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9일 수요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정리


사회주의는 외연이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일반적 인식 중 명백한 오해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가 정확히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건 오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계몽주의 시대 유럽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개념인데, 당초에는 지금처럼 정치적 함의가 강한 말이 아니었다. 사적 소유가 철폐된 특정한 사회조직 방식을 가리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에 사회주의는 인간이 본성 상 사회를 이루고 살려는 성향이 있으며, 사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된 말이었다. 

사회주의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적 의미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초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 팽창을 시작할 때 쯤이었다. 이 때 개인주의는 시장 메커니즘과 자유교환 경제와 경쟁 등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반개인주의라는 맥락에서 반자본주의적인 의미를 얻기 시작했다.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188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노동계급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자발적, 결사, 협동체, 기타 자발적 집단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생된 자코뱅 민주주의의 전통과 맑스주의가 노동운동 내에서 점점 힘을 얻으면서 이 운동 내에서 정치권력 장악의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사회주의 역시 이와 결부되어 국가권력 장악에 관한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에 와서도 사회주의는 정치 권력 방악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 요구 정도에 머물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권력 장악 후의 사회 조직 논의에 대해 무관심했다.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에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자는 급진적 요구만이 있을 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이는 사회주의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마르크스-엥겔스가 사회주의 이상 사회에 대한 논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지에만 몰두 했을 뿐 권력을 잡은 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가 진지하게 권력 장악 이후의 사회 건설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좌에 오른 후부터이다. 이 때 자본주의는 전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자본주의 세계는 2번의 세계대전과 한번의 대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발흥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겪었다.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였던 자유주의는 완전히 몰락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이런 세상에 등장했다. 후진적인 농업국가에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처럼 여겨졌다. 1917년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도 사민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세력들도 이제 실제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전에 집권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가 부족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기 바빴다.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각종 사회주의 정책들의 문제는 대부분 자본주의의 위기와 붕괴가 진행되던 와중에 해결책으로 제시됐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실효성을 잃은 결과였다. 

1917년 이후 사회주의는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20세기 중후반동안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을 지배하는 거대한 블록을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지배한 것은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들이 직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출된 논리였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적 전통이라고는 전제주의가 전부였고, 완전히 고립되고 가난하면서 외세의 위협에 처한 후진농업국가였다. 산업이라고는 빈약한 군수산업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생존해야 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채택된 정책은 급속한 산업화였다.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투쟁을 통해 집권한 스탈린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는 과제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근대화 계획을 세웠다. 5년 단위의 개발 계획, 특정한 생산 목표, 그를 위한 인력과 물자의 강제 재배치 등이 그 계획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무시했고, 한가지 목표-강력한 군대 건설을 위한 공업화-에 다른 모든 목표를 존속시키는 경제였다.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경제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였으며,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대중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성장과 함께 대중 교툥과 의료, 복지도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당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이 참고할 수 있는 경제모델은 1차대전 당시 교전국들이 운영했던 전시경제 모델이 전부였다. 전시경제는 계획, 경제의 공적인 운용, 노동력의 동원 등이 요구되는데 이런 동원은 주로 노동조합과 일부 공공복지 제도를 통해 이뤄졌다. 볼셰비키는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 모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런 배경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집권세력이 국가의 중앙집권적 조치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선호하도록 이끌었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소 거리가 있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정책을 지배한 것은 대공황과 대량실업의 경험이었다. 사민주의는 혁명이 아닌 선거로 집권한 합법적 정치 권력이었다. 선거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했기에 사민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인식과는 달리 복지국가의 주요 개념들은 주로 보수주의에서 나왔다. 자유당, 사회카톨릭 세력, 사회의식을 가진 관료 등이 전후의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각종 정책을 입안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지방정부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이었다. 

