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프랑스에서의 진보와 혁명
영국과의 대비 및 대비의 근원
프랑스 귀족들은 한낱 국왕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후반부터 바뀌기 시작했지만, 궁극적인 결과로서 귀족의 몰락이 나타났다. 상층 지주계급은 영국식으로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하는 대신에 주로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각종 의무를 통해 약탈적인 위치에 섬으로써 부르봉 군주 체제 하에서 귀족적인 생활을 영위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농민들의 재산이 이처럼 약탈과 파괴를 당하고 있는 반면에 상층 지주 계급은 대혁명의 전후 시기에는 점점 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프랑스의 공업은 영국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18세기 영국 귀족들과 비교해볼 때 프랑스의 귀족들은 대부분 그들의 영지 농민들로부터 현금이나 현물에 의한 부과조(dues)로 살고 있었다.
비록 극명하지는 않지만 보다 뚜렷하게 규정된 법적 지위와 농민 부과조에의 의존이라고 하는 두 가지 특성에 의해 그 뒤의 역사는 영국의 젠트리와 프랑스의 귀족을 구별하게 된다. 또 다른 생활의 방도가 제공된 도시의 성장에 의해 농촌 지역의 노동 수요가 늘어난 것에 편승한 농민들은 인신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대혁명의 시기까지는 농민들도 실질적인 토지 소유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16세기 동안 금과 은의 공급 증가가 가격 상승을 유발시켰을 때 영주의 수입에 일종의 위기가 오고 있는 징조가 나타났다. 상당수의 전사 귀족, 즉 대검귀족의 수입 격감은 심각했다. 그들의 경제적 토대의 소멸로 국왕이나 유능한 재상들이 왕권을 쉽사리 확대할 수 있었으며 이런 과정은 루이 14세의 장기 집권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파국적인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이전으로 되돌아가 랑띠에(지대, 이자, 임대 수입으로 생활하는 기생계급)의 위치를 종식시키고 직영지를 다시 구축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영국에서 그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했던 양모 교역과 같은 경제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다.
도시에서 돈을 벌어서 몰락 귀족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했던 부르주아지는 어느 정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바로 이런 과정이 15세기에 시작되었으며, 18세기 동안 계속되었다...17세기의 프랑스에서의 부르주아지의 이윤은 시장에서의 농산물 판매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농민들로부터 지대의 징수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국왕 중심의 관료적 기능의 확장은 이전의 구귀족과의 대항 과정에서 법률가를 필요로 했다. 토지를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귀족의 작위를 받거나 또는 관직 매매제를 통해 사회의 상층부로 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법복귀족이 때때로 국왕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그들은 옛 전쟁귀족들과 지방 분권주의자들과의 투쟁 과정에서는 절대주의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국왕이 관료들에게는 때때로 상당한 액수의 부수입이 생겼으며, 특히 왕권이 미약해졌던 18세기에서 그러했는데, 따라서 그런 매력이 영국식 농장 운영의 관리 경향을 감소시켰다.
대토지 소유는 영국이나 동부 독일같이 프랑스에서는 거의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농촌 지역의 토지 대부분은 농민의 손에 있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토지제도는 대규모 단위의 경지와 소규모 단위의 경지가 공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광범위한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농민들의 소작료가 그들의 생활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유지에 관심을 두었다.
대검귀족의 몰락은 국왕의 왕권확장 및 그 확립의 과정과 동시에 나타났다. 16세기의 전 기간과 그 이후 국왕은 귀족들의 법적인 특권을 상당히 제약했고, 군대를 늘렸고 귀족들의 토지에 대해 세금을 더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일에 전반적으로 관여했으며 그들을 국왕의 고등법원에 종속시켰다. 루이 14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은 베르사이유에서 호사를 누리며 빈둥거리거나 지방에서 태평스럽게 무위도식하는 존재로 영락해버렸다.
