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일요일

근대 유럽:AD1648~1914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프랑스 혁명 전까지 유럽의 체제를 '앙시앙 레짐'이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절대군주제와 복잡한 국제정치, 제한전, 중상주의 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맥닐은 종교전쟁이 대륙을 휩쓴 후 다원주의 문화가 뿌리내린 것을 이 시기 유럽의 큰 특징으로 본다.

앙시앙레짐 시기 유럽 정치의 중심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앙리 4세가 국내의 종교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해 루이 14세에 이르러 국력의 절정에 이른다.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 체제와 상비군이 자리잡았고, 법치주의도 서서히 확대됐다.

대륙의 중심 조류가 절대왕정이었다면, 영국은 명예혁명 후 지방주의에 근거한 의회제도가 자리잡았다. 의회는 내각과 국채라는 두 제도를 통해 국가 운영을 했다. 내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맞춰 탄력적인 국정운영을 가능케했고, 국채는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비용을 낮췄다.  이 것이 17세기 영국의 국력을 신장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는 민주혁명이 일어나 유럽에서 앙시앙레짐이 붕괴되고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산업혁명의 본질은 생산의 기계화, 임노동의 조직화, 대량 생산과 대량소비의 시작이다. 초기 산업혁명은 소수의 발명가들에 의한 기술혁신에 의존했다. 방직산업과 철도산업, 증기선 등이 산업혁명의 초기 국면을 이끌었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는 고도의 과학이론과 기술이 결한하는 대규모의 화학공업, 철강산업 등이 등장했다. 대학제도가 발달했던 독일이 이 시기에 급성장했다.

프랑스 민주혁명은 앙시앙레짐의 재정위기에서 시작했다. 부르봉왕조는 삼부회를 소집해 이 위기를 돌파하려했으나, 이 것이 자충수가 됐다.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제3신분은 신분제 등 현 체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했고, 혁명은 자체의 추진력을 얻어서 급진화했다. 결국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제국 체제가 들어섰다. 이후 19세기 내내 프랑스의 정치는 이런 혁명시기 등장한 패턴이 반복됐다.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은 진정한 세계규모의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전 유럽에서 혁명의 불길을 일으켰고, 산업혁명은 사회의 근본 구조를 바꾸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활상이 열악해진 노동계급의 불만은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수렴했다.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근대 유럽 : AD1500~1648


근대유럽의 시작을 1500년으로 잡는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해 유럽, 특히 서유럽 국가들의 해상팽창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4개국은 유럽을 기점으로 동서로 뻗어나갔다. 이미 문명이 자리잡은 인도양과 동아시아 지역은 주로 연안 지역의 도시를 기점으로 무역망을 건설했고, 문명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 쪽은 유럽의 침공으로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번성했던 잉카 문명은 유럽의 우수한 군사기술과 전염병균 때문에 궤멸됐다.

이런 해상을 통한 팽창은 유럽에 몇가지 변화를 불러왔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화는 한세기 넘게 지속된 인플레이션과 새로운 식용작물의 보급이었다. 신대륙에의 광산에서 유입된 은은 스페인을 통해 들어오면서 유럽 국가들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이런 인플레이션은 경제 성장을 도우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기존의 경제질서를 흔들고 혼란을 불렀다. 또 신세계의 작밀인 고구마, 감자, 옥수수는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인구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 신대륙에 널리 보급된 전염병균도 생태 질서를 교란한 큰 변화였다.

이와 동시에 유럽에서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봉건제의 토대였던 각 지방 귀족 중심의 질서가 중앙의 왕과 국가기구 중심의 질서로 재편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이었다.

국가 중심의 정치질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발달시킨 통치기술, 군사기술의 발달과 상업화, 종교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권위의 필요성과 교회재산 몰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정신적 질서를 끝장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개혁운동은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던 독일 지역에서 호응을 얻었고, 곧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신교는 특히 기존 카톨릭 세력과 지방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곳에서 융성했다. 저지대 국가들과 스위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이 그 좋은 예다. 카톨릭 세력과 지역 관계아 대체로 일치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카톨릭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신/구교의 대립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이어져 온 독일을 황폐화시킨 후 끝났다. 대체로 이 시기부터 유럽의 근대국제정치 질서가 새로운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참고글: 플라톤의 <국가>에 관하여


