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8일 일요일

중국과 한국 관계 문제;<용과 춤을 추자> 간단 정리


조영남의 '용과 춤을 추자'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의 관점에서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고찰한 책이다. 저자는 중국의 급부상이 동북아시아 뿐 아니라 국제정세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하고, 이런 급부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알아본 뒤 한국은 향후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제언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널리 퍼진 중국대세론과 중국위협론을 모두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향후 20~30년내 미국을 대체할 수퍼파워가 된다는 것은 성급한 분석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급부상이 우리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일본 등과 협력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리한 요구다. 중국의 현재 위치와 향후 발전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통해 정세를 제대로 읽고, 그에 맞는 한중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중국의 급부상은 전적으로 덩샤오핑 시대 이후 경제성장 덕이다. 30년간 평균 10%를 넘나드는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의 적절한 리더십,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시장의 개방과 통합 등 여러 요인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식 경제발전은 공산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넘어가는 사례 중에서도 독특한 모델이 됐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공산당 계획 아래 단계별로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정치 사회 분야의 민주화는 억제한 것은 중국이 유일무이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성공적인 경제성장 자체가 현재 공산당의 정당성을 확보해준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19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와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또한 문혁 시기의 사회적 혼란을 장기간 체험한 중국 지도층과 지식인, 시민들 모두가 공산당의 안정적 리더십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치 공화정 말기의 계속된 내전에 지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혈통이 황제 지위를 독점하는 것을 허용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이 몇몇 개인에게 장기간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고 일정기간을 간격으로 성공적인 리더십 교체를 계속하고 있는 것도 주요 원인이다. 중국 공산당은 주석과 총리를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소수지만 우수한 엘리트들이 아래에서부터 최고위층까지 두루 경험을 쌓게 해서 유능한 지도부가 권력의 바통을 계속 이어받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일정부분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해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이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며, 지금의 중국이 단기간에 급변하는 사태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필요한 것도 이런 중국의 상황을 토대로 그에 맞는 대중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그 어느나라보다 더 긴밀하게 맺어진 상태다. 지정학적 거리의 문제(중국과 대립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뿐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고려해볼 때 한국은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을 택해선 안된다.

저자는 미국의 중국 견제, 포위 정책과 그에 동조하는 일본과 한국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미동맹에 대한 무조건적 맹신과 강화는 답이 될 수 없다.

한국은 이미 대중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고, 경제의 사활을 좌우하는 주요한 부분이 됐다. 또한 북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과 멀어질수록 북한 문제까지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대북 강경책 일변도로 가는 것도 대중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정 부분 북한과 관계유지가 필요한 중국의 대외전력 상 대북 강경책은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옹호하고 우리를 경원하게 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저자의 조언은 현 정부가 충분히 음미할만하다.

"한ㆍ미 동맹의 범위는 한반도가 중심이라는 점, 즉 대북 억제가 목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ㆍ미 동맹은 중국 봉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군사적 역할 확대는 평시와 전시 모두에서 한반도와 관련된 군사 행위에서만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한국은 이를 기초로 중국을 설득할 수 있다."



2013년 7월 26일 금요일

불평등 사회와 지대추구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와 박창기의 <혁신하라 한국경제>의 공통점은 1대99의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다. 여기서 1대99란 소수의 수퍼리치들이 사회 전체 부의 상당부분을 독식하고, 대다수 근로자들이 상대적 또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회 구조를 가리킨다. 스티글리츠와 박창기가 인용하고 있는 상당수의 통계 자료들에 따르면, 최근 수십년간 미국과 한국 둘 다 사회 최상층의 소득증가율은 두드러진 반면, 근로자 대다수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원인에 대해서도 두 저자는 비슷한 진단을 한다. 경제학 용어로 렌트, 즉 지대를 사회 최상층이 독식하는 구조가 심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렌트는 정상이윤을 넘어선 잉여이익을 가리킨다. 경제학적으로는 불완전한 경쟁상황으로 인해, 소비자들이 완전경쟁일 때 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재화를 구입하면서, 생산자가 챙기는 초과이익을 말한다. 주로 천연자원이나 전기처럼 소수의 공급자만 존재하는 독과점 시장, 또는 법률이나 의료 등 진입장벽이 높은 서비스 시장에서 발생하는 높은 수익을 렌트라고 볼 수 있다.

스티글리츠가 주로 지적하는 분야는 금융이다. 미국 경제에서 금융 부문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 렌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챙겼다. 방만한 경영으로 은행 경영이 부실해져도, 국가가 세금을 쏟아부어 회생시키는 동안, 경영자들은 보너스 파티를 벌이는 현실이 적나라한 지대추구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박창기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지대추구 현상을 본다. 규제에서 벗어난 소수의 재벌이 바로 그 예다. 출자총액제한이 풀리자, 총수 일가 지분 100%인 계열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고 주가를 올려 배당을 챙기거나, 빵집같은 서민업종에 진출해 수익을 올리는 행태들이 지대 추구의 예가 될 수 있다. 진입장벽이 높고 보수가 좋은 교사나 공무원도 지대추구의 한 예로 볼 수 있다고 박창기는 지적한다.

지대추구는 제 3세력의 개입없이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풀어나가기 어렵다. 특히 국가가 지대추구 세력에 유리한 제도를 만들거나, 공정한 규제를 제대로 집행하지 못할 때 지대추구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로마의 정치와 군사

로마는 헬레니즘 문명의 연장선에 있는 문명이었다. 당시 문명의 중심은 헬라스 세계였고, 로마는 변방이었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는 그리스 문명의 아류에 가까웠다고 혹평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로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지중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의 진정한 재능은 정치와 군사에 있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치적 천재를 혼합정체에서 찾았다. 왕정과 과두정과 민주정이 적절하게 섞인 체제라는 지적이다.  로마가 이런 혼합정체의 특징을 갖춘 것은 맞다. 로마는 3개의 상이한 민회가 있었고, 거기서 뽑힌 소수의 정무관들이 국가의 행정을 맡았다. 정무관들의 임기는 1년으로 한정돼있었기 때문에, 정체의 변동이 심할 수 있었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고 정체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조직이 원로원이었다. 초기에는 자문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원로원은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쥔 조직이 된다. 

로마 정체의 역사는 신분 다툼의 역사이기도 하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는 귀족과 평민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운영됐다. 초기에 평민들은 집정관 등 국가의 주요 관직에 진출 할 수 없었다. 귀족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평민회에서 뽑히는 호민관이었다. 호민관은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이 제안하는 각종 법률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야당같은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평민의 권리 주장은 계속 이어져, 결국 실제 법적인 참정권이라는 측면에서 귀족과 평민은 완전히 같은 위치에 서게 됐다. 