2. 상업적 농업에 대한 귀족의 반응
프랑스에서의 포도 재배는 영국에서 상업적 농업의 결과로 발생한 거대한 인클로저와 같은 변동을 농민들에게 가져다주지 못했다...중요한 차이점은 대단히 단순하다. 즉 프랑스의 귀족들은 농민들을 그들의 토지에 속박하여 봉건적인 지렛대를 동원해서 더 많은 생산물을 뽑아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그런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팔았다. 포도주의 경우에는 귀족들의 법적 특권은 대단히 유용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특권을 이용해 농부들이 포도주를 보르도로 가져갈 수 없도록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보르도에서는 귀족들의 성에서 가져온 포도주와 농민들이 가져온 포도주 사이에 경쟁이 생길 수 있었다. 포도주를 도시로 가져갈 수 있는 권리가 없었고 이와 동시에 최고 가격이 될 때까지 판매를 지연시킬 정도의 재고가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생산업자들은 그들의 포도주를 차라리 지주 귀족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18세기 보르도에서는 포도주를 기반으로 해 큰 재산을 모았던 인사들은 단지 법복 귀족들 중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출신은 주로 부르주아지였다.
중요한 문제는 프랑스 농촌 귀족들이 토지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고 생산품을 시장에 내다파는 과정에서, 인클로저를 강하게 밀어부쳤던 영국처럼 프랑스 농촌의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랑스 농촌에서 상업적인 발전을 이끌던 일부 귀족들은 농민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착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즉 귀족들은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동원해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곡물을 수탈해 팔았던 것이다. 귀족들이 이렇게 할 능력이 없고, 곡물을 수탈해가는 것에 대한 농민의 반항을 억누를 수 없었다면, 아마도 도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1세기 후 중국과 일본의 일부 지방과 비슷하게, 프랑스 농민들은 땅의 소유권은 가지고 있었으나, 사실상 상업적 지주였던 귀족들로 하여금 더 많은 곡물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련의 의무들을 지고 있었다. 이 것이 영국의 상황과 달랐던 중요한 차이점이다.
영국과 대조적으로 프랑스 농촌에 침투했던 상업의 영향력은 봉건 구조를 침식하거나 파괴하지 않았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은 구질서 속에 새로운 생활양식을 용해시켰을 뿐이다...(구체제의 종말이 오기 직전) 귀족들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봉건주의 아래서는 정치적 질서와 안전을 제공하는 등 정치사회적 기여를 했지만, 이 모든 기여는 왕정의 관리들이 대체했다. 귀족은 지방의 사법권에 대해 어느정도 권리를 보유했고, 이런 권리를 경제적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완전히 성숙한 자본가적인 농장주는 되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토지 소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특정 부류의 토지 소유권이었다. 그 소유권의 본질은 국가의 강압적 장치를 통해 경제적 잉여의 특정 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였다.
영국에서는 지방과 도시 사이의 연합(상층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연합)이 주로 왕권에 대항하기 위해 이뤄졌는데, 이런 현상은 내란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지방과 도시 사이의 연합이 왕을 통해 이뤄졌으며, 영국과는 매우 상이한 정치적 사회적 결과를 가져왔다.