1.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 중심 주제는 올바른 삶에 대한 것이다. 개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논하는 데, 왜 뜬금없이 국가의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가 나오는가? 그 것은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폴리스에서의 삶은 공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이 나뉘지 않았다. 개개인의 삶은 폴리스의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삶이란 말 그대로 폴리스적 삶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의 아테네는 망해가고 있는 폴리스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델로스 동맹을 이끌며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이자 시민 개개인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 민주정이 어우러진 황금 시대의 아테네는, 이제 금권정치와 온갖 매관매직이 판치는 통치의 난맥상, 극심한 혼란과 이전투구 등으로 혼탁해져 있었다. 동족끼리의 내전이나 다를 바 없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직접 전쟁에 참여한 아테네 시민들의 정신마저 황폐하게 만들었다. 황금시기의 아테네를 지탱해주던 모든 자긍심과 가치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 것이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간단한 배경이다. <국가>를 읽을 때는 이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 골방에 처박혀 자신의 머릿 속에서 환상과 백일몽을 통해 그저 자기만족 차원에서 이상국가를 그려본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살고있던 사회가 좀 더 올바른 사회가 되길 바랬고, 그런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2.
<국가>에서 논하는 올바른 삶이란 일단 올바른 국가(폴리스)의 정립에 기초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 삶이란 폴리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폴리스는 어떤 국가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국가의 구성원들 각자가 그 타고난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나라였다. 플라톤은 사람의 본성을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욕구에 충실한 부류, 명예를 추구하는 부류,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 셋 가운데 플라톤이 가장 하찮게 본 것은 욕구에 충실한 본성이었다. 플라톤은 이들에게는 국가의 모든 치부는 맡겨두되, 절대 통치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욕구에 충실한 이들이 통치를 하게되면 정체는 필연적으로 우매하고 부패한 금권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수호자 계급은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만이 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라 폴리스를 다스릴 수 있었다. 법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지혜는 오직 소수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소수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철학자 왕이다.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는 바로 이런 철학자왕이 다스릴 때에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보았다.

3.
<국가>의 전반부인 1-4권은 이런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면, 후반부인 5-7권은 철학자왕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와 좋음의 이데아론도 7권에 나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철학자왕들은 궁극의 실재이자 모든 실재하는 대상의 근원으로서 이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그가 살아가는 국가가 욕망의 충족이나 명예의 추구에 기반하기 보다는, 그와 같은 궁극적인 선에 기초하길 원했다. 따지고 보면 부유한 나라도, 강대한 나라도 아닌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던 김구의 말과 비슷하다. 김구가 플라톤을 알았던 걸까.

4.   
플라톤의 철학자왕은 민주정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본디 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의 품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체제이다. 민주정 자체가 붕괴하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이 그 체제를 좋게 보았을리가 만무하다.

간단히 말하면, 민주정은 참정권을 갖는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자유가 모든 이들이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평등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플라톤은 자유와 평등 둘 다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면밀히 관찰한 끝에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던 듯 싶고, 그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모든 인간이 철학적 활동을 통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 낙관한 반면, 플라톤은 소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무엇보다 그가 사랑한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 믿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의 비극은 궁극적인 선에 기초한 올바른 국가는 독재자에 의해 다스려지고 다른 모든 신민들은 그 독재자만을 우러러볼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5.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던 당시의 국가정체였던 폴리스는 이제 온데간데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국가는 플라톤이 생각한 국가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플라톤의 철학자왕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근대국가의 여기저기에서 어슬렁거리지만, 플라톤이 말한 바 그대로 철학자왕은 존재할 수 없다. 근대국가는 어디까지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통치의 제일 임무라는 로크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올바른 국가는 궁극의 지혜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에 기초한 것이지만, 근대국가는 먹고사는 문제에 그 사활을 건다.  

6.
결국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 것은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 소득없이 끝날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결국 인간의 영혼에 관한 책이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국가>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플라톤이 올바른 국가에 대해 말한 것은 결국 올바른 삶에 관해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우리 스스로의 영혼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부를 추구하는 욕구, 명예를 추구하는 용기,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 플라톤은 우리 스스로가 욕구를 절제하고 용기를 다스려 그 둘을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의 지배 아래 둘 때, 그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막상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국가>에서 말하는 올바른 삶도 막연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사람만이 오직 영혼을 가졌으며 그 영혼만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다. 영혼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도 하고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결국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길은 오직 올바르게 사는 길 뿐이었다. 그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인지는 다른 문제지만.