이런 평민의 권리 신장이 가능했던 것은 로마 군대의 근간이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 군대의 주축은 시민군이었다.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자원해 이뤄진 군대는, 로마가 인근 도시들을 굴복시키고 라틴 동맹의 주축으로 떠오르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숫자 상 시민군의 주축이었던 평민의 권리 주장은, 그들의 군대에 대한 기여가 점점 중요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로마 군대의 승리는 곧 로마 평민의 권리 신장을 불러왔다. 

이런 추세는 2차 포에니 전쟁 이후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니발 전쟁이라 불린 이 전쟁에서 로마 정치의 한 축이었던 평민파는 상대적으로 몰락해버렸다. 전쟁 초기 한니발과 맞서 참패를 당했던 대부분의 집정관들이 평민파였다는 점, 그리고 젼쟁 중 평민파의 지지층인 자영농이 전쟁의 여파로 타격을 입었다는 점 등이 결정적인 평민파의 몰락을 불러왔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세계에는 토지를 잃은 빈민들이 늘어났다. 이 빈민들을 군대로 흡수한 것이 마리우스의 병제 개혁이었다. 개혁의 핵심은 군대 입대 조건이었던 재산 규정을 없앤 것이었다. 당연히 무산자들이 군대로 흘러들어왔다. 이들은 군대에서 두둑한 몫을 챙겨 제대하는 것이 제일 목표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무산자들의 에너지를 적절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즉 굶주린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이 필요했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로마 정계는 이제 원로원과 일부 군벌들의 대결 장이 되버렸다. 포에니 전쟁 이후 원로원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옥상옥이 됐다. 이 원로원에 잘보인 몇몇 인물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운 뒤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만들고, 그 것을 이용해 원로원과 갈등, 또는 협력하며 정계의 실력자가 되는 것이 이후 공화정 말기까지 이어진 일반적인 로마 정치의 패턴이 됐다. 카르타고 정복 이후 로마의 해외정복 사업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군벌들의 각축을 국내에서 적절히 소화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참고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1.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임마뉴엘 월러스틴은 원래 아프리카 지역연구 전공이었다. 아프리카 지역 국가와 사회의 변동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월러스틴은 한 국가나 한 사회만을 들여다봐서는 그 변동의 원인 - 과정 - 결과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다다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월러스틴은 적절한 분석단위를 좁히거나 확장해야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론적으로 그는 국가나 사회를 하부단위로 갖는 하나의 세계경제체제를 분석단위로 삼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월러스틴 스스로 페르낭 브로델과 마르크스에 학문적으로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 사람의 영향은 세계체제론은 사실 사회 전체에 대한 구조기능적인 시각과 역사적 시각과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 있다. 구조기능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제가 특정한 기능을 하는 하부단위들간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해 성립되고 유지된다는 것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은 그 체제가 역사적인 일련의 조건들과 전개과정, 우연 등의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나타나고 사멸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겠다.

2.
세계경제체제는 로마나 중국과 같은 세계제국체제와는 구별되는 분석단위다. 그 것은 세계제국과 같이 매우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에 걸쳐 분포해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결정적으로 세계제국들과는 달리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권위체가 부재한다.

세계제국체제에서 주변에서 중심으로의 잉여는 공납의 형태를 띄게 되기 때문에 그 방대한 조공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기구의 유지와 중앙-지방간의 행정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로 대두된다.

이런 세계제국체제와 달리 세계경제체제는 중앙의 권위체가 부재한 가운데 경제적 잉여의 흐름이 주변부에서 중심부 국가들로 흐르도록 보장해 주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중심부의 비교적 강력한 국가기구들의 존재다. 이 국가들은 중심부의 특정 계급-부르주아지-에 대해 경제적 잉여를 보장하는 한편, 체제 내의 통일성과 체제유지 비용 전체를 감당할 필요성이 없다는 점에서 제국체제의 중앙집권기구들과 대조된다.

3.
이 핵심부 국가들에게 있어 국가의 형성을 촉진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계기와 관련이 있다. 그 시작은 16세기 유럽의 지리적 팽창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계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3-14세기에 걸친 유럽 봉건사회 체제의 위기와 그에 따른 유럽 사회 전체의 팽창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한다. 유럽 중세를 특징짓는 중세 봉건사회조직이 이 13-14세기에 경제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특정 유형의 돌파가 필요하게 되는 데 당시의 유럽은 결국 대양으로의 지리적 팽창을 택하게 된다. 그 팽창은 세계경제체제의 필수적인 성립 조건이었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 하에서는 유럽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 가운데 실현가능한 유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런 조건에서 팽창은 시작되었다. 이 지리적 팽창은 지리적 경계를 가지는 국민국가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어느 것이 어느 것의 원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리적 팽창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국가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국가기구의 뒷받침이 있었고, 강력한 국가기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담세 계급인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성공이 필수적이었다.

3.
재미있는 지적은 세계경제체제에서 핵심부 국가들 가운데 종종 세계제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국가들이 있지만, 그 시도들은 어김없이 실패한다는 것이다.

16세기의 에스파냐, 17-18세기의 프랑스, 19세기의 영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국가들 모두 그 시기의 핵심부 국가들이었으나 지나친 지리적 팽창과 그에 따른 비용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운명을 맞는다.

4.
즉 16세기 이후 지리적으로 끊임없이 팽창을 거듭해온 근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는 특정한 중앙 권위체의 부재 속에서 몇몇 핵심부 국가들의 강력한 국가기제가 그 중앙 권위체의 몇몇 기능을 대신해 온 것이다. 그 기능은, 그러나 제국의 행정부와 구별된다. 그 것은 특정한 정치적 통일의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다. (이 비용은 단적으로 말해 로마나 중국이 국경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치뤄야했던 전쟁 비용의 부담에서 핵심부 국가들이 아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핵심부 국가들의 기능은 사실 경제적 기능에 집중되었다. 실로 근대의 초기 국가들은 정치-경제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핵심부 국가들의 강한 해군력은 대개 무역로의 확고한 장악을 위해 이용되었다. 때로는 직접적인 약탈과 지리적 정복에도 동원되었다.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비조달은 독점권 부여, 국채발행, 징세청부, 관믹매매와 같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뤄졌는데 이 수단들 모두 특정한 계급에 국부의 흐름을 보장하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16세기 에스파냐와 대은행가 푸거가의 흥망성쇠, 19세기 영국과 로스차일드 가의 흥망성괴가 어느정도 궤를 같이 하는 일종의 운명공동체였다.

5.
월러스틴의 정의에 따르면 세계경제체제는 16세기 근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아래 팽창해온 체제이다. 이 체제는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일 뿐이지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4백년간 지속되었을 따름이다.