3. 계급관계와 절대왕정
17세기 왕정 하에서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이미 그과 같은 역할을 완수한 영국의 부르주아지와 달리 프랑스의 농촌 지역을 아직 보이지 않는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근대화의 선봉 위치에 서지는 못했다. 그 대신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국왕의 보호를 크게 받고 있었으며 왕실의 규칙을 지키고 단제 제한된 고객을 위해서 사치품과 무기를 생산했다. 고도의 통제와 고도의 기술, 특히 무기 제조 기술이 대단히 발전된 것만 제외하면 당시의 상황은 같은 시대의 영국보다는 오히려 일본 후기 도쿠가와 시대나 심지어 악바르 시대의 인도의 경우와 대단히 비슷했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근대 사회의 기반을 이룩하게 되는 추진력, 즉 통합된 국가와 정확, 복종의 관습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왕실 관료체제에서 연원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의 왕실행정 집행은 러시아의 차르 전제 정치와 인도의 무굴왕조, 중국의 청조에서 행쟁체제처럼 농업 관료를 괴롭히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전 산업사회에서는 관료들을 왕권에 실질적으로 종속하도록 보장하는 충분한 급료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잉여가치를 산출하거나 추출할 수 없었다...프랑스 군주는 이와 같은 문제는 관직 매매에 의해 해결할 것을 시도했다. 관직 매매가 왕실 관료 전체에 침투했던 방식과 프랑스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방법은 프랑스와 다른 국가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오랫동안 관직 매매는 긍정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관직 매매에 의해 부르주아지가 왕실 행정 집행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경우에는 부르주아지는 단결이 가능했다. 아마도 당시 프랑스적인 상황으로는 그 것이 왕권을 창출하는 불가피한 제도일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구귀족을 밀어내고, 근대 국가의 기초 건설을 위한 봉건 장벽을 건설하는데 불가피한 제도였다. 특히 국왕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국왕 자신의 중요한 세입원이 되었으며, 동시에 값싸게 행정을 집행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엇다.
관직 매매는 사실상 관직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되는 개인적인 재산의 형태로 그 모습이 변했다. 따라서 국왕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통제하는 힘을 점점 상실하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이런 상황에 맞서서 국왕들은 새로운 관료, 즉 다른 관료의 행위를 감시하는 지사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직책도 곧 간접적으로 사고파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최초에는 관직 매입에 의한 귀족 지위는 매입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세습적이 것이 되었다...재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욕구는 왕실 관료체제를 통해 상당할 정도로 충족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얻으려 했던 부르주아지의 욕구는 부르주아지가 귀족이 됨으로써 점점 둔화되고 말았다.
프랑스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미 그 체제는 내재적 모순과 역설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일 관직 매매와 같은 방법이 없었다면 태양왕 루이 14세조차 아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함으로써 국민의 동의를 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관직매매는 국왕이 귀족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에 서있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었으며 의회의 어떤 실제적인 통제도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왕권 신장의 초기 단계에서 관직 매매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봉선 제도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던 국왕의 지지 세력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이런 제도의 지속적인 유지 역시 점차 부르주아지에게 봉건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되었음이 드러났다...평민 출신의 부르주아지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해서 그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게 함으로써, 관직 매매는 그들에게 외부 영향력의 배제, 집단 의식, 공동체적 일체감 같은 것을 조성시키게 되었다. 관직 보유자들은 왕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 지방의 이익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하게 옹호하게 되었다.
프랑스 사회는 영국과 같은 방법으로 도시의 부르주아적 사고를 가진 지주들로 이뤄진 의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낮았다. 왕정의 성장은 상층 지주 계급의 정치적인 책임감을 박탈하였으며, 부르주아지의 추진력을 그 자신의 이익 추구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었다...분명히 왕이 어떤 능동적인 정책을 추구했다면 그는 지배의 효율적인 기구로 쇄신된 관료 제도를 다시 창설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관직 매매와 재판관직 매매와 같은 제도의 폐지를 의미하며 보다 공평하게 부담을 분배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세입을 징수하기 위한 세제의 개혁을 의미한다. 그런 개혁은 최소한 당분간은 전쟁이나 사치를 위한 값비싼 정책의 감소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18세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독립적인 활력의 조짐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상업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여전히 존재하던 교역에 대한 내부 장벽이 제거되어야했고, 법 체계가 상당히 근대화 되어야 했을 것이다. 콜베르에서 튀르고에 이르는 탁월한 정치가들이 바로 이와 같은 계획의 대부분을 실현시키려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 지배체제는 이런 개혁에 실패했다.)
아마도 프랑스는 독일이나 일본이 나아갔던 것과 같은 보수적인 근대화의 길을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전체적인 설명에서 점차 드러나게 되는 이유들로 인해 프랑스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그 장애는 보다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군주정치는 일관성있는 정책을 추구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데에는 농업 문제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귀족의 공격과 절대 체제의 붕괴
18세기 후반기의 상황은 상업적, 자본주의적 관행이 봉건주의적 방법을 통해 농업에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보다 더 광범위하게 되었다. 이런 침투에 의해 발생한 한 형태는 이미 거부된 바 있었던 봉건적 권리와 부과조의 부활이었다.