참고글:고대 그리스 철학과 정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 생각할 때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들의 철학이 일종의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제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또는 플라톤)이 경건함(또는 신에 대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큰 범죄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였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도 결국 불경죄로 고발당해 죽었다.) 이 불경죄라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것이라 보면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이 국가의 근간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묻는다. 불경죄로 고발당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도대체 그 불경함이란 무엇에 대한 불경함인가. 경건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이 순수하게 사변적이라 볼 수는 없다.

당시 아테네에서 불경죄는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법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장 한복판에서(아테네의 시장은 아고라였다. 아테네의 정치는 아고라에서 이뤄졌다.) 경건함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국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될 수 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은 아테네의 혼란기에 나온 것이다. 그들이 살던 당시의 아테네는 그 자체로 쇠퇴해가는 사회였다. 결정적인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20여년간 지속된 이 동족 간의 내전이 아테네 시민들의 내면에 남긴 상처를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전쟁이 어떻게 벌여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감이 올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철학자 박홍규 선생 강의록의 인용이다.

"그러면 희랍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하고 도대체 어떻게 싸웠냐? 대포를 쏜 것이 아니거든. 페르시아 사람들은 말 타고 활 들고, 갑옷을 입었어. 말 앞에도 말이 안전하라고 갑오 같은 것을 해놨어. 그리고 활 들고, 칼 들고 어떤 사람은 창 들었어. 그리고 희랍 사람들은 헬멧 쓰고, 창 들고, 방패 들고, 에워싸서 육박전으로 싸우는 거야.

또 이런 말이 있어. 일본 군인들이 잔인해서 일본도라는 것이 있어. 그래서 사람의 목을 베야 군인이 된다는 거야. 장교들은 사람 목을 한 번씩 베어야 돼. 그런데 일본서 연습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중국 가서 중국 사람을 데려다 놓고 연습을 했어. 그 사진 하나가 <아사히신문>에 났어. 중국 사람이 머리를 떨구고 않아 있고 위에서 칼로 내려치려고 해. 또 일본 놈들이 옆에서 웃고 있어. 맥아더가 그 사진을 보고 이놈들은 모두 잡아서 집어넣으라고 했거든. 대학에 군사훈련을 맡은 장교가, 우리계급으로는 대령이고 일본 계급은 대좌지.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 칼이라는 게 아주 무서워, 보기만 해도 섬뜩해. 기술적으로 잘 쳐야 한 번에 베지, 그게 잘 안 된다는 거야. 목에서 피가 막 나고 난잡하대. 그 잔인한 일본 사람도 그걸 한번 죽이고 나면 저녁에 잠을 못 잔대. 일본 사람도 다정다감하거든.

희랍 사람들이 어떻게 죽였냐 하면, 육박전에서 상대방을 창으로 찌르고, 상대방은 안 죽으려고 활로 쏘고, 칼로 치고 그러거든. 그것이 한 번에 되냔 말이야. 갑옷을 입고 있는데. 어디 목을 찌르거나, 정강이를 지르거나. 몇 번을 찔러도 잘 안 돼. 그러니까 그건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육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야. 그렇게 죽이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되겠는지를 한번 생각을 해봐. 그 당시에 희랍 사람들은 벌써 야만인이 아니거든. 야만인은 그렇게 하고도 무감각해. 로마 사람들은 경기장에 노예를 집어넣고 좋아라 하고 무감감하거든. 희랍 사람들은 다정다감한 사람들 아냐? 비극 같은 것도 나오고, 산문도 쓰고. 그러고 난 후의 정신 상태(mentality)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

 - 박홍규, 박홍규 전집 2 - 플라톤과 전쟁

이처럼 10년 간의 살육을 겪고 돌아온 시민들의 내면 상태가 멀쩡했을리 만무하다. 그런 사회에서 거침없는 강자의 논리, 즉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도 쉬이 납득이 간다. 플라톤의 <국가>편의 1장은 바로 그런 논리, 살아남은 자, 강자의 이득이 올바른 것이라는 논리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국가의 개혁을 다루는 책이 그 같은 기존 논리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테네 사회가 강자가 정의라는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황폐한 아테네 시민들을 상대로 경건함에 대해, 올바름에 대해, 사랑에 대해 묻고 다닌다는 것은 그런 황폐화되어 가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고 쇠퇴해가는 자신의 공동체를 다시 바른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테네의 정치는 직접 민주주의 정치였다.

