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청조의 쇠퇴와 중국 공산주의의 발생
상층계급과 황제 체제
(지주와 관료를 연결했던) 사회적 메카니즘으로서의 가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했다. 관직을 통해 획득한 재산은 토지에 투자되었는데, 이는 근대에까지 지배적인 관행이었다. 사람들은 가계를 위해 이와 같은 재산을 축적했다. 또 귀족의 학위 소유자, 또는 미래에 학위를 소유할 듯한 인물을 가족 중에 글어들임으로서 귀족가문임을 입증해야 했다. 학위 소유자는 그가 관직을 얻고 또 그것을 가문의 실질적 부를 증식하는데 사용하리라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희망에서 부양되었다. 관직을 통해 학자는 재산을 벌충하거나 증식시켰고, 가계의 지위를 유지했다...가계를 통한 관직과 부의 연결은 중국 사회를 가장 중요하게 특징짓고 있었다. 곧 사대부들과 지주들로 구성된 이 상층 계급을 향신으로 지칭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타당하다.
지주가 어떻게 하여 봉건적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농민들을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 수 있었는가...소작제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지주가 자기 몫을 화폐가 아닌 곡물로 받는 소작제가 지배적인 유형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심지어는 황제조차도 신하들로부터 곡물을 수납받는 최고의 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제도 아래에서 지주들은 불분명하나마 과잉인구라도 불러도 좋을 조건의 유지에 분명한 이해 관계가 있었다. 농민들의 과잉존재는 지주에게는 지대를 올릴 수 있는 경쟁 조건이 된다.
우선 인구의 압력이 지주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으려면, 그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해주고 지대의 수납을 뒷받침해주며 질서를 유지시킬 강력한 정부가 있어야만 한다. 이 것은 제국의 관료제의 임무였다...관료제는 기타 다른 중요한 몇 가지 방식으로 지주의 목표에 부응하였다. 지주는 그의 소작인들이 질 좋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관개수로의 마련에 강력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지방 지주 가문들은 정부 당국에 대해 수시시설을 건설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다...두번째로 토지 그 자체보다는 관료제가 가장 큰 물질적 유인을 제공했다. 전통적인 가문을 배경으로하지 못하는 한, 부유한 가문이라고 해도 재산을 분할 상속하는 경우, 몇 세대 못가서 영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중 중요한 것은 학문적 자질이 있는 자손들을 관료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되는 부패한 방식으로 재산을 모음으로써 가문의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토지에 기초한 부는 관료제에서 나왔고 또 관료제에 의존해 존속해갔다.
(중국 관료제의) 문제는 너무 가혹하게 수탈당한 농민들이 도망가서 비적이 되어버리거나, 혹은 상류 계급의 불평분자가 주도하는 반란의 지지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 같은 수탈을 방지할 유효한 메커니즘이 없었다는 사실이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적 취약성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전 산업사회에서도, 대규모의 관료제를 확립하려는 시도는 조만간 어려움에 직면한다. 즉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상급자에게 의존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자원을 인민들에게 이끌어내는 어려움이다. 통지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해나가는 방식이 곧 사회 구조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경우는 관직 매매였고, 러시아의 경우는 짜르에 대한 관직 봉사의 대가로 그 광대한 영토에 걸맞게 농노를 갖춘 영지를 주는 방식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다소간 공식적으로 부패를 허용해주는 것이 그 방식이 되었다.
이 체제는 고도로 착취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한 평가인 듯 하다. 이 것은 이 체제가 필수적인 공직 봉사의 형태로 사회에 되돌려 주는 것에 비해 더 큰 자원을 그 사회로부터 이끌어내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객관적인 기준에서의 평가이기도 하다. 반면에 체제가 그 작동을 위해 착취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변층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근대의 전체주의 저우건들이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재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고, 심지어는 공식적인 민주 정권들이 장기간의 국민적 위기의 시기에는 좁은 범위에서나마 국민들의 생활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방식도 사용할 수 없었다.