절대 군주제도와 결부되었던 봉건 제도들은 정치 기구를 구성하였으며 이 기구를 통해 프랑스의 토지귀족들은 농민들로부터 경제 잉여를 착취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기구가 없었다면 농촌 지역에서의 경제 제도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공고한 특권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프랑스의 귀족과 영국의 상층 지주 계급을 구분하는 본질적인 특징이었다. 영국의 지주계급은 농민들의 잉여 착취 방법이 프랑스의 귀족들과 완전히 달랐다. 바로 이런 점에서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적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단순한 논리가 사람들을 혼란으로 이끌 수 있다. 정치 기구가 오히려 결정적인 것이었으며, 대혁명 시기의 농민들은 그들을 압제해왔던 이런 장치들을 무너뜨리려고 공격했을 때 가장 본질적인 정치적 본능을 나타냈다.
자본주의는 틈만 있으면 프랑스의 농촌 지방으로 스며들었는데 그것은 때로는 영주의 반동을 통한 봉건주의의 형태로, 때로는 봉건주의에 대한 공격의 형태로 또는 공식적으로 지지되던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진보와 이성의 깃발 하에 스며들기 시작했다...비록 한정적인 자본주의적 침투가 18세기 동안 농업을 혁명화하는 데 실패했고, 농민들을 봉건 체제에서 분리시키는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그 것은 분명히 농민들에게 구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적대감을 증대시켰다. 농민들은 그 당시 교묘한 법률가들이 만들어 놓은 봉건 부과조의 증가와 이미 사멸된 형태의 봉건 부과조의 부활에 분노했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인클로저에 대한 정부의 농간이 농민들로 하여금 군주에 대항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1789년 꼬뮌의 많은 책자들은 열정적으로 구질서의 회복을 주장했고, 인클로저 칙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움직임은 제 3신분을 뭉치게 만들었고, 많은 농민과 도시 거주민들의 한 분파가 구체제의 질서에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루이 16세 하에서 국왕의 사법기구는 부유한 평민들을 기존 지배 체제 속으로 흡수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기존 지배 체제는 개혁을 반대했던 핵심이었다...다수의 부르주아지가 귀족 계층으로 흡수된 이런 사실은 지금까지 프랑스대혁명을 설명해온 일반적인 논리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상승적 이동과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융해를 둘러싼 전반적 상황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융해 현상이 대부분 국왕의 영향력을 벗어나 행해졌으며, 오히려 국왕에게 대항해 발생했다. 인클로저 운동을 전개했던 지주들은 그들의 휘하에 있었던 농민들의 문제에 대해 국왕이 관여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부유한 도시인들도 왕실이 몇몇 특정 업종에서 기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의 중요한 이들 계급들은 사멸된 봉건체제나 절대왕정 체제로부터 어떤 정치적 무기를 지원 받을 필요도 없었고, 또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프랑스의 경우 군주 체제는 평민들을 토지귀족으로 전환시켜 봉건 제도의 옹호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므로 군주 체제는 그들로 하여금 특권의 강고한 옹호자가 되게했고, 개혁에 대한 그 체제 자체의 노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방법은 결국 구질서에 동화되지 못한 부르주아지들을 적대세력으로 만들었다.
18세기 후반기 동안 이런 구질서에 동화되지 못한 부르주아지들은 점점 더 강력해졌다...상업과 그보다는 정도가 낮았지만 공업은 그때까지 교역과 생산에 부과되었던 제약을 파괴하려는 욕구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시켰다. 튀르고가 바로 이런 세력의 대변자로서 봉사했다. 그는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명된 전제주의의 산업과 농업에서의 생산과 교역의 자유를 신봉했다. 튀르고의 개혁안은...과세 제도의 개혁, 농작물의 자유거래, 부역과 길드에 대한 제재, 노동자들의 직업 선택 자유 등이 그 속에 포함되었다.