여기서 직접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은 모든 시민이 직접 국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테네의 민주정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확률적으로 주요 공직 진출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다. 아테네는 주기적인 추첨 제도로 공직자를 충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정치적 기획인 이유가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에 있다. 누구나 국가의 중요한 공직에 참여하는 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 모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시민이 철인이 될 수 있다고 본 반면, 플라톤은 그보더 좀 더 후퇴해서 철인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철학이 사람들에게 교육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공통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철학적 사유가 곧바로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가능한 폴리스의 민주정에서 가능하고 또 의미있는 일이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그 같은 폴리스 사회는 붕괴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대제국과 로마 제국이 폴리스와 헬라스 세계를 대체했다. 시민이 신민이 되면서 철학은 더이상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없었다.

정치는 황제와 그를 둘러싼 소수의 귀족들의 문제가 되었다. 신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통치자들이 그들을 언제 전쟁에 징발하는가, 얼마나 무거운 세부담을 물리는가의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신민들에게 있어 정치적인 문제는 그와 같은 것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요컨대 개인의 삶이 공동체의 운영, 즉 정치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는 것, 제국의 신민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의미했다. 제국에 이르러 개인의 철학적 각성은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적인 삶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절대 군주제와 거대하고 폐쇄적인 국가기구가 정치를 독점해 개인의 철학적 각성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제국의 정치판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제국의 신민들은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들어가 내면을  파고들거나, 스토아 현인들처럼 명상을 통해 세계를 초월한 우주의 원리를 관조하거나, 에피쿠로스처럼 집 안의 정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쾌락을 좇았다. 이 세가지 철학적 태도 모두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의 삶에 대한 문제나 공동체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것만을 관심사에 두었다. 그렇게 개인의 삶에서 정치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이슬람의 발흥과 그 영향

서기 7세기 아랍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은 빠른 속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종교적 열광을 바탕으로 한 아랍 전사들은 아랍반도를 비롯,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이란 지역을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1000년 넘게 이어온 페르시아 문명이 이슬람에 흡수됐다.

부족 중심의 초기 이슬람은 정복이 진행되면서 제국이 됐고, 그에 따른 변질이 불가피했다. 이슬람의 이상은 종교와 정치 양 측면에서 두루 권위를 가진 칼리프의 지도 아래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제국이 되면서 정치와 종교는 불가피하게 나뉘었다. 칼리프는 정치적 측면의 지도자로서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인 관료제와 우편, 세금 제도 등을 물려받아 통치했다. 군사는 주로 투르크인 용병을 쓰게 됐다. 이후 이슬람 제국의 정치는 이 투르크용병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이슬람인들의 일상적인 종교생활은 울라마라는 신학자 집단의 권위와 지도 아래로 들어갔다. 이 신학자들은 마호메트의 계시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지도하는 세세한 율법과 경전을 만들었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것에 반대한 근본주의자들은 시아파로 분리되면서 이슬람의 초기 분열도 있었다.

이슬람의 급격한 교세 확장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티칸 제국은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 주변으로 세력이 위축됐다. 인도 북부도 이슬람의 침투로 힌두교 위주의 사회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은 피레네 산맥 이남의 스페인 지역이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 14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11세기를 전후해 투르크 용병들이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오스만투르크는 예니체리라는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상비군 집단을 주축으로 한 제국을 건설해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발칸지역까지 진출했다. 이후 지중해는 오스만투르크와 유럽 기독교 간의 각축장이 됐다.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장아영의 <역사> "그리스 짱! 헬레니즘" 편


장아영의 <역사>는 스승 권승준과의 대화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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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요미, 먼저 이야기 해봐.
- 응... (5분 정도 책 뒤적뒤적 뜸들이다) 그리스부터 시작인가? 그리스가 페르시아랑 싸우고 이겨. 그리고 제국처럼 됐다가 스파르타랑 한 판 붙고 좇돼.

= 아요미! 어디서 그런 나쁜 말을 배웠어. 일단 큰 흐름을 아는 게 중요해. 그리스 문명이 발전하고 그게 변질된 형태인 헬레니즘으로 전파가 되지. 헬레니즘이라는 말 뜻이 원래 그리스적인 거라는 거거든. 그리스는 영어식으로 부르는 거고, 원래 그리스인은 스스로 헬라스라고 불러. 그런데 헬레니즘에서의 그리스적이라는 건, 본질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야.