특히 청조 말기에 들어서 과거 제도는 전도양양한 관료들이 과잉 상태에 이름으로써 그들을 먹여살려야만 하게 되었다. 관료 체제의 최저변에는 막대한 숫자의 생원, 즉 관직을 차지할 자격은 갖추었으나 아직 임관되지 못한 과도적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이 향신의 정식 성원으로 계산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특권적 위계체제에서 그 바닥에 놓여있는 그들의 곤란한 지위는 19세기 일본의 하층 무사계급의 처지를 연상시킨다. 이 양자는 모두 지배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핵심 분자를 공급했다. 일본에서는 이 집단의 핵심적 소수가 국가 근대화의 추진력을 크게 제공했음에 비해서, 중국에서는 이들 에너지가 지배 체제의 틀 내에서의 반란과 정치적 전복의 무익한 시도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시켜 버렸다. 과거 제도의 동맥 경화적 효과가 이런 차이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 원인은 보다 더 깊은 곳으로 연결된다.
2. 향신층과 상업
청조의 중국 사회에서 도시 상공 계층이 형성된 적은 결코 없었다...부르주아지에 비견할만한 계층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이유의 하나로 황제권이 국가 통일에 성공한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도시 상인들은 교황과 황제, 왕과 귀족이 벌이던 다면적인 경쟁에 힘입어 상당히 큰 세력으로 성장함으로써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틀을 깨뜨리고 나올 수 있었다. 유럽에서 이런 돌파구가 처음 열린 곳이 봉건 제도가 대체로 약한 편이었던 이탈리아였던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중국의 과거 제도 또한 야심있는 사람들이 상업을 외면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영리 활동이 사대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향신층은 단기적으로나마 이러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통찰력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상업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상업을 국가의 독점사업으로 전환시켜 가장 돈이 잘 벌리는 자리는 자신들이 차지했다.
사대부들의 지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해안도시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나자 중국의 모든 개항장에는 매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부패해가는 중국 관료들과 외국 상인들 사이에서 갖가지 중개역할을 했으나, 그 지위는 분명치 않았다. 그들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안락하고 세련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많은 중국인들은 이들이 중국 사회으 토대를 파괴하고 있는 악질적인 외국인들의 종복이라고 비난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전반적인 사회사와 외교사는 이러한 혼종적인(hybrid) 집단에 제동을 걸기 위한 중국인들의 시도와 이런 집단을 상업적, 정치적 이득을 위한 디딤돌로 이용하려는 강대국들의 상반된 노력에 대한 기록으로 점철된다.
1860년대의 중국에서 산업화가 자체의 힘으로 조심스럽게 이뤄지기 시작했을 때, 이런 작업은 근대 기술을 그들 자신의 목적, 곧 지방 분리 독립에 이용하려고 했던 지방 향신층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군사적인 문제들이 가장 시급하였으므로, 초기의 공장들은 군수 공장이나 해군 조선소 등 거의 예외없이 군사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중국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능력은 주로 지방의 권력 중심지에서 이뤄졌을 뿐, 청조의 정부에서 주도한 것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산업화를 위한 노력은 단합보다는 혼란을 촉진하는 요인이었다.
