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7일 월요일

그리스 로마 문명 - 전쟁의 영향


그리스 문명은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로 만개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자유와 억압의 대립으로 봤다. 그 자유는 '폴리스의 독립성'이라는 독특한 관념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아테네는 제국으로 성장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제국이 된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다. 아테네의 힘은 해군에서 나왔다. 해군의 주축은 토지가 없는 도시 빈민층이었다. 이 빈민층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 아테네의 성장은 복잡한 계급 분화를 가져왔다. 계급 간 대립-농민 대 도시민을 축으로 한 대립이 격화되면서 폴리스를 하나로 묶어 준 공동체 의식도 약화됐다.

그런 와중에 폴리스 간 내전이 터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립했다.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이 보수적인 성향의 시민들과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 간의 다툼으로 분열됐다. 27년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그리스 폴리스들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겪었다. 이후 그리스화에 성공한 마케도니아가 패권을 잡았다. 마케도니아의 힘은, 충성스러운 귀족으로 이뤄진 유능한 장교단과 개량된 중장보병단이었다. 이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폴리스들이 몰락하면서 그리스 시민들의 공공 의식도 약해졌다. 사람들은 공공이 아닌 사적 영역의 세계로 후퇴했다. 개인의 내면과 쾌락을 중시하는 철학들이 대두했다. 그리스 세계의 몰락은 그리스 폴리스 시민들의 이민을 불러왔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따라나선 그리스인들은 서아시아 세계에 정착했다. 그리스 특유의 철학과 서아시아에 뿌리내린 종교 간의 융합현상이 일어났다. 외부로 전파되기 쉬운 그리스 미술 양식들은 인도와 중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전역과 서아시아로 퍼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로마는 이런 헬레니즘 시대에 제국으로 성장했다.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하기 보다는, 군사와 공학 영역에 특이할 정도로 발달했던 것이 로마의 특징이다. 초기 로마의 주축은 강건한 농민 보병이었다. 시민들로 이뤄진 2개의 민회에서 도시 행정과 군사를 관장하는 집정관을 뽑았다. 그와 별개의 원로원이 공화국 정치의 영속성을 부여하는 상임위원회 역할을 했다.

개개의 폴리스별로 갈라진 그리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부족 중심이었고, 그 부족들을 묶는 연맹 안에 쉽게 하나의 도시가 편입될 수 있었다. 로마는 어렵지 않게 이탈리아를 통일했고, 연맹들의 맹주가 됐다.

로마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포에니 전쟁이었다. 카르타고와 지중해 지역 패권을 놓고 3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로마 사회는 완전히 바뀌었다. 소규모 토지를 가진 농민들이 몰락하고, 직업군인들이 등장했다. 이 직업군인들은 군벌들-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의 시대를 열었다. 군벌들이 국내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이를 완화하기 위해 로마는 잦은 대외 정복사업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서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과 함께 흘러들어온 동방의 부는 로마 상류사회를 바꿔놓았다. 아테네를 갈라놓았던 빈부격차가 로마에서도 문제가 됐다.

카이사르는 이런 시기에 로마 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수차례의 격렬한 내전을 겪은 후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대권을 쥐게됐다. 아우구스투스는 군 통수권을 쥐고 교묘하게 막후에서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제도를 설계했다. 대권의 세습은 내란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용인됐다. 하지만, 이후 로마 제국은 주기적으로 내란의 위기를 겪었다.

로마 제국의 안위는 주로 변경과 수도의 주둔군의 충성심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반란과 황제 교체가 잦았다. 그럼에도 로마는 200년 가까이 평화를 유지했다. 로마와 속주는 비무장 부재지주들에 의해 지탱됐다. 로마제국은 본질적으로 도시문명이며, 도시들간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 지주들은 지역 주변 농민들에게서 착취한 자원을 토대로 도시를 운영했다. 비무장지주들에 의한 사회질서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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