먼저 그리스의 개화기부터. 기원전 500년 즈음 폴리스 여러 개로 이뤄진 그리스를 정복하러 페르시아 제국이 쳐들어와. 근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쳐서 페르시아를 물리치지.
(이 때가 그리스의 최전성기이자, 민주주의가 가장 꽃 폈던 시기. 그동안 실질적인 정치 참여가 어려웠던 최하층민이 해상전투에서 중요한 역할- 노젓기-을 맡으면서 힘이 세지지. 진정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거지.)
여기서 자신을 얻은 아테네는 다른 도시에 힘을 뻗쳐. 제국 형태가 된 아테네와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 스파르타가 긴 싸움을 벌이는데 이게 펠레폰네소스 전쟁. 하지만 전쟁을 거치며 그리스의 본질이 많이 변하게 되지. 원래 그리스 시민들의 가장 큰 특징이 뭐야?
- 자기 폴리스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거
= 응,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 땅을 갖고 있는 농민이었지. 그래서 자기 땅을 자기가 지킨다는 게 컸어. 평소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중장보병이 된 거지. 무기도 다 자기가 만들어서 전쟁에 참가해. 그 사람들이 정치에도 참가를 했던 거고. 그런데 제국 형태가 되면서 어떻게 되지?
- 빈부 격차가 커져
= 시민들은 자기 땅을 지킬 사람으로 용병을 쓰게 되지. 그리고 점점 개인적인 사색이나 취미로 빠지지. 폴리스나 정치에 대한 사명감은 점점 줄어들고. 그렇게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거야. 그러다보니 처음의 그리스가 갖고 있던 특징들,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특징들이 많이 없어진 채로 다른 제국에 문명이 수출되는 거야.
- 소피스트 생각이 나네.
= 사실 소피스트가 당시 그리스 철학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지. 민주주의가 뭐야,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거잖아. 그런데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게 있다고 말하잖아.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도 들어있긴 하지만 <국가>는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이지. 어떻게 하면 국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가,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반대하잖아. 그럴 수밖에 없지. 자기 스승이 다수결 해서 독약 먹고 죽었으니까. 그런데 현대 우리한테 유명한 플라톤은 사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중심부 인물이 아니었어.
어찌 됐든 그리스 사상을 비롯한 문명은 마케도니아 제국이 땅을 넓히면서, 다른 지역으로 함께 퍼져나갔지. 그리스 이민자들도 늘어나게 됐고. 그리스 문명이 다른 문명의 기본이 됐다는 건 성경을 봐도 알 수가 있어. 아요미 성경이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고 있어?
- ...
= 성경은 기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고. 신약은 먼저 복음서 4개 (공감 복음 3개와 요한 복음), 사도행전 (사도들 고생하는 얘기), 그 다음은 다 편지야. 제일 영향력이 컸던 바오로가 로마에 보낸 게 로마전서, 고린도로 보낸 게 고린도서, 이런 식이야. 기독교를 믿는 집단이 여기저기 퍼져 살았는데 그 집단에 이럴 땐 이렇게 해라, 이건 이런 뜻이다, 그렇게 편지를 전달하는 거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태어난 분파 종교였다가 이렇게 바오로 같은 사람에 의해서 그리스적인 색채를 띠면서 세계종교로 발돋움을 하지. 유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거잖아.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고. 로마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을 채택할 때 얼마나 많은 파가 있었겠어. 그런데 그 중에 살아남는 게 지금의 성경이 된 거지.
- 삼위일체?