중국은 러시아와 같이 중산층이 숫적으로 열세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종속된 상태에서 근대로 접어들었다. 중산층은 서구의 경우와 달리 독자적인 이념을 계발하지 못햇다. 그러나 관료국가의 저변을 허물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 집단을 형성하려는 시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안 지역에서 이루어진 중산층의 성장과 청조가 독립적인 지방으로 분할되는 과정은 일치했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군벌의 전성기(대략 1911-1927)와 그 뒤를 잇는 국민당 시대까지 계속되는 부르주아와 군국주의자들이 결탁할 여건을 조성했다. 이런 일반적 전개의 선례(1870-1895)는 이홍장이었다. 그는 25년간이나 외교업무, 해양업무에 따른 관세 수입의 지배, 병기 생산, 화북 지방의 군사력 완전 통제 등을 홀로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향신층(나중에 순수한 의미의 지주층이 된 것은 바로 이 향신층의 후계자들이었다)과 무역, 금융,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도시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점차적으로 견실한 제휴가 이뤄졌다. 이런 제휴는 국민당의 중요한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제국적 성격을 복원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인데, 이 시도는 중국 전래의 폭력주의와 허식적인 사이비 유교 윤리와의 혼합(이 것은 나중에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서구의 파시즘과 흥미로운 유사점을 보여준다)을 통해 지주층을 정치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상한 혼합은 향신층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서 상업적 영농 단계로 넘어가려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3. 상업농 정착의 실패
중국의 경우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농민들로부터 경제적 잉여를 거두어들여 문화적 여흥에 전용하기 위한 정치적 방책이었다...즉, 중국의 지주들로서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이 풍부한 여건에서는 도시의 시장이 고려하여 장원의 생산을 합리화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토지를 얻기 위한 농민들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장원이 도시 부근에 있다면 지주로서는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줌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힘 안들이고 수입을 올리는 편이 훨씬 더 간단하고 손쉬웠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다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 또한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수익성이 좋다는 사실을 쉽사리 깨달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도시 부근에서 부재 지주가 증가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구지주들과 보다 부유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 부분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언제 어디서든 시장이 생기면 향신층은 상업농이 되기보다는 정치적 연줄을 가진 랑띠에(지대 생활계급)로 변신했다. 상업농은 소수에 그쳤다.
4. 청조 체제의 붕괴와 군벌의 등장
서태후의 진정한 목표는 자기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정부를 대체로 독일이나 일본의 노선에 따라 확립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인상을 강력히 받게 된다. 우리가 규명하고자 하는 주요 논점은 그런 정권에 필요한 사회적 토대가 중국에는 결여되어 있었고, 심지어 러시아보다도 훨씬 더 그러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정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 것은 정치적 세력은 상당했지만, 경제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 지배층과 약간의 경제력은 있으나 정치적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상승 과정에 있던 상공업 엘리트의 제휴이다. 당시 중국 도시의 토착적인 상업 집단들은 그러한 연합에 필요한 상대자가 될 정도로 성장해 있지 않았다.
유학자들이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할 기회가 줄어들고 중앙 정부의 힘이 쇠약해짐에 따라 향신층은 지방 행정을 점점 더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9년에 공산당의 승리로 겨우 수습되는 오랜 혼란과 파멸적인 전쟁의 전조였다. 곳곳에서 형신층은 오로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청조는 상점주인이나 행상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저 유명한 내국관세인 이금을 신설함으로써 그 붕괴의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금은 태평천국의 난의 결과로 필요해진 자금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었기 떄문에 취한 긴급조처였다. 몇몇 복고주의적 지도자들이 토지에 대한 과중한 세금보다 이금을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조의 중앙 정부는 조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군벌의 원형인 새로운 지방당국은 이금 차제에 힘입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는 1911년에 청조가 멸망하고 1912년에 공화국이 선포된 사건에 의해 지방 장관이 실권을 장악하여 15년 이상이나 유지했다는 구조 상의 변화를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향신층 중 일부 강력한 세력은 이 기간 동안 군벌로 변신하거나 독립적인 군사세력과 제휴함으로써 권력을 지탱했다. 이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던 사회적 문화적 장치들은 대부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그들의 계승자들은 말 그대로 단순한 지주나 도적이 되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이 두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었다...지주와 강도집단 군벌은 공생하는 사이였다. 그런 관계는 노동이나 현물의 형태로 수탈하는 조세 제도의 운용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체제는 농민들로 하여금 지방 엘리트의 권력을 계속 보장하도록 강압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상인들 또한 나름의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당의 토대였던 상인 집단과 지주 계급의 제휴를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징발 제도는 향신층이 청조의 관료 체제 아래에서 꾸준히 정치에 관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정치 권력은 경제력을 낳아 유지시켰고 경제력은 또 다시 정치 권력을 생산했던 것이다. 중앙정부가 사라짐으로서 상층 지주 계급은 심각한 결함과 균열로 손상받았던 중국 사회가 그런대로 옛 모습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던 주요 장치들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20세기에는 새로운 세력들이 주역으로 등장했고, 전통적인 지배층의 계승자들은, 실패에 그치긴 했지만, 새로운 연합세력으로 변신하려 했다.