사민주의는 핵심문제는 대량실업을 어떻게 없애느냐였다. 19세기 식의 자유주의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전후의 폭넓은 합의가 사민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을 포함한, 국민경제의 수요 관리를 경제의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2차대전과 뒤이은 전후의 호황은 대량소비 사회를 가능케 했다. 사민주의가 달성한 완전고용은 기본적으로 이런 대량소비 사회에, 국가의 노후보장, 공공의료보험 등 사회보험 제도, 불경기의 공공사업 등을 통한 총수요 관리 등이 다양하게 뒤섞인 혼합경제의 결과였다. 1970년대에 와서 이런 혼합경제가 더이상 잘 굴러가지 않게 되면서 산자유주의가 새로운 대안이 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에 소비에트 사회주의도 위기에 처했다. 그 체제는 누적된 내부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 생길때와 같이 급격한 속도로 사라졌다. 자본주의도 1970년대에 다시 한번 위기에 처했지만, 그 체제는 여전히 상당 수준의 유연성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전후의 유례없는 풍요를 가능케했다. 완전고용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각종 상품을 통해 인간 생활 수준을 두드러지게 끌어올렸다. 사회주의의 물질적 근거가 악화된 것이다. 또 사회주의의 전형이나 여겨졌던 제도들이 자본주의에 흡수됐다. 복지제도 뿐 아니라, 산업의 공적 조정과 계획 등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됐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흐려진 한편, 소비에트는 자멸했다. 그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이 경제에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가격제도는 물론이며, 최소한의 합리적인 생산을 조정할 경제적 메커니즘, 즉 상대적 비용의 기준조차 없다는 것, 즉 시장의 관전한 결여였다. 이런 결점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필요한 많은 서비스들을 지하경제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났다.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요약 정리



베링턴 무어에 따르면 근대 의회 민주주의의 확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르주아지 계급이다. 이 계급은 전통적인 토지소유계급, 즉 지주와 농업 노동계급, 즉 농민과 함께 근대화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세력이다.

중요한 것은 근대화의 과정이 반드시 의회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근대화된 국가는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이는 이후의 일이다. 근대화가 상당히 진전되던 시기인 20세기 초중반까지, 근대화의 길은 1가지가 아니었다. 무어는 근대화의 경로를 의회 민주주의 이외에도 권위주의적 독재정권과 그 심화된 형태인 파시즘, 그리고 농민혁명에 기초한 공산화 등 3가지로 나눈다.

근대화가 시작되는 그 때 당시 그 국가가 처한 국내의 정치사회적 상황, 즉 각 계급간의 역학 관계와 국가기구의 힘 등의 요소에 따라 각 국은 서로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핵심은 상업적, 산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시민, 즉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여부이다.

무어의 도식화를 살펴보면 부르주아가 얼마나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의회 민주주의냐,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냐, 농민혁명의 모습을 띈 공산화냐로 근대화 과정이 나뉜다.

부르주아 계급이 충분히 성장하고 지주 계급보다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대등하게 세력을 다툴 수 있는 경우 의회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이 그런 경우이며, 대혁명이 일어난 후 프랑스 역시 비슷하다. 이 과정이 평화적인 경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규모의 폭력이 일어나 구 질서와의 결정적 단절이 일어난다. 영국의 경우 청교도혁명과 인클로저, 미국의 남북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이 이런 경우다. 셋 모두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농업지배계급, 즉 지주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타도되거나 적어도 약화 또는 동화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 기구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국의 경우가 가장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었고, 국가 기구가 강했던 프랑스와 미국은 혁명이나 내전을 겪었다.