튀르고 정책은 농작물의 자유거래로 일어난 물가 폭등에 의해 식료품 소비자들을 적대감에 가득차게 했다. 소요가 전국으로 확산했다...옛날식의 통제 경제, 즉 생산의 증가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국왕의 자비로운 권위가 가난한 사람에게 필수품의 공정 분배를 보장하는 경제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가 있었다. 하층 농민과 도시의 서민, 곧 유명한 상퀼로트를 기반으로 한 이런 감정이 대혁명 그 자체에 급진적인 조처를 부여하게 된 주요 원천이었다. 그 밖에도 튀르고의 정책 제안은 관료 제도의 부패로부터 이익을 취했던 금용가와 제조업자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국내 산업, 특히 제철, 면직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고, 또 산업에 필수적인 천연자원의 수출을 금지하는 것에 튀르고가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제조업자들은 분노했다.
튀르고에 반대해 결속한 이익집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준다. 즉, 봉건 제도의 수명이 다해가는 족쇄를 파괴하고 사유재산 및 자유경쟁과 유사한 그 무엇을 수립하려고 노력했던 세력이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의 지배적인 세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이 18세기 대부분의 기간을 통해 강해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점은 사실이었다. 이런 단순한 의미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는 종종 봉건주의적 가면을 쓴 채 나타났으며, 이런 현상은 농촌에서 특히 심했다. 관직매매나 영주들의 반동이 보여준 바, 지배적 제도 내에서 토지 소유권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강했다.
...자본주의는 구체제에 침투해 농민 뿐 아니라 특권 계급의 중요한 계층들까지도 왕정에 적대하는 방향으로 구체제를 혼란시켜서 왕정에 등을 돌리게 했다.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상퀼로트와 농민들에게 기반을 두었던 대혁명 배후의 급진적인 추진력이 강력한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부유한 농민층은 이런 급진적인 반자본주주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구체제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운 사유재산권을 추구하던 배후 세력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중요한 승리를 얻었다. 이런 승리를 얻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들의 가장 강력한 적들로부터의 도움까지도 필요로 했지만 말이다.
5. 대혁명 시기의 농민들과 급진주의의 관계
(대혁명 이전 프랑스는) 영국과 같은 상업혁명도 없었고, 프러시아와 러시아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일어났던 봉건적 반동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많은 프랑스 농민들은 소토지 소유자들이 되었다...보유토지가 부족하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의 수가 (대혁명 전) 2세기 동안 꾸준히 늘어났다는 것이다.
...오랜 촌락 사회가 근대화의 동력에 따라 분해됨에 따라 프랑스의 빈농은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주된 희생자가 되었다...빈농들이 처한 상황은 그들 대다수를 격렬한 평등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빈농들에게 있어, 근대화란 부농들이 대혁명 기간의 몰수 토지는 물론 토지 분할에서 빈농들을 축출하는 것이었으며, 토지의 근대적 사적 소유를 추진하는 일환으로 그들의 이삭줍기와 방목권을 규제해 결국 굶주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대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도시와 농촌의 급진주의 세력들은 손을 잡았으며, 이런 사실은 영국 혁명과 비교해 프랑스 혁명에서 폭력과 격렬함이 일층 더 심각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농민 혁명은 단일하게 일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도시와 수도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과 때로는 합류했고, 때로는 대적했다. ...1789년 까지도 농민들이 적극적인 혁명 세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심한 충격이 있어야 했다. 이 충격은 머지 않아 도래했다. 그 충격의 하나를 유발한 것은 삼부회를 전후한 귀족의 행동과 국왕의 우유부단한 태도였다.