5. 국민당의 등장과 그 의의
국민당은 토착 공산당과 소련의 도움에 크게 힘입어 1927년 후반에는 남부의 본거지로부터 시작해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간까지 국민당은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 퍼져있던 불만의 조류를 잘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즉 국민당은 군벌과는 다른 사회적 강령을 내세웠고, 이 점에서 군벌보다 유리했다.
국민당이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자, 민족주의적 통일 강령으로써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던 여러 요소의 균열이 표면화되어 투쟁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정예 군사력을 확고하게 손에 쥔 장개석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음모와 일련의 무력 기습을 통해 혁명 대열에서 이탈해나갔다. 그는 이런 이탈 끝에 결국 농민-부르주아의 고전적인 연합을 이용함으로써 노동자를 공격했다. 1927년 4월 12일(장개석의 상해 반공쿠데타)에 그의 하수인들은 프랑스, 영국, 일본의 경찰 및 군대를 비롯해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다른 세력과 함께 노동자, 지식인 및 그밖의 공산주의 동조 세력을 대량 학살했다...그는 자본주의적 요소들까지도 적대시해 구금 및 처형의 위협을 통해 재산을 몰수하거나 강제로 공채를 사도록 하기도 했다.
장개석의 승리로 중국의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민당은 말로나 행동으로나 국가 통일이 정치 및 농업 개력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임을 주장했다. 현실적으로 이런 생각은 군사력으로 농업 문제의 해결 모색, 즉 비적과 공산주의자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시도를 뜻했다.
상공업 발전의 충격 아래 중국은 부의 격차가 현격한 부재 지주제가 점차 우세해져갔다. 이런 변화는 해안 지역, 특히 대도시 부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상업의 영향으로 농민의 소유권은 잠식당하고 일부 옛 지배계층과 도시의 신흥 세력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적 집단에 부가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합이 국민당의 주요한 사회적 기반이 됨에 따라 국민당은 현상 유지나 현상 회복을 시도하는 농업 정책을 채택하였다. 게다가 사실상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맞수인 공산주의자들의 존재로 상황이 첨예화됨으로써 국민당은 더욱 반동적이고 강압적인 정책을 쓰게 되었다. 국민당에 대해 호의적인 한 미국인 학자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때로 광적인 농민 반란의 후예들처럼 행동하고, 국민당 정부와 국민당은 관료의 후예처럼 행동한다."
국민당의 주요한 사회적 토대는 이미 살펴본 대로 향신층의 계승자들과 도시의 상업적, 금융적, 산업적 이해 집단 사이의 제휴 또는 기껏해야 그들간의 적대적 협력이었다. 국민당은 폭력 수단의 지배를 통해 그들 이해집단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기능하였다. 동시에 폭력의 통제로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도시의 자본가 집단을 갈취해 정부 기구를 운용할 수 있었다. 국민당은 이 두 가지 측면 중 어느 쪽으로나 히틀러의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과 비슷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사회적 기반에서나 역사적 상황에서나 유럽의 대응되는 정당과는 다른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반동적 국면이 비교적 미약했던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런 차이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가지 명백한 차이점은 중국에는 든든한 산업적 기반이 없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훨씬 빈약했었다는 사실이다. 또 이 집단의 영향력은 해안 도시의 일본 강제점령으로 말미암아 한층 더 감소되었다는 추측도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중국은 민족 감정의 직접적 목표물이 되었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반동적 국면에 접어들어서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파시즘처럼 해외 팽창을 전혀 할 수 없었다.
