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참고글:고대 그리스 철학과 정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 생각할 때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들의 철학이 일종의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제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또는 플라톤)이 경건함(또는 신에 대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큰 범죄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였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도 결국 불경죄로 고발당해 죽었다.) 이 불경죄라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것이라 보면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이 국가의 근간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묻는다. 불경죄로 고발당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도대체 그 불경함이란 무엇에 대한 불경함인가. 경건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이 순수하게 사변적이라 볼 수는 없다.

당시 아테네에서 불경죄는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법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장 한복판에서(아테네의 시장은 아고라였다. 아테네의 정치는 아고라에서 이뤄졌다.) 경건함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국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될 수 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은 아테네의 혼란기에 나온 것이다. 그들이 살던 당시의 아테네는 그 자체로 쇠퇴해가는 사회였다. 결정적인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20여년간 지속된 이 동족 간의 내전이 아테네 시민들의 내면에 남긴 상처를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전쟁이 어떻게 벌여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감이 올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철학자 박홍규 선생 강의록의 인용이다.

"그러면 희랍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하고 도대체 어떻게 싸웠냐? 대포를 쏜 것이 아니거든. 페르시아 사람들은 말 타고 활 들고, 갑옷을 입었어. 말 앞에도 말이 안전하라고 갑오 같은 것을 해놨어. 그리고 활 들고, 칼 들고 어떤 사람은 창 들었어. 그리고 희랍 사람들은 헬멧 쓰고, 창 들고, 방패 들고, 에워싸서 육박전으로 싸우는 거야.

또 이런 말이 있어. 일본 군인들이 잔인해서 일본도라는 것이 있어. 그래서 사람의 목을 베야 군인이 된다는 거야. 장교들은 사람 목을 한 번씩 베어야 돼. 그런데 일본서 연습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중국 가서 중국 사람을 데려다 놓고 연습을 했어. 그 사진 하나가 <아사히신문>에 났어. 중국 사람이 머리를 떨구고 않아 있고 위에서 칼로 내려치려고 해. 또 일본 놈들이 옆에서 웃고 있어. 맥아더가 그 사진을 보고 이놈들은 모두 잡아서 집어넣으라고 했거든. 대학에 군사훈련을 맡은 장교가, 우리계급으로는 대령이고 일본 계급은 대좌지.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 칼이라는 게 아주 무서워, 보기만 해도 섬뜩해. 기술적으로 잘 쳐야 한 번에 베지, 그게 잘 안 된다는 거야. 목에서 피가 막 나고 난잡하대. 그 잔인한 일본 사람도 그걸 한번 죽이고 나면 저녁에 잠을 못 잔대. 일본 사람도 다정다감하거든.

희랍 사람들이 어떻게 죽였냐 하면, 육박전에서 상대방을 창으로 찌르고, 상대방은 안 죽으려고 활로 쏘고, 칼로 치고 그러거든. 그것이 한 번에 되냔 말이야. 갑옷을 입고 있는데. 어디 목을 찌르거나, 정강이를 지르거나. 몇 번을 찔러도 잘 안 돼. 그러니까 그건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육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야. 그렇게 죽이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되겠는지를 한번 생각을 해봐. 그 당시에 희랍 사람들은 벌써 야만인이 아니거든. 야만인은 그렇게 하고도 무감각해. 로마 사람들은 경기장에 노예를 집어넣고 좋아라 하고 무감감하거든. 희랍 사람들은 다정다감한 사람들 아냐? 비극 같은 것도 나오고, 산문도 쓰고. 그러고 난 후의 정신 상태(mentality)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

 - 박홍규, 박홍규 전집 2 - 플라톤과 전쟁

이처럼 10년 간의 살육을 겪고 돌아온 시민들의 내면 상태가 멀쩡했을리 만무하다. 그런 사회에서 거침없는 강자의 논리, 즉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도 쉬이 납득이 간다. 플라톤의 <국가>편의 1장은 바로 그런 논리, 살아남은 자, 강자의 이득이 올바른 것이라는 논리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국가의 개혁을 다루는 책이 그 같은 기존 논리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테네 사회가 강자가 정의라는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황폐한 아테네 시민들을 상대로 경건함에 대해, 올바름에 대해, 사랑에 대해 묻고 다닌다는 것은 그런 황폐화되어 가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고 쇠퇴해가는 자신의 공동체를 다시 바른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테네의 정치는 직접 민주주의 정치였다.

여기서 직접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은 모든 시민이 직접 국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테네의 민주정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확률적으로 주요 공직 진출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다. 아테네는 주기적인 추첨 제도로 공직자를 충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정치적 기획인 이유가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에 있다. 누구나 국가의 중요한 공직에 참여하는 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 모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시민이 철인이 될 수 있다고 본 반면, 플라톤은 그보더 좀 더 후퇴해서 철인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철학이 사람들에게 교육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공통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철학적 사유가 곧바로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가능한 폴리스의 민주정에서 가능하고 또 의미있는 일이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그 같은 폴리스 사회는 붕괴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대제국과 로마 제국이 폴리스와 헬라스 세계를 대체했다. 시민이 신민이 되면서 철학은 더이상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없었다.

정치는 황제와 그를 둘러싼 소수의 귀족들의 문제가 되었다. 신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통치자들이 그들을 언제 전쟁에 징발하는가, 얼마나 무거운 세부담을 물리는가의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신민들에게 있어 정치적인 문제는 그와 같은 것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요컨대 개인의 삶이 공동체의 운영, 즉 정치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는 것, 제국의 신민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의미했다. 제국에 이르러 개인의 철학적 각성은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적인 삶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절대 군주제와 거대하고 폐쇄적인 국가기구가 정치를 독점해 개인의 철학적 각성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제국의 정치판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제국의 신민들은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들어가 내면을  파고들거나, 스토아 현인들처럼 명상을 통해 세계를 초월한 우주의 원리를 관조하거나, 에피쿠로스처럼 집 안의 정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쾌락을 좇았다. 이 세가지 철학적 태도 모두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의 삶에 대한 문제나 공동체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것만을 관심사에 두었다. 그렇게 개인의 삶에서 정치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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