기원전의 지리적 팽창을 끝낸 로마공화국은 기원원년 무렵에 세계제국체제로 전환한 뒤에도 4백년 넘게 지속되었고 중국역시 세계제국체제가 당/송 연대에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로는 1천년 넘게 지속됐다. 연대로만 비교해보면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특별히 성공적인 체제는 아닌 셈이다. 물론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유례없는 내외부적 경제적 팽창을 가능케 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화려한 어조로 찬양하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업적은 괜한 과장이 아닌 것이다.

2013년 7월 14일 일요일

참고글: 1차 대전과 참호전


세계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인간의 무지와 무능이 만들어낸 지상의 지옥이었다.

"1916년 7월 1일 솜 전투 첫 날에 발생한 사상자 수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8 사단 두 개 연대 전체가 오비예 주위로 포진한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에게 몰살당했다. 2시간 만에 이 사단은 장교 300명 가운데 218명을, 사병 8.500명 가운데 5,274명을 잃었다....이 참극이 단 하루로 끝났나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존 엘리스, 참호에서 보낸 1460일)

나폴레옹 종전 이후 유럽은 크림 전쟁을 제외한다면, 거의 1세기 가까이 열강들 간의 직접 충돌이 없는 평화의 시기를 보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아무도 그 전쟁이 그 같이 길어지고, 잔인하게 끝날 줄 예상하지 못 했다.

서부 전선에서 직접 맞붙은 프랑스-영국과 독일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프랑스는 참전병의 3분의 1이 전사했으며 (상류계급의 참전이 일종의 사회적 의무였던)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재학생 중 5분의 1 가량이 전쟁으로 전사했다. 에릭 홉스봄은 1차 대전으로 "영국 상류계급 가운데 한 세대가 사라졌다"로 썼다. '반지의 주인'을 쓴 톨킨은 1차 대전에 절친한 네 명의 친구와 함께 참전해 서부전선에 배치되었지만 전쟁 후 살아돌아온 것은 그 한 명 뿐이었다. 톨킨은 반지의 주인의 전투에 관해 써내려가면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같은 대량살상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된 솜 전투에서만 양측 합쳐 120만명이 죽었다. 도시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죽음을 쌓아올릴 수 있었는가. 대답은 '맥심 기관총'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1차 대전을 무의미한 참호전으로 몰고간 것이 바로 이 기관총의 도입이었다.

서부전선의 전쟁 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전투가 벌어졌다. 병사들은 장교의 지휘 아래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일점전개 돌격전술이었다. 이 같은 이른바 "명예로운 돌격"은 기관총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돌격하던 소대는 지휘하던 장교까지 죽은 다음에야 돌격을 멈출 수 있었지만 본진으로 돌아온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돌격할 수 없던 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호를 파고 웅크렸다. 서부전선은 그렇게 거대한 참호가 되었다.

돌격 전술은 전쟁의 말기까지 수정되지 않았다. 탱크가 솜 전투에서 처음 도입되었으나 그 것을 활용한 전술이 따라오지 못했다. 지휘를 맡은 야전 장교들은 사관학교에서 배운 전술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갈팡질팡했으며 전선의 교착을 답답하게 여긴 정치가들과 군수뇌들은 무리한 작전을 세웠다. 그 사이 낀 그 병사들은 여전히 기관총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오직 병사들만이 그들이 무의미한 목적을 위해 돌격했고 죽었다는, 그리고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무의미한 지옥이 4년간 계속된 곳이 서부전선이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아 귀환한 이들의 정신 세계가 어떠했는지 추측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대개 전쟁 혐오자가 되거나(톨킨이 택한 길이었다) 전쟁 찬미자가 되었다.(히틀러가 택한 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에서는 후자가 정권을 잡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플랑드르 지방의 축축하고 추운 밤을 통해 침묵 속에서 행군했다. 안개를 뚫고 낮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강철로 된 아침 인사가 윙 소리를 내면서 우리 머리 위로 날아오더니, 날카로운 폭발음을 내면서 닥은 탄알들이 대열 사이로 날아 축축한 땅바닥에 꽂혔다. 하지만 작은 연기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200개의 목구멍에서 최초의 만세 소리가 터져나와 죽음의 심부름꾼을 맞이했다. 그런 다음 딱딱하는 소리, 외치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시작되고, 우리는 불타는 눈길로 앞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달려나가 마침내 순무 밭과 산울타리를 지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이었다." (히틀러, 나의 투쟁)

1차 대전 이후 나찌의 파시즘에 가장 열렬히 복무한 이들은 바로 이런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옥에서 귀환한 형제들이었으며 그 지옥을 겪지 않은 모든 이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했다. 그들은 서부전선을 잊지 못했고 극복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서부전선으로 바꾸어 놓고자 했다. 나찌는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이는 서부전선의 참호 속에서 계층 간의 온갖 한계를 넘어 피로 맺어진, 이른바 참호의 사회주의였다. 이들이 돌격해야 할 적들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유태인들이었다.

한 편으로 서부전선의 기억은 히틀러의 독일을 마주한 프랑스의 무기력과 주저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마지노선이 돌파당한 프랑스는 병력 상 독일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신속하게 항복했다.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감히 되풀이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또 두려워했다. 히틀러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전쟁을 혐오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는 처칠(홉스봄은 처칠을 가리켜 1914년 이후 내렸던 모든 정치적 결정이 틀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올바른 선택-히틀러와 맞서는 것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고 장난스럽게 평한다)과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혐오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던 루즈벨트였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참고글: 주경철의 '대항해시대' 정리

주경철의 [대항해시대]는 15-18세기 근대 세계의 해양팽창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몇 가지.

1.
15-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이 해상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산업혁명을 거쳐 유럽의 우위와 확고해지기 전까지 사실 유럽이 동아시아나 인도에 비해 확고하게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해양팽창은 일방적인 침탈의 역사라기 보다는 서양의 팽창에 이은 다른 지역의 적극적인 대응과 전환의 역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럽의 팽창은 18세기까지 확고한 우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은 대개 중요한 지점에 거점을 설치하고 그 거점들을 잇는 무역 루트를 개발하고 장악하는 방식으로 팽창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개인들은 각 거점에 활동하던 이른바 "상업 디아스포라"들이다. 점과 선으로 이어져 있던 이 디아스포라들의 집합이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 디아스포라들은 서로 흩어져있었으나 또한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기도 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좋은 사례이다. 이들의 무역은 국가의 철저한 무력과 금융 양편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그러나 유럽이 내륙으로 파고들어가고 확고하게 식민지를 구축한 것은 사실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시기가 되서야 비로소 유럽국가 기구들이 완전히 근대적인 형태를 띄고 다른 지역을 압도한 덕분일 것이다.