권위주의적 독재, 또는 파시즘은 주로 후발산업 국가에서 일어난다. 일본과 독일이 그런 경우다. 이 경우 자생적인 산업화가 일어난 국가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이 약하다.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계급은 급진적인 농민-노동자 동맹을 막기 위한 보수적 동맹을 맺는다.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 기구가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데, 그 축은 군비 확장이다. 농민들의 혁명적 잠재력은 억제된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인 농촌이 지주 계급과 강한 봉건적 유대가 있으며, 빠른 생산성 성장 등으로 착취가 상쇄됐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독일의 경우 융커들이 농노제를 다시 도입하면서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붕괴시키면서 혁명적 잠재력이 억제되었다. 농촌은 산업화에 따른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데, 보수정권은 그 중 몇몇 구호를 채택해 급진우익화하면서 파시즘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이 더디거나 거의 없고,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이 그대로인 곳에서는 농민 혁명에 기반한 공산화가 일어난다. 중국와 러시아가 그런 경우다. 두 경우 모두 전통적인 농업 사회의 질서가 거의 그대로인 채 다만 상층 지주 계급과의 연결고리가 끊기거나, 착취가 강화되는 경로를 겪었다. 이 때 공산당이 농민층과 제휴하면서 혁명의 모멘텀을 만들어냈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외부적 압력이 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경우 1차대전이 정부의 신뢰와 능력에 모두 압박을 가했고, 민중 봉기와 군대의 반란으로 권력의 진공 상태가 생겼다. 볼셰비키는 이 틈을 파고들어 권좌에 올랐다.

중국에서는 중일 전쟁이 공산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은 해안지역을 대부분 점거했다. 해안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와 전통적인 농촌 향신층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당은 일본의 침략으로 이런 지지세력의 쇠퇴를 겪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은 농촌 지역에서도 항일과 민족주의적 단합을 불러오는 요소였다. 이런 분위기에 올라탄 뒤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이 결합하면서 공산당은 권력에 다가갈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폭력적인 방식으로 농촌을 재조직화하고 전통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근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프랑스 역시 그런 농민사회가 도시 빈민들과 결합해 대혁명의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상층 농민들은 도시 빈민의 급진주의에 제동을 걸었고, 프랑스는 소농 중심의 사회와 산업화가 정치의 불안한 두축을 형성했다.

일본은 그와 달리 농촌 사회가 온전한채 근대화에 들어섰다. 일본의 독특한 점은 농촌 사회이 지주와 농민 사회 간에 봉건적 유대가 그대로 살아있어 혁명적 잠재력을 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동력 투입으로 생산이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는 쌀농사였다는 점도 혁명을 억제하는데 도움을 줬다. 1차 대전 이후 불황 속에 농민들의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는 육군 속에 흡수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군국주의에 동력을 제공했다.


2013년 9월 1일 일요일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
단편소설 전집

회고해 보면 헤밍웨이 문학 중 뛰어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들이 아니라 단편소설들이다. 단편소설 속에서는 그의 단점들이 드러날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호전성, 일부러 내세우는 남성성, 폭력과 강인함의 칭송, 허장성세, 낭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여성관 등이 짧은 단편소설 속에서는 모두 억제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강렬한 순간, 고립된 순간을 섬광처럼 빛내는 저 유명한 스타일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의 단편소설에는 진리에 대한 숭상, 독창적 산문,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대화, 감정의 분출 등이 돋보인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헤밍웨이는 전 세계 단편소설가들 중에서는 10대 작가 안에 들어간다.

 그는 죽음, 열정, 패배, 인간 희망의 끈덕짐 등 궁극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는 실제에 있어서 그리 폭넓지 않다. 그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소설가들 중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더 넓게 탐구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를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스탕달 곁에 세워 놓으면 그는 청년처럼 보인다. 헨리 제임스 옆에 서면 원시인처럼 보이고, 톨스토이 옆에서는 미성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적지 않다. 마크 트웨인이 쌓아놓은 기초 위에다 그는 영어 문장을 문학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어떤 한 순간의 진실, 통찰, 체험을 단 한 단어의 낭비도 없이 간결하게 드러낸다. 그가 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이런 테크닉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도덕적인 기여도 했다. 헤밍웨이는 언어의 정직성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그의 훌륭한 단편소설들(여기에는 중편소설 <노인과바다>도 들어간다)은 <립 밴 윙클>이나 <어셔 가의 몰락>처럼 미국 문학의 유산이 되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패배되지 않는 자>, <나의 아버지>, <살인자들>, <5만 달러>와 수십 편의 단편소설들은 지금 읽어도 또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생생하다. 저자가 느꼈던 그 심정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헤밍웨이의 인생관을 받아들이든 말든, 우리는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 투우장, 술집, 스키장, 경마장, 프로 복싱, 미시건의 삼림 등르 다룬 이 단편소설들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 단편소설들은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스타일을 초월한다. 정서와 정서의 통제가 여기에서는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직한 예술가가 진실을 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노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단편 전집>은 소위 핑카 비히아판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일한 전집본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

