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참고글: 플라톤의 <국가>에 관하여


1.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 중심 주제는 올바른 삶에 대한 것이다. 개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논하는 데, 왜 뜬금없이 국가의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가 나오는가? 그 것은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폴리스에서의 삶은 공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이 나뉘지 않았다. 개개인의 삶은 폴리스의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삶이란 말 그대로 폴리스적 삶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의 아테네는 망해가고 있는 폴리스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델로스 동맹을 이끌며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이자 시민 개개인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 민주정이 어우러진 황금 시대의 아테네는, 이제 금권정치와 온갖 매관매직이 판치는 통치의 난맥상, 극심한 혼란과 이전투구 등으로 혼탁해져 있었다. 동족끼리의 내전이나 다를 바 없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직접 전쟁에 참여한 아테네 시민들의 정신마저 황폐하게 만들었다. 황금시기의 아테네를 지탱해주던 모든 자긍심과 가치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 것이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간단한 배경이다. <국가>를 읽을 때는 이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 골방에 처박혀 자신의 머릿 속에서 환상과 백일몽을 통해 그저 자기만족 차원에서 이상국가를 그려본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살고있던 사회가 좀 더 올바른 사회가 되길 바랬고, 그런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2.
<국가>에서 논하는 올바른 삶이란 일단 올바른 국가(폴리스)의 정립에 기초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 삶이란 폴리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폴리스는 어떤 국가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국가의 구성원들 각자가 그 타고난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나라였다. 플라톤은 사람의 본성을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욕구에 충실한 부류, 명예를 추구하는 부류,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 셋 가운데 플라톤이 가장 하찮게 본 것은 욕구에 충실한 본성이었다. 플라톤은 이들에게는 국가의 모든 치부는 맡겨두되, 절대 통치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욕구에 충실한 이들이 통치를 하게되면 정체는 필연적으로 우매하고 부패한 금권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수호자 계급은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만이 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라 폴리스를 다스릴 수 있었다. 법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지혜는 오직 소수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소수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철학자 왕이다.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는 바로 이런 철학자왕이 다스릴 때에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보았다.

3.
<국가>의 전반부인 1-4권은 이런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면, 후반부인 5-7권은 철학자왕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와 좋음의 이데아론도 7권에 나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철학자왕들은 궁극의 실재이자 모든 실재하는 대상의 근원으로서 이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그가 살아가는 국가가 욕망의 충족이나 명예의 추구에 기반하기 보다는, 그와 같은 궁극적인 선에 기초하길 원했다. 따지고 보면 부유한 나라도, 강대한 나라도 아닌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던 김구의 말과 비슷하다. 김구가 플라톤을 알았던 걸까.

4.   
플라톤의 철학자왕은 민주정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본디 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의 품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체제이다. 민주정 자체가 붕괴하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이 그 체제를 좋게 보았을리가 만무하다.

간단히 말하면, 민주정은 참정권을 갖는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자유가 모든 이들이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평등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플라톤은 자유와 평등 둘 다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면밀히 관찰한 끝에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던 듯 싶고, 그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모든 인간이 철학적 활동을 통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 낙관한 반면, 플라톤은 소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무엇보다 그가 사랑한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 믿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의 비극은 궁극적인 선에 기초한 올바른 국가는 독재자에 의해 다스려지고 다른 모든 신민들은 그 독재자만을 우러러볼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5.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던 당시의 국가정체였던 폴리스는 이제 온데간데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국가는 플라톤이 생각한 국가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플라톤의 철학자왕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근대국가의 여기저기에서 어슬렁거리지만, 플라톤이 말한 바 그대로 철학자왕은 존재할 수 없다. 근대국가는 어디까지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통치의 제일 임무라는 로크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올바른 국가는 궁극의 지혜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에 기초한 것이지만, 근대국가는 먹고사는 문제에 그 사활을 건다.  

6.
결국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 것은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 소득없이 끝날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결국 인간의 영혼에 관한 책이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국가>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플라톤이 올바른 국가에 대해 말한 것은 결국 올바른 삶에 관해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우리 스스로의 영혼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부를 추구하는 욕구, 명예를 추구하는 용기,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 플라톤은 우리 스스로가 욕구를 절제하고 용기를 다스려 그 둘을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의 지배 아래 둘 때, 그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막상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국가>에서 말하는 올바른 삶도 막연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사람만이 오직 영혼을 가졌으며 그 영혼만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다. 영혼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도 하고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결국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길은 오직 올바르게 사는 길 뿐이었다. 그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인지는 다른 문제지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