2.
근대 세계의 해양팽창을 특징짓는 것 중 하나는 폭력의 세계화다. 이런 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유럽식 군대와 전쟁의 확산이다. 최초에 유럽인과 접했던 문명, 특히 동남아시아 해상권이나 신대륙의 선주민들은 유럽식의 전쟁 관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의 전쟁은 오늘날의 스포츠와 비슷하게 치러졌다. 사상자는 거의 없었으며 복잡한 관례와 의식으로 통제되었다. 전쟁은 대개 지배 확장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런 관습과 전통 아래 살던 이들에게 유럽인들의 폭력적인 전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항해 시대 초기 선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은 이런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 컸다. 그러나 초기의 접촉에 의한 충격이 지난 뒤 선주민들 역시 유럽의 전쟁 방식을 곧 받아들였다. 말과 총을 받아들여 멸망 직전까지 끈질기게 저항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좋은 예이다.

3.
대항해 시대 해상생활과 선원들의 실상을 다룬 파트가 특히 좋았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했던 선원들의 문화가 근대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선취했다는 것, 당시의 무역이 일종의 벤처 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등은 재미있고 의미있는 지적이다.

4.
이 책의 3부는 근대 해양팽창의 결과를 다루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 대항해시대는 폭력의 세계화 과정이었다. 이 폭력은 대개 비유럽 지역의 전통적인 사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몇백년동안 자신들의 관습과 문화를 발전시켜오며 살아오던 수많은 부족들이 유럽과의 접촉으로 멸망했다. 노예로 팔리거나 플랜테이션 노동자가 되거나 하는 편은 차라리 살아있기라도 한 편이었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병원균들-천연두, 매독 등-은 소리없이, 빠르게 유럽과 접촉한 사회를 절멸상태로 몰아갔다.

말과 소, 양같은 유럽의 동물 뿐 아니라 작물들까지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었다. 남미와 호주, 동남아시아의 거대한 삼림이 파괴되고 목초지가 되었다. 멕시코의 광대한 초원은 지나친 목양사업으로 인해 사막이 되기도 했다. 이런 것들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었다. 대항해시대 이전에 확고한 문명권을 이루었던 아시아 사회를 제외한 다른 문명들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파괴되거나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아시아 역시 곧 그렇게 될 운명이었지만.

물론, 다른 사회의 사람들이 그저 폭력의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그 충격에 저항해 나름의 흐름을 만들었다. 여러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은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중국과 일본은 저항했다. 기독교의 전파는 현지의 문화와 융화될 수 밖에 없었다. 아메리카에서 전해진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는 많은 이들을 기아의 위험에서 구해냈고, 19세기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일조하기도 했다. 유럽의 폭력에 맞서 신세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를 조용히 건설해나갔다. 이 조용한 흐름들이 19세기 민족주의의 발흥과 만나, 독립의 물결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5.
유럽의 근대는 폭력의 동력들이 차근차근 축적되온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대항해시대의 팽창이 폭력적인 방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 내부의 국가와 자본 역시 폭력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윌리엄 랭어는 1914년의 세계 1차대전을 가리켜 그토록 끔찍하고 잔인하며 무익했던 전쟁이 실제로는 별다른 이유없이 지속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미스터리이자 비극이라 말한 적 있다. 어쩌면 근대 내내계속 축적되어온 폭력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터져나온 것은 아닐런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20세기 현대사의 흐름

20세기는 전쟁으로 시작됐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이 4년 동안 유럽 대륙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 넣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쟁이 그토록 대규모로, 또 오랜기간 계속 된 것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간의 외교관계가 복잡해지고, 국가의 자원 동원 능력, 전쟁 수행 능력이 크게 향상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각 국가는 전면전을 대비해서 대규모의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하는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이런 계획은 한번 실행되면 수정되거나 되돌리기 어려웠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자 각 국은 계획에 따라 자원을 동원했고, 이 자원이 먼저 소모되기 전까지 전쟁은 교착 국면이 지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른바 '참호전'의 시작이었다.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1차대전을 끝으로 19세기의 자유주의는 끝났다. 전간기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러시아에서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자리잡았고, 미국과 독일에서도 더 강해진 국가가 전면에 나서 사회를 계획하고 개조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이런 경향이 거 강해졌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의 거시경제 조정이 주류가 됐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들 중에서도 이런 국가가 주도해 사회를 개조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런 흐름은 결국 엘리트 대 대중의 구분을 더 뚜렷하게 나누는 지적 조류를 강화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대대적인 경제 부흥은 농경의 시작 이후 인류 사회에 가장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다. 식량 생산, 위생시설 등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도시의 인구가 폭증했는데, 이는 인류 역사 상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농촌 사회 우위의 인구 거주구조에 대한 대반전이라 평가할 수 있다.

맥닐은 인류 역사에서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농촌 사회가 인류 역사를 지속시켜온 원동력이라 보고 있다. 농촌은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운영하고 도시에 노동과 자원을 공급하며 사회를 지속시켜주는 각종 도덕과 전통을 지속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세기의 발전은 그런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20세기 역사는 도시 문명 중심의 역사다. 인구의 재생산은 도시에서 이뤄지며, 사회의 관습과 도덕도 도시에서 나날이 갱신되고 있다.

수송수단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은 농촌이 도시에 예속되고, 또 도시와 큰 차이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게 했다. 현대의 농촌은 일종의 낙후된 도시로서 존재한다. 이런 문명이 앞으로 얼마나 생명력을 가질지 좀 더 두고봐야 한다고 맥닐은 지적한다.

2013년 7월 6일 토요일

참고글: 로크와 명예혁명, 17세기의 지적 배경


 
명예혁명은 영국 의회의 의원들이 당시 영국의 왕이던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 과 메리 부처를 불러들여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왕위 교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명예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치경제적 결과이다.

윌리엄 3세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받아들여 이것이 권리장전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핵심은 국가의 재정 정책의 주도권이 의회로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권리장전 이후로 영국의 왕들은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게 되었고 예산 및 전쟁관련 정책 결정에서도 역시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제임스 2세가 축출된 것은 바로 그런 권리장전의 내용과 상반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의회의 권리선언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권리선언을 하나의 법으로 공포한 명예혁명을 주도한 것은 의회에서도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신흥부르주아지 계급에 속한 의원들이었다. 그들이 윌리엄과 메리 부처를 추대한 것은 일차적으로 메리가 제임스 2세의 아들에 이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공이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다는 것도 의원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당시 유럽의 최대 상업국가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이었으며 오렌지 공 월리엄은 일종의 상인들의 대표로서 공화국을 통치했다.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영국의 의원들로서는 확고한 프로테스탄트이자 상인들의 통치자인 월리엄 공에게서 제임스 2세와 같은 위험 요소는 없을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17세기 내내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 상의 치열한 경쟁자였다는 점이다. 두 나라 상인들은 대서양과 인도로의 중계 무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영국은 16세기 무렵 1차 엔클로저 운동을 통해 이미 양모의 가공 및 수출 산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 부상했고,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모직물 공업이 번성했다. 특히 상업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과 인도양 쪽으로 넘어가면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변방의 약소국에서 유럽 최고의 상업 국가로 탈바꿈했다.