= 그리스 신화를 봐. 신이 인간의 특징을 다 갖고 있잖아. 그리스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가 신이자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야.
- 다른 것도 얘기해보자.
= 이 시대의 미스테리인 이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 왜 미스테리야?
= 다른 종교들은 서기로 넘어오면서 거의 체계가 잡히잖아. 그런데 그보다 5백년이나 지나서 만들어지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퍼졌다는 점에서 미스테리지. 이슬람은 정말 심플한 종교야. 마호메트 한 사람이 만들어서 체계가 있지. 이론상으로는 완전무결한 종교라는 평가가 있어.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의 신은 완전히 다른 신이야. 어떤 의미에서 완전히 구약과 신약은 전혀 다른 종교의 경전이야. 오랫동안 만들어져서 그런지 모순되는 말도 많고. 하지만 코란은 그렇지 않지.
- 또다른 이슬람의 특징이 뭐야? 신과 직접 만난다?
= 사제 집단이 있지. 울라마라고. 길거리에 앉아서 율법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들이지. 이슬람은 현실의 세세한 부분도 다 규정해놓는 종교거든. 결국 나중에 그게 발목을 잡지만.
- 그런데 다 정해놓고 있으니까 울라마의 역할도 다른 종교보다 더 적었겠네?
= 그렇겠지. 이슬람은 원래 종교와 정치를 칼리프가 모두 맡도록 돼 있었어. 그런데 그게 지켜진 건 우마미야 왕조 때까지였고 아바스 왕조가 되면서 종교는 전문가 집단에 맡기고 칼리프는 궁정 안으로 들어가버리지.
- 거기에 불만을 느낀 이상주의자들이 시아파고, 아바스 왕조를 따른 게 수니파고.
= 오늘날 이슬람은 대부분 수니파야. 시아파는 이란. 거긴 아직도 종교가 통일돼 있잖아.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는 그렇지 않지.
- 알리가 마호메트의 사촌이야? 친구야?
= 아마 사위인가 그럴거야. 마호메트가 후계자가 없었잖아. 그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시아파야. 이슬람은 따로 공부를 더 해야돼.
- 또?
= 맥닐은 전술이나 전쟁에 쓰인 도구를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 아닌 부분도 있지만 꽤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지. 처음 그리스 시대의 전술은 중장보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방패를 들고 운동 경기 같은 싸움을 하는 거였어. 아요미 300 봤어?
- 아니 못 봤어.
= 300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야. 엄청 몸이 좋은 남자들이 팬티만 입고 나오거든.
- 팬티만 입고 300명이 나와?
= 응, 다 엄청 몸이 좋은 남자들이야. 꼭 봐 아요미. 그런데 마케도니아로 넘어가면서 기병이 발달하지. 말을 타고 달리잖아. 알렉산더 대왕이 천재라고 하는 게, 그 시절에는 보병을 중간에 쫙 깔고 일렬로 가면 그 양 옆에 기병이 가는데 반대편에서 상대가 쳐들어오지, 그럼 일단 보병이 막아, 그러고 있는 사이에 기병이 옆으로 파고드는 거야. 근데 그 타이밍을 알렉산더가 기가 막히게 맞췄다는 거야. 또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변방과 문명, 변방의 유목민은 말을 타고 달려와서 늘 문명을 약탈하잖아. 그런데 중장기병이 발달하면서 그렇게 달려오는 애들을 무거운 도구와 활로 막아내잖아.
- 알팔파를 먹여서.
= 응 그걸 먹여서 말을 키우잖아. 그렇게 큰 말이 나타난 뒤에 중세에 들어서는 활이 아닌 창이 나타나지.
- 엄청 큰 쟁기도 나타나잖아.
= 그래, 볏쟁기라는 게 개발돼서 유럽 중부와 북부의 습기높은 흙을 거둬내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지.
- 거기서 말도 사용하고. 또 다른 건 없어?
= 아요미, 난 인도는 관심이 없어서 제꼈어. 우리 이제 이동할 시간이야. 영화 봐야지. 오늘 공부한 건 아요미가 정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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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얘기한 게 더 있었는데...
다 기억이 안나요미 ㅠㅠ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문명과 야만 / 도시와 종교