...보수 세력이 대혁명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할 때마다 아래로부터 급진주의의 공세가 이 혁명을 거세게 밀고 나갔다 3대 민중 봉기, 즉 유명한 3대 투쟁일은 일련의 좌경 사태를 특징짓는 사건이었다...각 봉기의 주요한 추진 세력은 파리의 상퀼로트였다. 각 봉기는 그것이 농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한도 내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런 지지가 고갈되거나 상퀼로트의 요구와 토지 소유 농민의 요구가 서로 갈등하게 될 때에는 급진적 혁명을 이끄는 추진력은 감소되었고 도시의 잔여 세력은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농민이 대혁명의 주된 추진 세력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것의 조정자라고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나아가 농민은 혁명의 주된 추진 세력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매우 중요한 세력이었음, 돌이켜볼 때 혁명의 가장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성과라 할 수 있는 봉건 제도의 해체에 깊이 간여한 세력이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급진주의 혁명의 지원이 필요했다. 이 두 혁명은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움직였고 서로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두 혁명은 소유에 대한 태도의 대립 때문에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다. 이 것은 재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양립 불가능성이었다. 급진주의의 흐름이 분열하게 되고 유산계급에게 더이상 급진주의 혁명의 도움이 필요없게 될 때 대혁명은 정지될 수 밖에 없었다.
대혁명의 급진주의적 국면은 많은 지역의 경우, 비록 짧고 일관성이 없었지만, 유산 농민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가장 나빴던 것은 도시민이나 외부인이 농촌 지역에서 공물을 징발하는 일을 맡았던 것인데, 그들은 예전의 국왕의 행정관리나 징세청부업자들보다도 무자비한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혁명 군대의 지원까지 받았다.
혁명의 급진주의적 국면에서 분명하고 결정적인 사실은 이렇다. 도시의 상퀼로트는 자코뱅 지도자들로 하여금 혁명 수호의 정책을 추진하도록 밀어부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농민은 혁명을 이반하게 되었다...대혁명의 급진적인 국면에서 도시의 상퀼로트의 요구와 열망은 농촌 지역 대다수의 주민들과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인 갈등을 보이게 되었다. 이 갈등의 뚜렷한 징후는 도농간 교류의 악화, 특히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의 악화였는데, 이는 나중에 러시아 혁명에서도 혁명의 진로와 귀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된다. 1793년말에서 1794년 초의 겨울에 파리의 상퀼로트의 경제 상황은 극심하게 악화되었는데, 이런 상황은 상퀼로트 조직이 농촌 지역에 다니면서 약탈 행위를 자행한 것에 분노한 농민들이 농산품의 공급을 점점 줄인데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고 그나마의 경제 통제력이 와해된 이후 파리 빈민의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된 상태였다. 그들의 이런 상황은 1795년 봄 폭동으로 나타났다....폭도들은 국민 공회 회의장에 난입했으며, 공회 의원 한 사람을 살해해 그의 머리를 창에 꽂고 다녔다. 그러나 이런 민중의 혁명적 열기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다. 농촌 민중은 파리 민중과 공동 보조를 거부했다. 또한 혁명 정부도 급진주의 세력에 양보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국왕은 전혀 영향권 밖에 놓여있었으며, 귀족들도 역시 같은 형편이었고, 혁명 군대는 전선에서 승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질서와 재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상퀼로트의 최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군대가 민중의 반란에 적대적으로 움직였다. 뒤이은 탄압은 백색테러의 막을 열었다. 도시민들이 아무리 급진적이었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의 도움이 없는 한 아무 것도 이룩할 수 없었다.
6. 대혁명에 저항했던 농민: 방데의 농민
반혁명이 일어났던 방데 지역의 주도적인 농민들이 사적 토지 소유의 주요한 혜택을 이미 향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혁명이 도래할 때 그것을 좌경으로 몰고 나갈만한, 토지에 굶주린 준프롤레타리아트적 농업 노동자가 이 지역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혁명에서도 반혁명이나 내란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때껏 알아오고 받아들여온 세계와 돌이킬 수 없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결정적인 시점이 도래한다. 어떠한 계급이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기존 제도가 붕괴되어 가는 순간순간마다 놀라운 새로운 진실을 연속적으로 느끼게 된다. 또한 유니크한 순간 혹은 결단이 있으니, 즉 왕궁을 습격한다든지 국왕을 교수형에 처한다든지, 역으로 혁명적 독재자를 전복한다든지, 그런 일들이 한번 일어난 후에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런 행동을 통해 새로운 위법행위가 새로운 합법성의 기반이 된다. 인구의 거대한 층이 사회 질서의 일부가 된다. 방데의 반혁명은 이런 모습들을 다른 격렬한 사회 변혁과 공유한다.