양 지역의 상인들은 큰 부를 쌓게 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 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공화국의 길에 들어섰다. 네덜란드 혁명의 주체는 각 도시의 실질적인 실력자들인 상인 계급이었다. 표면상 명예혁명과 네덜란드 혁명 둘 모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갈등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상인 계급과 전통적인 지배계급 간의 갈등이 깔려 있었다. 상인 계급에게 있어 군주의 절대적 지배는 무거운 과세와 상업 활동의 규제를 뜻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업 부르주아 계급 모두 혁명의 결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의 재정 기구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는 상업 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유럽 최고 수준에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종교 개혁으로 인해 카톨릭 신학의 전통적인 규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연 탐구 활동이 권장되고 있었다는 점이 과학발달은 촉진했다. 두 나라는 17세기 유수의 자연과학자들을 배출했다. 어떤 점에서 17세기는 뉴턴의 세기였다. 그는 중세적 우주관을 완전히 탈피해 근대적 자연관을 완성해냈다. 그의 연구 업적은 그가 속한 왕립학회를 통해 공유되었다. 네덜란드의 호이겐스는 영국의 왕립학회 회원이면서 뉴턴과 서신교환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유럽 과학계는 그런 서신교환을 통해 하나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다.

로크 역시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그는 뉴턴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 자신도 로버트 보일의 기체 역학 실험을 돕기도 하는 등 과학자로서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그 당시 왕립학회 회원들은 자연과학의 탐구에 있어 경험주의적 방법에 경도되어 있었다. 경험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적 방법론, 즉 가설에 의한 추론을 배척하고 실험에 의한 경험적 자료의 축적을 통해 하나의 법칙을 도출하고자 했다. 뉴턴은 이런 경험주의적 방법을 통해 그의 만유인력 법칙을 도출해냈다. 그는 우주의 모든 물체들의 운동 원리를 단 3가지 수학법칙으로 간결하게 포현해냈다. 뉴턴의 우주는 수학으로 표현된 기계적인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였다. 로크는 그런 기계적 우주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통치론>에서 로크는 하나의 가설적인 상태인 자연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자연 상태는 그 자체로 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인간들이 그저 모여 있는 상태이다. 이들의 행위는 자연 상태에 내재한 하나의 법칙, 자연법에 의해 규율된다. 이 자연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관철되는 법칙이며 오직 이성에 의해 발견되고 준수되는 법칙이다. 로크는 그 자연법을 노동에 의한 재산의 획득과 그에 대한 권리주장이라 봄으로써 재산권의 획득과 보호를 하나의 보편적 법칙으로 바꾸어 놓았다.

참고글: 존 로크의 '통치론' 정리

1.
로크의 <통치론>은 지금 읽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열심히 늘어놓아서 당황하게 된다. 그건 로크가 실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사고에 로크의 주장이 은연 중에 깔려있다는 방증이다. 내 생각에, 현실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근대 정치철학의 최종 승자는 로크다.

2.
로크의 주장을 낮게 보는 이들은 <통치론> 자신의 스폰서가 정권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적어놓은 책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이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보다 로크의 통찰이 빛나는 지점은, 역사적 과정의 전개에서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인지를 탁월하게 포착하고 그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한 이론적 기초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내놓았다는 데 있다.

로크는 상업 자본주의가 만개하던 시대의 영국에서 살았다. 그가 살았던 17 세기 당시 영국의 전통적인 지배계층은 토지귀족이었으며 상업으로 축재를 하기 시작하던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던 시점이었다. 로크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었던 명예혁명은 전통적인 토지귀족 계급과 상업으로 축재를 한 부르주아 계급 간의 최초의 격돌이었다. 로크의 직업은 의사였는데, 당시의 의사는 지금으로 치면 정신과 전문의쯤의 역할을 했다. 그의 주된 고객들이 대개 부르주아 계급이였던 탓에 그들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로크를 후원했던 세력, 더 정확히는 그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샤프츠베리 백작은 당대의 정치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주된 조언자이자 보좌역이었던 로크의 명성 역시 덩달아 유명해졌다. <통치론>이 오늘같은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로크 자신이 당대에 정치적 승리자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치론>이 오늘날 정치적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통치론>에 담긴 주장이 부르주아 계급의 구미에 딱 들어맞은 덕분이다. 로크는 어찌보면, 당대의 역사적 흐름을 꿰뚫어보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직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3.
<통치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크게 자연법이론, 사회계약론, 저항권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논의를 하나로 잇는 큰 줄기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간의 재산권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며 정부의 목적은 바로 그 재산권의 보호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별로 길지도 않은 <통치론>에서 잊을만하면 반복된다.

로크는 재산권을 폭 넓게 정의한다. 개인의 부 뿐만이 아니라 생명과 신체의 자유같은 것도 포괄할 수 있는, 인신의 권리 모두가 재산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노동을 투여한 모든 것은 그의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로크의 주장이다. 재산권은 오직 타인의 필요를 침해하는 것에 의해서만  한계지워질 뿐이다.

로크의 주장은 재산권의 정의를 교묘하게 넓히면서 그것을 자연권이라 정의하는데서 그 탁월함이 있다. 그는 재산권을 천부적인 권리로 격상시킴으로써, 다른 모든 것의 상위에 두고 그 것을 보호하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라 논증하면서 통치의 원리를 이끌어 낸다.

사회계약론은 별 거 없다. 사람들은 자연상태에서 그들의 천부적인 재산권을 누리며 자유롭게 산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는 타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재산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오직 자연상태의 자유인들은 오로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국가의 통치 아래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진 정부는 시민 개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 되고 그 노릇을 잘 못하는 정부는 전복되어 마땅하다. 이 것이 로크의 <통치론>이 말하는 핵심이다.

4.
로크의 정치철학은 플라톤의 그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 것은 고대와 근대의 차이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그 찬반여부나 가능성여부와는 무관하게 여하튼 "덕의 공화국"이다. 그에게 있어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불어살아감으로써 완성되는 존재이며, 그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올바름'에 기초해야 한다. 플라톤은 사람이 무엇보다 선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였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 영혼을 더 높은 것으로 갈고닦아 인간으로써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로크는 근대의 사람이었다. 근대는 공동체와 분리된, 공동체에 앞서는 개인이 나타난 시대였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 보았고 뉴턴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기계적인 법칙이며, 그것은 규명될 수 있는 힘이었다. 근대는 '내'가 가장 우선되는 사회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가 일차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증명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어야 했다.