BC. 500 ~ AD. 1500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이 시대의 주요한 특징이다.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을 뚜껑을 꽉 닫지 않은 병 안에 떠다니는 미립자로 비유했는데, 문명의 어느 한 지역에서 이 유목민을 추방하거나, 혹은 자기들끼리의 영토 싸움에서 한 쪽이 지면 쫓겨난 유목민들이 다른 지역을 점령하거나 쫓겨가면서 다른 문명 세계에게 영향을 미치는 형국이다. 처음에는 문명의 변방이 이런 유목민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었지만 (중국은 전통으로 굳어진 이이제이로 효과적으로 포섭하거나 다스렸고) 기마 전술이 발전하면서 달라졌다. 스텝지대의 경무장 기마병의 빠름과 문명국의 중무장 기마병의 강함이 일종의 평행 상태를 유지했다. 문제는 이들 중무장 기마병을 관리하는 문명국 변방의 군사 조직을 중앙이 통제할 수 있느냐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강력한 봉건제의 카리스마로 이런 전사계급을 다스리는 전형을 창출해냈다.

문명이 변방으로 퍼져나가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특정 부족이나 도시, 국가만을 위한 종교가 아닌 보편적인 종교의 확산이다. 뿌리가 없는 도시인에게는 생활의 중심과 의지가 될 만한 강력한 신앙이 필요했다. 또 현재의 고난을 부정할 수 있는 마취제가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교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는 발흥지에 따라 특성이 다르지만 세계 종교가 될 만한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종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동류 의식, 현재의 고난이 내세의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는 희망, 그럼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기꺼이 받아들이 게 하는 점. 윌리엄 맥닐은 부정과 고난은 문명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서, 신앙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문명이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 문명 - 수당송 시대

중국이 근대까지 내려오는 제국체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시대다. 제국 체제의 핵심 중 하나는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였다. 이를 통해 강남지역의 풍부한 쌀이 강북 지역에 공급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중국 왕조의 안정성을 지탱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지주-사대부 체제가 지배하는 구조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지방의 지주들이 국가의 관료체제 안으로 편입될 수 있었고, 이들이 다시 지방의 농민들을 통제하고 세수를 걷는 핵심 역할을 했다. 대운하를 통해 남북을 잇는 네크워크가 완성되면서 이런 지주-사대부 지배 체제가 전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중국 문명은 송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화약, 인쇄술 등 각종 기술이 발명됐고 상업이 융성했다. 도시도 발달했다. 그러나 중국은 근대 유럽처럼 상업사회를 거쳐 산업사회로 자생적 발전을 하지 못했다. 상업이 억제된 것은 강력한 국가기구가 상업을 관료 체제 안에서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관료기구가 상업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상업만큼이나 농업도 생산성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농업을 바탕으로한 지주-사대부들은 상업을 효과적으로 견제할만한 힘을 갖추었고, 이 것이 상업의 발달을 일정 수준에 묶을 수 있는 한 원인이 됐다.

2013년 6월 17일 월요일

그리스 로마 문명 - 전쟁의 영향


그리스 문명은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로 만개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자유와 억압의 대립으로 봤다. 그 자유는 '폴리스의 독립성'이라는 독특한 관념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아테네는 제국으로 성장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제국이 된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다. 아테네의 힘은 해군에서 나왔다. 해군의 주축은 토지가 없는 도시 빈민층이었다. 이 빈민층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 아테네의 성장은 복잡한 계급 분화를 가져왔다. 계급 간 대립-농민 대 도시민을 축으로 한 대립이 격화되면서 폴리스를 하나로 묶어 준 공동체 의식도 약화됐다.

그런 와중에 폴리스 간 내전이 터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립했다.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이 보수적인 성향의 시민들과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 간의 다툼으로 분열됐다. 27년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그리스 폴리스들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겪었다. 이후 그리스화에 성공한 마케도니아가 패권을 잡았다. 마케도니아의 힘은, 충성스러운 귀족으로 이뤄진 유능한 장교단과 개량된 중장보병단이었다. 이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폴리스들이 몰락하면서 그리스 시민들의 공공 의식도 약해졌다. 사람들은 공공이 아닌 사적 영역의 세계로 후퇴했다. 개인의 내면과 쾌락을 중시하는 철학들이 대두했다. 그리스 세계의 몰락은 그리스 폴리스 시민들의 이민을 불러왔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따라나선 그리스인들은 서아시아 세계에 정착했다. 그리스 특유의 철학과 서아시아에 뿌리내린 종교 간의 융합현상이 일어났다. 외부로 전파되기 쉬운 그리스 미술 양식들은 인도와 중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전역과 서아시아로 퍼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로마는 이런 헬레니즘 시대에 제국으로 성장했다.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하기 보다는, 군사와 공학 영역에 특이할 정도로 발달했던 것이 로마의 특징이다. 초기 로마의 주축은 강건한 농민 보병이었다. 시민들로 이뤄진 2개의 민회에서 도시 행정과 군사를 관장하는 집정관을 뽑았다. 그와 별개의 원로원이 공화국 정치의 영속성을 부여하는 상임위원회 역할을 했다.

개개의 폴리스별로 갈라진 그리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부족 중심이었고, 그 부족들을 묶는 연맹 안에 쉽게 하나의 도시가 편입될 수 있었다. 로마는 어렵지 않게 이탈리아를 통일했고, 연맹들의 맹주가 됐다.

로마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포에니 전쟁이었다. 카르타고와 지중해 지역 패권을 놓고 3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로마 사회는 완전히 바뀌었다. 소규모 토지를 가진 농민들이 몰락하고, 직업군인들이 등장했다. 이 직업군인들은 군벌들-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의 시대를 열었다. 군벌들이 국내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이를 완화하기 위해 로마는 잦은 대외 정복사업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서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과 함께 흘러들어온 동방의 부는 로마 상류사회를 바꿔놓았다. 아테네를 갈라놓았던 빈부격차가 로마에서도 문제가 됐다.