6. 반란, 혁명, 그리고 농민
(중국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결점들은 농민을 상층 계급 및 기존 정권과 이어주는 고리들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향신층의 구성원들은 잇따른 농사철에 감독자의 역할까지 포함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농민 공동체의 정당한 지도자로서 군림할 근거가 없었다. 중국에서 토지를 가진 향신과 보통 지주와의 사이에 나타나는 큰 차이 중의 하나가 향신이 육체 노동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학문과 교양을 닦는 일에만 전념했었다는 점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 하다...정부와 상층 계급에서는 농민이 그들의 생활방식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능(치안, 관개, 농업 기술 보급 등)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는 취약하고 대개는 인위적이었으므로 어떤 격심한 긴장이 있을 때에는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중국 농촌의 노동력은 풍부하거나 심지어 남아도는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도의 경우는 카스트 제도 아래, 일본의 경우에는 다른 형식으로 아직도 계속 존재하고 있는 계속성과 제도적 기반이 중국의 촌락에서 이뤄진 어떤 개인들의 경제적 협력에도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중국 농민 사회의 결속력은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 상당히 약했으며 너무 지나칠 정도로 토지 재산에 좌우되었던 것 같다. 인도의 경우를 다시 고려해보면,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은 카스트 제도에 힘입어 자기 나름의 활동 영역을 찾을 수 있었고, 촌락 내부의 분업 과정 속에 편입됨으로써 재산이 없어도 활동에 큰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
중국은 부싯깃-반란의 불꽃만 튀면 쉽사리 불붙을 수 있는-과 같은 인간 파편의 거대한 집단이 형성되기에 알맞은 사회였다...청대에 있어서 단순히 약탈이나 일삼던 비적 행위와 조직적인 반란 행위를 비교해보면 어떤 경우든 별 차이가 없었다. 더욱이 농촌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반란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중국 농촌의 사회 구조의 여건에서는 비교적 쉬운 일이기는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반란이 심각한 위협이 될 정도가 되려면, 반드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영토적 기반이 있어야 하며 그 영토를 구준히 확장해야만 한다. 또 영토적 기반의 획득은 그 영토 안에 있는 촌락들이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중국의 경우 그 것은 농민들에게 보다 나은 여건을 제공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향신층을 비롯한 지방 귀족들이 협력을 하도록 만드는 것도 뜻했다... (전통 사회에서 중국 농민들의 반란은) 향신층의 참여 및 지도력 행사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의 가능성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근대화와 상업의 침투로 인해) 재산과 사회적 결속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 논의하고 있는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국면은 극빈 농민집단이 촌락의 사회적 위계질서의 밑바닥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최근의 몇몇 지역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숫자는 지역 주민의 절반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이렇게 볼 때 1927년에 시작해서 1949년에 공산주의자의 승리로 끝난 혁명의 민중적 기반은 토지가 별로 없는 농민층이었다. 스페인과 쿠바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농촌 폭동의 원천이 되었던, 집단적으로 근대의 자본주의적 대농장에서 일하던 농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없었다. 중국의 상황은 또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도 성격이 달랐다. 프랑스에는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많이 있었지만, 혁명을 주도한 것은 부유한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혁명이 재산권을 확인하거나 봉건 제도의 잔재를 없애는 단계를 넘어서려는 기미를 보이자 오히려 혁명에 제동을 걸고자 했던 것이다.