플라톤은 국가를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한 올바른 기초에 놓길 원했지만 로크는 국가를 재산의 보호라는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보았다. 그는 물질의 운동이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이라는 당시의 세계관을 철저하게 믿었다. 비록 뉴턴의 '힘'은 비물질적인 힘이었지만, 그 것은 규명되지 않았다.(뉴턴 자신은 힘이 어떤 존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힘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아는 것, "그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물질은 그가 가진 재산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비물질적인 것들은 경험될 수 없고 증명될 수 없으니 배제되었다. 그저 신이라고 말하며 눙치듯 넘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플라톤의 <국가>가 올바른 삶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따져물었다면, 로크의 <통치론>은 그저 국가가 기초해야 하는 가치의 형식 만을 중요시했다. 그 삶은 그저 내가 가진 재산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영혼이라 말한다면, <통치론>은 그저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인간이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머지야, 로크에게는 내 알 바 아니었던 듯 싶다.

그렇게 로크는 정치적인 것의 범위를 극적으로 좁혔다. 경험 가능하며 뚜렷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 만을 중요시했던 로크에게 있어 이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5.
로크는 <통치론>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국가는 이제 선을 위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재산의 보호를 위한 도구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그 것은 그 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인민이 자유로부터 철학자왕이라는 권위로의 도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로크의 국가는 오로지 그 인민의 재산을 보호할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개인에게 맡겨두었다. 그가 어떻게 살건 간에, 불행하던 행복하던, 성공하던 망하던, 배가 터져죽던 굶어죽던, 그건 개인의 삶이지 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적어도 가능성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로크의 공화국의 시민은 플라톤의 공화국의 신민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것이 비록 굶어죽은 자유라 하더라도.

6.
오늘날의 자유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국가의 목적을 논한다면 그들이 국가가 가진 목적과 한계는 뚜렷하다. 그 국가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국가다. 그게 안되는 국가는 전복되어야 마땅하다. 공권력을 이용해 인민의 생명을 앗고 재산을 강탈해 그들의 배를 불리려는 자들은 그저 날강도떼에 불과하지, 자유주의자라 불러서는 안 된다.

로크가 오늘날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아마 용산 참사를 애도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경찰은 아마 로크를 때려잡을 것이고. 아니, 영어로 방송할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은 비키라고. 17세기 영어 악센트로 발음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참고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정리


1.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군주가 어떻게 집권하며 어떠게 그 국가를 유지하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군주론>이 그 같은 권력 투쟁에서 군주 개인이 승리하는 방법을 담은 처세서/지침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2.
<군주론>은 군주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이 대개 일치한다는 대전제 아래 논의가 전개된다. 그 이익은 한마디로 말해 생존이다. 국가의 안보야 말로 군주가 인민을 대표해 추구하는 목적이며 그 수단은 곧 가차없는 행동력 - 국가 이성이다.

3.
마키아벨리가 생존을 국가 전체의 목적이라 본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탈리아 정세를 반영한 것이다. 르네상스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이탈리아는 용병대장과 은행가의 시대였다. 이 양자는 모두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였으며 그 수단은 군대와 돈이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4차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런 시대를 잘 보여주는 예다. 베네치아는 성스러운 전쟁을 식민지 건설과 돈벌이를 위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바꿔놓았다. 그 비즈니스에 도덕과 종교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4.  
군주와 인민의 이익이 공통의 것 - 생존이라는 가정은 사실 터무니 없는 것이다. 근대 정치는 군주/국가와 인민 간의 이익이 대립한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했다. 정치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곧 양자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이 같은 방식의 군주와 인민의 대립은 생소한 것이었을 것이다.

5.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군주는 권력을 추구(해야)하는 존재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며 그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독특한 결론이다. 그가 말하는 군주의 덕(virtu, 비르투)은 고대나 현대적 의미의 덕이 아니다. 그 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능력, 도덕에 구애됨 없이 냉철하게 손익을 계산해 수단을 활용하는 역량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비르투가 가득한 인간이야 말로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으로 본 군주다.

6.
마키아벨리의 업적은, 무엇보다 정치를 종교에서 분리해낸 것이다. 그는 정치에서 도덕과 가치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정치를 권력 추구의 문제로 한정시켜 논의했다. 그 것은 정치를 학문으로 만들려는, 즉 과학적으로 정치 문제에 접근하려는 태도였다. 이 것은 마키아벨리 특유의 정치적 현실주의로 귀결되었다.

7.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선험적인 일반적 공리 몇 가지를 도출해낸다. 그 것은 과거의 사례와 당대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은 공리들이다. 그 공리들은 대개 인간은 악하며 이익 추구를 하는 존재다,라던가 군주는 도덕에 구애됨 없이 손익을 계산해야 한다, 인민의 호의를 사는 것이 권력 추구에 도움된다는 따위의 것들이다.

8.
마키아벨리는 엄격한 의미에서 합리주의적, 또는 경험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진실로 믿었다는 점에서 그는 경험주의적 방법을 취했고, 그의 논의를 일반적 공리 위에서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적 방법을 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정치를 근대의 과학적 원리 위에 놓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과학으로서의 정치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뤄야 했다.  

9.
가차없는 생존투쟁으로 가득찬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세계관은 다른 무엇보다 국제정치의 현실에 가장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는 로크의 <통치론>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관점이다. 국제정치에서 국가의 생존은 무엇보다 최우선의 목표가 된다. 국가의 무력 사용은 그 안보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정당화된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10.
마키아벨리는 냉철하게 이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살아남는 것이 최선의 목표인 세계에서 도덕을 논하는 것은 파멸의 지름길이었다. 그에게 있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는 법이다. 이런 세계관은 홉스와 로크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홉스는 그 생존 투쟁을 개인간의 관계에 적용한 뒤, 오직 그 폭력을 지고의 폭력을 가진 괴물 리바이어던만이 끝낼 수 있다고 선언한다.

11.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 마키아벨리의 시대에 국가간의 전쟁은 아직 낭만적인 수준이었다. 그것은 제한전이며 상대의 절멸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의 전쟁은 총력전이며 상대의 절멸만이 목적이 되었다. 이 것은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따르면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나, 또한 파국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기도 했다.