1799-1850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사촌누이 베트

스탕달(발자크는 스탕달의 진면목을 알아본 최초의 소수 중 하나였다)과는 다르게 발자크는 오늘날 널리 읽혀야 마땅한데도 잘 읽히지 않는다. 모두들 발자크의 업적을 인정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는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인가? 그 대답은 분명치 않다. 19세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결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저급한 취미, 거의 탐정소설 같은 멜로드라마의 선호, 변화하고 발전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능력의 부족, 지능의 부족 등이 그런 결점들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다 할 우뚝한 걸작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의 작품 중 잘 알려진 것 세 편을 추천했으나, 이 작품들이 그를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다른 작품 셋을 추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발자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써낸 50내지 60편의 장편소설들을 모두 읽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할 일은 너무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 다만 힘차고 다양하게 사회를 묘사한 작가라는 점에서는 발자크를 따를 자가 없다.

발자크는 스탕달식의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이였다.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야심만만한 젊은이 라스티냐크는 파리 시내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소리친다. "이제 우리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구나" 발자크 소설에는 많은 라스티냐크가 나온다. 젊은 시절의 발자크는 연필을 잡고서 키 작은 하나(나폴레옹)의 그림 밑에다 이렇게 썼다. "나폴레옹이 칼로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

이런 정복을 늘 염두에 두고서 발자크는 미친 사람처럼 살았고 51세에 과로로 죽었다. 어쩌면 항간에 들려오는 말처럼 5만 잔의 커피를 마신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방면에 별 재주도 없으면서 금융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연애에다 엄청난 정력을 소진했고 굉장히 많은 빚을 졌다. 그는 20여 년 동안 쓰고, 쓰고, 또 썼다. 하루에 열네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을 일했다. 오로지 학자들만이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써냈는지 알고 있는데 총 350권이 넘을 것이다. 그 중 100권 정도가 "인간 코미디"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의 광적인 포괄적 계획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역사와 비펴을 모두 담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악과 원칙을 모두 탐구하는 그런 방대한 계획을 구상 중이다. 이런 계획에서 나온 내 작품들에 '인간 희극'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암암리에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작가는 단테인데, 두 사람은 사실상 닮은 점이 거의 없다.

발자크는 당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하여 거대한 벽화를 완성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다.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사촌누이 베트>는 이 미완성 건물에 들어가는 세 개의 벽돌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작품은 비합리적인 열정을 다룬 것인데, 두 딸에 대한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코넬리아 없는 리어왕을 다루되 그 무대가 중산층 가정이라는 점만 다르다. 두 번째 작품은 탐욕을 연구한 것이고, 세 번째 작품은 여성의 복수심을 다룬 것이다. 세 작품 모두 발자크 소설의 단골 메뉴인 편집증 환자를 다룬다.

<고리오 영감>은 파리의 세속적 사회를 묘사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시골의 풍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강력한 힘과 생생한 세부사항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발자크는 현대 리얼리즘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세 작품 모두 발자크의 주요 관심사인 돈 문제에 집중한다. 그는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 돈을 잃고, 돈을 사랑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배신이 아니라 파산이었다. 발자크 이전의 작가들 중에서 발자크처럼 돈의 세계를 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경제경영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독특한 인물들의 악마 같은 힘을 추가해야 한다. 마담 마르네프, 그랑데, 곱세크, 고리오, 세자르 비로토 등은 입체적인 인물은 아닐지 몰라도 견고한 인물들이다. 발자크의 엄청난 작품 수, 확고한 현실 파악, 객관적이고 생생한 세부 사항 등을 감안할 때 이 결점 많은 거인에게 경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참고글:한국 주택시장의 문제