카이사르는 이런 시기에 로마 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수차례의 격렬한 내전을 겪은 후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대권을 쥐게됐다. 아우구스투스는 군 통수권을 쥐고 교묘하게 막후에서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제도를 설계했다. 대권의 세습은 내란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용인됐다. 하지만, 이후 로마 제국은 주기적으로 내란의 위기를 겪었다.

로마 제국의 안위는 주로 변경과 수도의 주둔군의 충성심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반란과 황제 교체가 잦았다. 그럼에도 로마는 200년 가까이 평화를 유지했다. 로마와 속주는 비무장 부재지주들에 의해 지탱됐다. 로마제국은 본질적으로 도시문명이며, 도시들간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 지주들은 지역 주변 농민들에게서 착취한 자원을 토대로 도시를 운영했다. 비무장지주들에 의한 사회질서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다.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세계의 역사 1부 정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역사시대로의 전환은 농경과 함께 시작했다. 농경과 함께 인간은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쟁기의 발명으로 생산성이 늘어나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겼다. 이 잉여 농산물이 사회의 분화를 가능케 했다. 생산과 직접 관련이 없는 신관, 직인 등이 생길 수 있었고, 사회 조직은 좀 더 복잡한 형태로 진화했다. 이 진화가 문명의 시작이었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종합해볼 때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인이 건설했다. 그 후 시차를 두고 이집트,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에 고대 문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고대 문명 지역은 모두 큰 강 유역에 자리했다. 잉여농산물이 나타날 정도로 생산이 대규모로 이뤄지려면 관개가 필수적이었다. 원시적인 기술 수준에서 대규모의 관개사업이 이뤄지려면 큰 강 유역이어야 했다.

큰 강 유역의 문명 지역과 별개로 중앙 아시아 등의 지역에 분포된 스텝 지역에서는 유목문명이 자리잡았다. 유목민들은 자연 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정착이 불가능했다. 제대로 된 생산이 이뤄지지 않은 대신 유목민들은 일찍부터 기마술에 능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대체로 근대 이전까지 유목민들은 농경 문명 지대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주요 문명권의 역사는 이런 스텝 지역의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기적인 침공에 대응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유목민족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경우 문명권은 혼란과 정치 질서의 재편을 겪었다. 이런 부침이 가장 심했던 곳이 메소포타미아였다. 비옥하지만, 어느 방향에서나 침공이 가능했던 탁 트인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 곳에 자리한 문명들은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최초로 이 지역을 통일했던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등의 왕국들은 이런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기 위해 복잡한 행정 기술을 처음으로 발달시켜야 했다.

문자 뿐 아니라, 관료제, 상비군, 역참을 이용한 우편 제도 등이 문명 초기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달한 제도다. 이런 제도들을 통해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잦은 외부의 침공으로 인한 잦은 혼란은 이 지역 특유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형성에 영향을 줬다. 이런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일신교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나일강만 통제하면 어려움 없이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최초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한 고급 문화가 나일강을 중심으로 점차 귀족과 지방으로 퍼졌기 때문에 이후 유목민족의 침공에도 문명권이 살아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인더스 문명은 북쪽의 침공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인더스 문명이 붕괴된 후 인도 문명의 중심은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겨졌다. 잦은 침공으로 인해 부침을 겪은 인도 문명권은 독특한 두개의 문화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엄격한 신분제도인 카스트와, 신비주의와 복잡한 의식이 결합된 종교였다. 인도 문명권의 사람들은 이 카스트에 대한 소속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신민들의 강한 소속감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결사체가 나오지 못했다.

중국에서도 황허를 중심으로 독자적 문명이 발생했다. 이 문명은 최초의 정치적 통일체가 붕괴하면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전국시대라고 불린 이 시기에 중국 향후 문명을 지배할 지배적인 사상들이 탄생했다. 가장 중요한 유교는, 다른 문명권에서 출현한 종교와 달리 극도로 현세적이었다. 신비주의가 철저하게 배격되고, 전통과 윤리의식을 강조한 보수적인 성향의 유교는 중국 사회의 질서를 떠 받치는 기본 사상이 됐다.

중국과 반대편에서는 그리스 문명이 탄생했다. 이 곳은 처음부터 정치적 통일체가 없이 각 폴리스별로 분산된 형태의 문명이 성립됐다. 일찍부터 포도주와 올리브유 교역을 통해 폴리스들이 성장하면서 다른 문명과 달리 도시와 농민들간의 강한 유대감이 이 문명의 특징을 이뤘다. 폴리스는 이런 도농간의 강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또한 그리스 특유의 중장보병 전술도 폴리스에 대한 소속감과 열광의 기본 바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