12.
근대철학자들은, 상스럽게 말하자면, 삽질하지 않는 개인을 찾아내고자 했다. 마키아벨리는 그 삽질하지 않는 개인을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가차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국가이성에서 찾으려 했다. 헤겔은 그 논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 시민사회의 이기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영역으로서 국가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삽질하지 않는 국가는 서로에게 총질을 해댔고, 이로써 근대의 세계는 두 차례, 파국 직전까지 갔다.

13.
마키아벨리가 열어젖힌 근대의 정치 세계는 플라톤의 덕의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위는 현실에 압도되었고, 그 자체로 선한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은 그저 계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 자신의 정치적 현실주의가 열어젖힌 세계를 보고 마키아벨리가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군주론>을 고쳐쓰지 않을까.  

참고글: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정리


1.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서술되었으며 그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은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가리킨다.

2.
맑스는 자본론을 총 4권으로 기획했으나 생전에 직접 출간한 것은 1권뿐이다. 나머지는 엥겔스가 맑스가 남긴 노트를 편집해 출간 한 것이다. 즉, 자본론 1권은 맑스가 직접 감수한 것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한다.

3.
자본론 1권의 구조를 봐야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전체 흐름을 알 수 있다. 자본론 1권은 자본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서, 1권 4편에서 7편에 이르는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에 대한 분석이 그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이 분석을 위해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상품과 화폐이다. 자본은 화폐의 형식으로 축적되며, 화폐는 상품의 한 특수한, 일반적 등가형태이므로 이 둘에 대한 분석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본론 1권에서는 상품과 화폐 분석이 1편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이 시작되는 지점, 즉 자본의 역사적 기원으로서 시초축적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이 순환하는 양상과 최초에 시작하는 양상은 질적으로 다르며, 또한 그 시작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알아야만 현재의 자본 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자본론 1권의 마지막을 이룬다.

4.
자본론 1편은 상품과 화폐에 관해 다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론은 상품의 분석에서 시작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상품 생산을 기초로 삼는 것이며 상품 안에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가 추상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고도의 추상이다.

상품이 성립되려면 교환되어야 한다. 교환의 척도는 가치인데 이 가치는 상품에 투입된 추상적 노동 일반의 양에 따라 비교된다. 또한 그 가치를 비교하기 위한 하나의 일반적 등가형태로서 척도가 필요한데 그 것이 화폐이다. 화폐는 상품 교환과정에서 파생되지만, 곧 자본 축적의 핵심이 된다. 

상품과 화폐의 교환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수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뒤에 은폐된 역사적/사회적 관계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다. 일례로 상품의 일반적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가치의 척도로서 질적으로 동등한 이른바 추상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는 오직 역사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며, 그 뒤에 노동의 상품화와 자본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

2편은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체제이다. 이는 간단한 도식으로 M-C-M`라 표현된다. 상품 생산과정에 투입된 자본은 그 투입된 자본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이끌어내야 하는 모순에 빠지는데 이를 위한 조건이 바로 노동력의 자유로운 구매와 판매이다. 이 노동력은 상품의 가치를 창조하는 추상적 노동일반과 구별되는 물리력의 소비이다.

3편은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투입된 자본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핵심적인 원리가 바로 잉여가치이다. 간단히 말해 노동은 그 것이 받는 가치(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낸다. 잉여가치는 다시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로 나뉜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을, 상대적 잉여가치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간의 비율을 가리킨다. 축적에 있어서는 이 둘 모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적 잉여가치이다.

4편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늘이기 위해서는 필요노동을 줄일 필요가 있다. 필요노동을 줄이는 것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를 줄이는 것인데, 이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들어가는 각종 생활수단의 가치를 줄이는 것, 즉 노동생산성의 제고를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양식의 다양한 재편이 요구된다. 사회는 협업과 분업, 매뉴팩쳐 체제를 거쳐 마침내 기계제 대공업에 기반한 생산 체제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한다. 기계제 대공업 사회에 이르러 노동자는 탈숙련화되어 생산조직 자체의 부속물로 전락하게 되며, 이에 따라 생산조직 내부의 독재와 생산조직 외부의 무정부성 간의 모순이 극에 달한다. 이 모순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산업생산의 불안정성이 파생된다. 

5편은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이 편에서 맑스는 앞에서 논의한 것을 일정부분 반복하면서 잉여가치 생산에 관한 일반적 공식을 몇 가지를 다룬다.

6편은 임금에 관한 논의다.

임금은 흔히 노동의 가격이라 하지만 노동 자체가 가치를 창조하는 한 이는 동어반복이다. 실제로 노동자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매한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노동의 가격으로 은폐하는 것에 착쥐 관계의 본질이 있다. 임금은 시간급과 성과급의 두 형태로 나뉘는데 이 두 형태 모두 착취관계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7편은 자본의 축적과정에 관한 논의다.

이 편은 자본론 1권의 절정이자 핵심을 이룬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탱하기 위한 단순재생산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는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가능하기 위한 토대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임노동자의 생산수단에의 접근이 계속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 이르는 고찰까지. 여기에 이르러 자본주의 사회 기본 운동법칙이 밝혀진다.

상품은 교환법칙에 따라 교환되지만 그 것 자체의 모순에 의해 부등가 교환의 토대를 마련한다. 최초의 자본축적-시원적 축적-은 상품의 등가교환 법칙에 의해 마련되었을지 몰라도 자본의 축적이 진행되면서 이제 축적은 오직 잉여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즉, 노동력이 부등가교환되는 것이 잉여가치의 축적에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노동생산성, 착취도, 노동강도 등의 기타 요인들은 잉여가치의 축적량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축적이 진행되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변화가 온다. 자본의 축적 자체는 노동 수요의 증가를 불러오지만 자본 축적이 진행되면 고정자본의 상대적 크기가 늘어나면서 노동인구의 일정 부분이 산업예비군으로 남게 된다. 이 산업예비군이야 말로 노동계급을 상대적 빈곤과 자본에의 예속상태로 남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이런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기적 공황과 노동계급의 영속화된 빈곤의 근본적 원인이다. 즉, 산업예비군은 호황기에 급속한 생산의 확대를 가능케하며 또한 그 확대로 인한 축적으로 인해 다시 실업상태로 몰리게 되는데(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변하면서) 이로 인해 공황이 야기된다. 그에 따라 산업예비군은 호황기에는 생산조직에 유입되고 불황기에는 축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노동계급의 생활조건 개선에 대한 요구를 무력화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불안정성이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안정성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모순 위에 있다. 

또한 자본의 축적은 집적과 집중의 두 방식에 따라 이뤄지는데 집적은 단순한 자본의 축적이며 집중은 둘 이상의 자본이 합쳐지는 과정이다. 특히 공황기와 회복기에 두드러지는 것이 이 자본의 집중인데, 이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경쟁의 필연적 결과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의 생산수단은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

8편은 시초 축적에 관한 장이다.