7. 혁명적 공포 정치의 사회적 결과
공포정치가 효과적인 정책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즉 의미있는 정치적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대중의 추진력을 어느 정도 합리적이며, 중앙집중화된 통제 하에 놓아둘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추진력은 주로 상퀼로트로부터 나왔다. 기요틴 처형제를 요구했던 주장 속에는 처음부터 순수한 분노 이상의 어떤 것이 포함돼 있었다. 그 것은 유례없는 참상을 낳은 시장 기능에 대한 항의였으며, 부유한 투기꾼들에게 그들이 삼킨 축재물을 토해내게 강요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급진주의 혁명은 그 본질에서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었기에 사유재산 제도와 인권을 위한 혁명에서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었다. 상퀼로트 혁명의 반자본주의적 요소와 빈농들의 저항은 구체제의 후반기와 대혁명 기간 동안 자본주의의 특징이 점진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생긴 고통에 대한 반응이었다. 급진주의자들을 극단주의 도당으로 치부하는 것,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파생된 기형적 돌출물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코 앞에 두고도 회피하는 것이다. 급진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급진주의자들의 압력이 없었으면 부르주아 혁명이 그렇게 깊숙이 진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귀족적인 특권의 얽히고섥힌 연관 체계 전체, 즉 국와과 토지귀족, 봉건 영주의 권리 등 구체제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던 복합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런 타격은 사유재산과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졌다. 대혁명이 가장 우선시한 추구 대상이자 또 그것이 남긴 주된 결과가 부르주아적이며, 자본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강변이다...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모든 세력이 궁극적으로 성취했던 결과는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 앞의 평등에 기초한 정치 제도와, 사유재산 제도에 기초한 경제제도의 승리였다는 것, 그리고 대혁명은 그런 전반적인 발전에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낯익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의 관점에서 볼 때 토지 귀족의 정치 권력이 거세된 것은 프랑스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중대한 계기였다...절대왕정 체제는 그 당시 독자적인 경제 기반의 구축에 어려움을 겪던 귀족들을 회유하기도 했고, 통제하기도 했다. 혁명은 바로 부르봉 왕조의 이런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는 토크빌이 오래 전 지적한 대로다. 그 결과는 산업화의 진전이 가져온 충격 하에 파시즘으로 치닫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 우익권위주의 정부의 사회적 기반 중 핵심-토지귀족-이 프랑스에서 파괴된 것이었다. 이런 광의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 이전의 면모를 벗은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대신하는 부분적 대응물로서, 또는 역사적인 대안으로서의 성격을 띈다. 부르주아 혁명의 추진력이 미약했거나 그 것이 유산된 곳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른 국가의 경우 파시즘이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였다. 이런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적 귀결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 토지 귀족의 근대로의 이월을 막아버림으로써(그것도 18세기 후반에)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따라서 토지 귀족의 처리라는 면에서 프랑스 혁명은 긍정적 기여를, 그것도 결정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지 귀족을 무너뜨렸던 바로 그 변혁 과정은 또한 소농을 기초로 한 토지 소유를 창출했다. 바로 이런 면에서 그 결과는 한층 이중적이다...대혁명의 급진적 국면에서 행해진 곡물의 강제 징발이라든가 곡물 가격의 최고 가격제 실시라든가, 농업 노동자나 소토지 보유농의 보호 조치는 상층 농민을 결정적으로 공화정에 반대하게 만들었다. 이 것은 오랫동안 공화정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첫째, 영향력있는 농민들은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재산과 마을에서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기를 원했다. 구체적으로 이런 요구는 국유재산의 매각을 통해 확보된 토지 소유를 귀족의 도전이나 토지 재분배를 내포하는 어떤 급진적인 사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둘째, 자본주의 공업의 지속적인 발전은 소농적 토지 소유를 위협하는 경향이 있으며, 소농들은 시장 생산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농민의 대변자들은 농산물의 거래 조건이 농민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종종 불평했다. 이런 이유들이 복합된 결과 소농에 기초한 토지소유는 이중적 결과를 낳았다. 즉 소농적 토지 소유는 한편에서 대토지 소유-자본주의적 형태건 전자본주의적 인 귀족적 형태건 간에-에 대한 위협으로, 또 한편에서는 그런 대토지 소유를 보호하는 외벽으로 나타났다. 20세기에 이런 이중성은 농민들이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데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8. 요약
프랑스 사회는 영국처럼 부르주아 색채를 띈 지주들의 의회를 창설하지 않았으며 아마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혁명 이전 프랑스의 사회 추세는 상층계급으로 하여금 자유 민주주의의 우호적 안내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적이 되게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려면 어떤 제도들이 떨어져 나가야 했다.
