격과 그 뒤 남부와 북부의 자산가들의 보수 연합의 형성 대문이었다. 그 승리의 불완전한 성격은 산업 자본주의의 구조에 굳게 결합되었다. 이전의 억압의 많은 부분이 남부에서는 새로운, 한층 더 경제적인 모습(소작제-나의 주)으로 부활했으며 한편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과 확산에 따라 남부도 그외의 지역에서도 다같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 나타났다...연방정부는 새로운 경제적인 억압을 묵인하거나 억압에 봉사하는 성격을 띄었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베링턴 무어, 진덕규 역,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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