"우리나라의 아파트 분양 시장은 자유경쟁 시장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품시장과는 매우 다른 시장이다. 우선 토지의 공급권한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통제한다. 권력자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바뀐다. 토지를 사서 설계도만 가지고 분양을 하는 건설회사가 판매가격을 결정한다. 분양가격을 결정할 때 원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얼마에 내놓으면 이익을 많이 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토지를 평당 600만원에 사서 건축비 400만원을 들여 원가가 평당 1000만원인 집을 평당 3000만원에 분양한다. 소비자는 선택권이 별로 없다. 정부가 땅을 공급하고 건설회사가 분양가를 내놓으면 미래의 가격 상승 여부를 예상해 살지 말지를 판단할 뿐이다.
... 그렇다면 한국 부동산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가 직면한 문제의 태반이 부동산 가격 상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빈곤층 증가, 가계부채와 이에 따른 금융불안 문제, 저축은행 부실화 문제, 저출산과 젊은이들의 불만, 교통난 등은 부동산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부동산 문제의 핵심적인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건설업자, 토지소유자, 관료 등 소수의) 이권집단들에게 농락당해온 시장이며, 그들은 공급을 적게하는 방법으로 부동산 가격을 올려서 이권을 챙겨왔고 대다수의 국민들을 고통에 빠드렸다는 것이다. 즉, 공급부족이 핵심문제라고 생각한다.
...2010년말 현재 서울은 979만 가구에 350만 가구로 되어있다. 주택은 253만호로 조사되었다. 97만호나 차이가 난다. 주택수 통계를 낼 때 다가구주택을 한채로 잡는다. 그 중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20여만호를 제외해도 80만 가구, 즉 인구의 20%가 열악한 주거에서 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80만 가구 200만명 정도는 다가구주택의 일부, 옥탑방, 반지하방, 여인숙, 고시원 심지어 비닐하우스에서도 산다.
...전국적으로 보면 2010년말 현재 총 주택수는 1468만채이며 거주단위의 가구수는 1734만이다. 무려 266만 가구가 부족하다. 23만호의 오피스텔은 법적으로 주택이 아니므로 주택수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 2010년 정부의 공식 주택보급률 101.9%는 실제거주단위 기준 주택수 1767만채를 가구수 1734만으로 나눈 수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다는 통계의 허구성을 간파해야 한다. "

박창기, <혁신하라, 한국경제> 중에서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참고글: 막스 베버의 의회주의에 관한 단상


막스 베버에게 있어 현대의 정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관료제 지배를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느냐에 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버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가는, 한 마디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가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관료제의 지배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런 책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 지배 하에서 특정 정책이나 정치적 결정의 책임 소재는 흔히 모호해지며, 그 업무의 전문성이나 비밀성에 비춰볼 때 일반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기 어려운 성질을 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가의 중요한 임무는 그런 행정의 불투명성과 책임소재의 모호함으로 빚어지는 결과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 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베버가 간단히 제시하는 것은 의회의 조사권이다. 오늘날의 국정조사를 생각하면 된다. 베버는 의회의 조사권을 확대함으로써 행정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그 조사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즉 정치인들이 적절한 전문성을 쌓을 기회도 증대된다고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정조사가 그와 같은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따로 고찰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더 폭 넓게, 약간은 모호하게 말하자면, 베버는 행정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 우위는 행정 각 부의 장관과 같은 핵심적인 정무직을 엽관 인사로 채우는 것이다. 이 것은 오늘날 우리의 직관과 배치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되는 관료들이 장관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정치 실세들이 장관을 하면 행정부 전체가 정치논리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가.

베버는 그 같은 행정의 정치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베버 자신이 세상을 상쟁하는 가치들 간의 투쟁의 장이라 생각했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의회는 선거를 통해 인민들에게 주기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 즉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대해 비교적 투명하게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투명한 책임성 자체가 정지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책들의 결과에 대해 숙고하고, 장관 자리에 신중한 인사를 하게 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 같은 베버의 통찰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얼마나 유의미한가.