전반적인 빈곤과 착취 그 자체가 혁명적 상황일 수는 없었고, 또 그 것만으로 혁명적 상황이 마련되기에는 불충분했다. 여기에는 희생자인 백성들의 새로운 부담을 강요당하거나 기왕의 부담을 어떤 이유 때문에 더이상 정당하다고 느낄 수 없게 되는 등 각종 부조리가 사회 구조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분위기도 있어야 했다. 중국 상층 계급의 부패는 바로 이런 필수적 요소로 작용했다. 향신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채 문자 그대로 지주 겸 고리대금업자로 탈바꿈해버렸다. 과거 제도의 폐지는 그들의 정당성과 이를 뒷받침하던 유교의 논리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뜻했다.
곤궁과 부패가 만연된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등장했지만, 이 또한 그 자체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은 일본의 침략 및 외세의 점령 정책이었다.
국민당의 관리와 지주들이 일본 군대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자 농민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일본군의 간헐적인 소탕 작전과 소각 전술은 농민들이 하나의 굳센 집단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공산주의자의 두 가지 본질적인 혁명 과업을 대신해준 셈이었다. 첫째는 구 시대의 엘리트를 제거해준 일이었고 둘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시켜준 일이었다.
북쪽의 촌락은 산서, 호북, 산동, 호남의 접경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곳의 경우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에 대한 민족적 저항 운동을 그들의 발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사회 투쟁에 이용할 수 있었다. 국민당의 잔재 세력을 비롯한 이 지역의 일부 부유층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인과 손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당시만 해도 아주 온건했던 사회 개혁 사업을 외세의 압제에 대한 투쟁으로 효과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촌락에서 기존 세력 몰래 차츰차츰 그들 자신의 정치 조직을 구축해갈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와 함께 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이익을 주고, 부유한 농민들에게는 부담을 지우는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이 사업 시행의 최초 성과는 그때까지 국민당의 주머니만 채워주고 새로운 부담을 지워온 조세제도를 폐지한 것이었다. 새로운 구호는 "부자는 재산으로 기여하고 노동자는 노동으로 기여하라"는 것이었다.
하나의 결정적인 위기는 일본인이 이 촌락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려 했을 때 닥쳐왔다. 무차별적으로 할당되는 일본인의 정액 세금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부유층에게 많은 부담을 지우는 공산주의자들의 안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촌락 전체를 부유층과 빈민층으로 분열시키는 데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들과 협조하여 곡물을 동굴 속에 숨기고 마을을 비워버렸다. 이에 따르지 않았던 부유층도 일본인이 마을을 점령해 그들의 곡식을 송두리째 빼앗아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결국 공산주의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따금 케케묵은 옛 통치 수법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빈농들, 나아가 중국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아왔던 집단인 여성들까지도 새로이 조직하였다. 그리고 특히 협동조합(농민협회)의 설립에서 볼 수 있는 지역적 자급자족 경제 계획을 통해 그리고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농민들이 굴종과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토지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뤄진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이 작업은 과거의 압제자와 부역자에 대한 보복과 함께 이뤄졌다.
토지는 가족단위로 분배된 것이 아니라 공평의 원칙에 따라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각 개인에게 분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소유와 가족 제도의 관계를 말살함으로써 촌락을 뿌리째 해체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친족 유대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거나 적어도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연령과 성별 뿐 아니라 계급 간의 적대감을 더욱 부채질한 셈이었다. 농민과 지주, 소작인과 마름, 지방 파락호와 그 희생자 사이의 투쟁은 이 이후에야 비로소 노골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공산정권은 촌락과 인민 정부 사이의 새로운 연결 체제를 만들어냈다. 모든 농민들은 자기의 일상생활이 국가의 정치 권력에 종속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공산주의자들은 이 연결 체계를 통해서 지주나 국민당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 과거보다 더 무거운 부담이 과거보다 더 공평하게 부과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변화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옛 질서를 파괴하고, 정부와의 연결 체제를 새로이 하고,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재산을 끌어내는 일, 이 모든 것은 열강이 무력으로 대결하는 와중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생산량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근본 과제를 해결하는데 예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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