"자본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리고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난다."

4.
자본론의 분석 가운데 일반적인 오해를 사고 있는 것 하나는, 맑스가 자본의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노동계급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절대적으로 하락할 것이라 예견한, 이른바 궁핍화 명제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2차대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의 생활상이 급속히 개선된 점을 들어 맑스의 예측이 틀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자본론을 읽어보면 맑스의 주장은 노동계급 물질적 생활조건이 상대적 궁핍화되는 것, 즉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을 예건하고 있으며,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절대적 수준 자체는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어나는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 경향을 적절히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5.
자본론에서 다루는 '자본'을 자본가로 오해하면 안된다. 맑스는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개별 자본가의 행동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본은 하나의 실체라기 보다는 과정이며 임노동과 독점된 생산수단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관계의 현실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개별 자본가나 노동자의 행동이나 의지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6.
자본론의 분석은, 맑스가 인용하는 자료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책이 씌여지던 19세기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맑스 자신이 자본론을 예언서로 썼다기 보다는 해부서로 썼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따라서 자본론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특히 맑스가 인용한 자료들이 대개 당대의 정부보고서나 기사, 학자들의 저술들임을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대의 현실을 살피고 그 것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묶는 일이지 이미 죽어버린 이들의 책을 죽어라 들이파면서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능사가 아님을, 자본론을 읽으면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7.
하나 더, 자본론 1권을 읽으면서 새삼, 이 책 들이파봤자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한 뭔가 유용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단 걸 알았다. 외려 자본가로서 착취하는 방법에 도통할 수는 있겠다. 2007년 쯤 뉴욕타임즈에 월스트리트에서는 자본론 읽는 게 유행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 있는데, 이제 납득이 간다.
   

참고글 :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현실 사회주의가 유사파시스트 체제가 되었던 탓인지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사상, 특히 마르크스-레닌 주의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가치가 '자유'라는 것이 종종 간과된다.

마르크스 자신은 그의 저작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선언하는 '공산당 선언'(마르크스가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그에 앞선 공상적 사회주의와 자신의 사회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엄격하게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 구분은 뒤르켐이 확실하게 한 바 있는데, 약술하자면, 공산주의는 전근대적인 개념인 반면, 사회주의는 근대적인 개념이다)에서 마르스크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체제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 표현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표방한다. 그 자유는,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억압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만을 강조했지만, 그 자유주의는 결국 금전유대에 기반한 상업적 자유, 가차없는 돈벌이의 자유만을 남겨두었다. 다른 모든 자유는 오직 돈벌이의 자유가 확보된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마주한 당대의 현실이었다. 12시간의 표준 노동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지리한 투쟁일 벌여야 했던 비참한 현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국 가차없는 돈벌이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모든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적 기획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말한다. 그들이 표방하는 체제는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 자체가 원래 인민이 주권을 가진 체제이니 인민민주주의는 결국 동어반복인 셈이다.) 혁명을 통해 그들이 철폐하고자 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철폐이며, 그 사적 소유는 오직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 일부에 의한 생산수단의 배타적인 독점을 말한다.

로크 이후의 근대 자유주의 국가에서 보장된 사유 재산권은 본래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의해 마련한 재산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유재산권의 보장으로 인해 전개된 역사는 일부 계급에 의한 사회 전체 부의 독점으로 귀결되었다. 재산을 가진 이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으나 반대로 재산을 갖지 못한 이는 자유도, 그리고 자유로서 실현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도 없었다. 재산없이 그들, 프롤레타리아는 더럽고 게으르며 부도덕한 짐승으로 취급되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법칙에 의해 그들 자신의 가능성에서 소외된 노동 계급의 모습은 그와 같이 비참하였다.

마르크스는 격분했다. 그가 보기에(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노동하지 않는 이에게 보장된 자유가 다른 모든 노동하는 이들의 자유, 인격, 가능성, 미래를 모두 앗아가는 그런 체제가 정의롭다고 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부정했다. 아니ㅡ 더 장확히는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사회였다. 그가 헤겔에게서 이어받은 역사의 개념에 따라, 역사는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그 모순으로 인해 더 높은 차원의 사회에 길을 내어줄 터였다.

마르크스의 예견에 따르면 그 길은 사유재산의 철폐로 시작될 터였다. 그 철폐는 인민에 의해 생산수단이 소유됨으로써, 즉 생산수단이 사회화됨으로써 이뤄진다. 국유화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인민이 주인으로 행세하는 체제의 기본 조건은 특정 계급에게 독점된 자유를 모든 이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자본주의 운동 특유의 공업화와 보편화는 노동계급을 한데 모으고 각성시킬 터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각성과 뒤따라올 노동계급의 조직화, 그리고 필연적인 승리를 점쳤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승리와 함께 성취될 터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곧 노동 계급 자체의 당파성을 떠나 더 높은 차원의 보편성 앞에 길을 내어줄 것이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경제적 차원의 차별과 대립을 없앰으로써 모든 이들이 동등하게 될 것이고, 이는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개인만이 남은 상황, 즉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등장하는 상황이 된다.  혁명의 단계에서 전위에 선 정치도 폐기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가 우습게 봤던 멜서스와 비슷한 신세가 된 것처럼 취급되었다. 그는 그에 앞선 모든 시대를 탁월하게 설명했으나 그에 뒤 따라올 시대를 예언하는데 실패한 이로 취급되었다. 그가 밝힌 역사의 법칙은 그가 밝힌 그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는 국유화의 단계에서 국가독점의 자본주의로 왜곡되어 나타났고, 그 등장만큼이나 혁명적으로 망했다. 

마르크스가 낙관했던 동일한 계급을 가진 단일체로서 노동계급은 등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내파했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조건은 오로지 물질적이며 경제적인 것 위에 세워진다.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 이외의 것을 끊임없이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자본주의의 힘이 계급의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터져나오고 부과되었다. 그 힘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인민대중의 삶 위에 편재하고 있다. 푸코처럼 도처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결국 자본주의 하 인간들은 돈에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다. 돈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마저도 그러하다. 마르크스의 혁명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 혁명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삶에 들러붙어 있는 돈, 경제적인 것, 그 것들이 부추기는 우리 안의 욕망들, 그 욕망들이 보여주는 삶의 가능성들, 그 가능성의 추구가 불러오는 결과들, 피해들, 죽음들. 그 모든 것을 밝히고 또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것, 즉 경제적 삶에 파뭍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혁명의 정치는 결국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리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금 머무르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도록 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노동계급이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정치적 기획이 무용한 이 황량한 탈정치의 사막에서 오직 정치적일 수 있는 것은" 즉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은 결국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