절대왕정이라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상층 지주 계급은 농민들에게 지우는 부담을 늘림으로써 자본주의의 점진적 침투에 적응했고, 한편으로는 농민들로 하여금 사실상의 토지 소유에 근접하게 했다.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의 근대화는 왕을 통해 이뤄졌다. 이런 과정의 일환으로 영국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융합이 이뤄졌다. 이런 융합은 국왕에 대한 대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왕을 통해 이뤄졌으며, 다소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 유용한 약어를 쓰자면, 상당수의 부르주아지의 봉건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는데...이 사태는 결국 국왕의 행동 반경을 심하게 제한했으며 사회의 어떤 계층이 어떤 부담을 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도 제약이 따르게 되었다. 국왕에 대한 이런 제약에 루이 16세의 성격적인 결함이 겹친 것이 내 생각에는 계급이나 집단간의 어떤 특별한 심각한 이해 갈등 보다도 프랑스 혁명을 불러 일으킨 중요한 요인이다. 만일 대혁명이 없었다면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융합은 그대로 지속되었을 것이며, 그 연합 세력은 프랑스를 위로부터의 보수적 근대화라는 방향으로 끌고 나갔을 텐데, 이런 방향은 그 골격이 독일과 일본에서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았다. 대혁명은 이미 경제력의 지배적 우위를 차지한 부르주아지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아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 내부에서도 이렇게 변신해가는 집단이 있었지만, 절대 왕정의 이전 역사는 부르주아지가 제 힘으로 많은 것을 성취할만큼 강해지는 것을 억제했다. 오히려 일단의 부르주아지는 신분제와 군주제의 붕괴로 터져나온 도시 민중의 급진주의 운동에 편승해 권좌에 오르기도 했다. (혁명 보수파를 가리키는 말인 듯)
이 급진주의 세력은 혁명이 후퇴하거나 이 일단의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한 시점에서 혁명이 멈추는 것을 막았다. 한편 농민들은, 이 시점에서는 그 중에서도 주로 상층 농민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용해 대혁명의 주된 성과인 영주 제도의 해체를 밀고 나갔다. 한동안 농촌과 도시의 급진주의는 다 같이 소규모의 재산제와 복고적인 집산주의라는 모순된 지향이 뒤섞인 가운데 공동전선을 펼 수 있었는데, 이 공동전선은 대혁명이 가장 급진적 국면에 이르는 동안, 그리고 그 국면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과 혁명군대는 식량 공급의 필요상 부농들의 이익과 대립관계에 서게 되었다.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파리의 상퀼로트에게 가는 식량공급이 끊어졌고, 이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앗아가 결국 급진주의 혁명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로 이어졌다. 상퀼로트가 부르주아 혁명을 만들었고, 농민들이 그 혁명이 어디까지 진전될 것인가를 결정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