무엇보다 우려되는 일은 정치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정치적/당파적/분열적이라는 말은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된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능과 비생산적 세싸움, 막말의 대명사처럼 비춰진다. 50%도 안되는 투표율로 당선된 299명의 의원들이 사회 전체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균열, 즉 입장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국회의 정치적 대립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 정치적 대립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회 전체와 괴리된 상황에서 국회 자체의 무능은 더욱 도드라진다.

국회가 무능해진 이때 실제로 국가기구를 지배하는 이는, 대개 관료라 베버는 보았다. 한국에서는 관료와 재벌 및 기득권 세력, 보수 언론간의 삼각연합 체제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한다. 이 삼각연합이 독점하는 국가의 폭력수단은 거리에서는 곤봉과 방패로, 철거현장에서는 용역깡패로, 법원에서는 입법을 해대는 법관으로 현현한다. 방상훈의 개들은 그 뒤에서 법치를 노래하며 펜대를 굴린다. 덕분에 시민들은, 인민들은 거리에서는 곤봉에 얻어맞고 철거현장에서는 불에 타 죽으며 법원에서는 무전유죄를 선고받는다.

이러니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가족, 믿을 건 가족 뿐이다. 가장이 무너지면 다 같이 동반자살, 디 엔드. 자살률 1위의 혁혁한 공범자들이 자살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장 격하게 꾸짖는 개 같은 현실. 벤야민의 말처럼 "승리하는 적 앞에서는 죽은 자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정치적인 것이 귀환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현재 한국의 국가기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들의 연합에 균열을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에게 있어 정치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파적이고 주관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베버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의회주의의 확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의회는 책임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양성하는 (그나마 가장 나은) 현실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회에서 그 같은 것이 가능할까. 한국의 정치는 자꾸 거리로 나가고 있거나 인터넷 상으로 들어가고 있지 국회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최재천 같은 이들이 재선에 실패하고 전여옥 같은 이들이 당당히 재선뺏지를 다는 현실이라면 국회를 닫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고글: 의회 리더십과 관료제의 관계/막스 베버



"현대 의회는 우선 관료제라는 수단에 지배받는 피지배자들의 대표단체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층의 최소한의 내적 동의는 모든 지배가, 심지어 가장 잘 조직화된 지배까지도 지속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공적 권력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의회와 사전 협의를 거친 법 제정이 의무적이며, 무엇보다 예산안이 필수적이다. 신분차등법이 생겨난 후 지금까지 국가의 자금조달 방식, 즉 예산권에 대한 처분은 의회의 결정적인 권력수단이었다.

물론 의회가 정부 지출과 법령의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또는 별 의미가 없는 발의를 함으로써 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강력하게 피력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정치적 지배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아니다. (이 경우) 의회는 '소극적 정치'만을 할 수 있으며, 적대적 권력과도 같은 행정 지도자들과 대립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회는 행정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얻을 뿐이며, 단지 제동장치로서, 즉 무능한 불평꾼들과 잘난체 하는 자들의 모임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한편 관료제는 의회와 유권자에게는 엽관 운동가와 심복의 카스트로 나타나는데, 이들 엽관 운동가와 심복은 인민을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활동의 대상으로 취급할 뿐이다.

의회가 다음과 같은 것을 관철시키면 상황은 달라진다. 행정 지도자는 의회에서 곧장 충원되든지(본래의 의미에서의 '의회제도'), 명백하게 표현된 다수의 신뢰를 얻거나 최소한의 불신을 피해야만 행정 지도자가 관직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의회를 통한 지도자 선출), 행정 지도자는 이러한 근거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고 의회와 그 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지도자의 의회에 대한 책임성), 행정은 의회에서 선택된 노선을 따라야 한다는 것(행정에 대한 의회의 통제) 등이 관철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회의 지배 정당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국가 행정의 적극적인 공동 참여자이다. 이 때 의회는 적극적 정치의 한 요소가 된다."



- 막스 베버,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