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6일 토요일
참고글 :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현실 사회주의가 유사파시스트 체제가 되었던 탓인지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사상, 특히 마르크스-레닌 주의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가치가 '자유'라는 것이 종종 간과된다.
마르크스 자신은 그의 저작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선언하는 '공산당 선언'(마르크스가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그에 앞선 공상적 사회주의와 자신의 사회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엄격하게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 구분은 뒤르켐이 확실하게 한 바 있는데, 약술하자면, 공산주의는 전근대적인 개념인 반면, 사회주의는 근대적인 개념이다)에서 마르스크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체제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 표현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표방한다. 그 자유는,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억압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만을 강조했지만, 그 자유주의는 결국 금전유대에 기반한 상업적 자유, 가차없는 돈벌이의 자유만을 남겨두었다. 다른 모든 자유는 오직 돈벌이의 자유가 확보된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마주한 당대의 현실이었다. 12시간의 표준 노동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지리한 투쟁일 벌여야 했던 비참한 현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국 가차없는 돈벌이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모든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적 기획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말한다. 그들이 표방하는 체제는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 자체가 원래 인민이 주권을 가진 체제이니 인민민주주의는 결국 동어반복인 셈이다.) 혁명을 통해 그들이 철폐하고자 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철폐이며, 그 사적 소유는 오직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 일부에 의한 생산수단의 배타적인 독점을 말한다.
로크 이후의 근대 자유주의 국가에서 보장된 사유 재산권은 본래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의해 마련한 재산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유재산권의 보장으로 인해 전개된 역사는 일부 계급에 의한 사회 전체 부의 독점으로 귀결되었다. 재산을 가진 이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으나 반대로 재산을 갖지 못한 이는 자유도, 그리고 자유로서 실현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도 없었다. 재산없이 그들, 프롤레타리아는 더럽고 게으르며 부도덕한 짐승으로 취급되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법칙에 의해 그들 자신의 가능성에서 소외된 노동 계급의 모습은 그와 같이 비참하였다.
마르크스는 격분했다. 그가 보기에(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노동하지 않는 이에게 보장된 자유가 다른 모든 노동하는 이들의 자유, 인격, 가능성, 미래를 모두 앗아가는 그런 체제가 정의롭다고 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부정했다. 아니ㅡ 더 장확히는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사회였다. 그가 헤겔에게서 이어받은 역사의 개념에 따라, 역사는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그 모순으로 인해 더 높은 차원의 사회에 길을 내어줄 터였다.
마르크스의 예견에 따르면 그 길은 사유재산의 철폐로 시작될 터였다. 그 철폐는 인민에 의해 생산수단이 소유됨으로써, 즉 생산수단이 사회화됨으로써 이뤄진다. 국유화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인민이 주인으로 행세하는 체제의 기본 조건은 특정 계급에게 독점된 자유를 모든 이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자본주의 운동 특유의 공업화와 보편화는 노동계급을 한데 모으고 각성시킬 터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각성과 뒤따라올 노동계급의 조직화, 그리고 필연적인 승리를 점쳤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승리와 함께 성취될 터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곧 노동 계급 자체의 당파성을 떠나 더 높은 차원의 보편성 앞에 길을 내어줄 것이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경제적 차원의 차별과 대립을 없앰으로써 모든 이들이 동등하게 될 것이고, 이는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개인만이 남은 상황, 즉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등장하는 상황이 된다. 혁명의 단계에서 전위에 선 정치도 폐기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가 우습게 봤던 멜서스와 비슷한 신세가 된 것처럼 취급되었다. 그는 그에 앞선 모든 시대를 탁월하게 설명했으나 그에 뒤 따라올 시대를 예언하는데 실패한 이로 취급되었다. 그가 밝힌 역사의 법칙은 그가 밝힌 그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는 국유화의 단계에서 국가독점의 자본주의로 왜곡되어 나타났고, 그 등장만큼이나 혁명적으로 망했다.
마르크스가 낙관했던 동일한 계급을 가진 단일체로서 노동계급은 등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내파했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조건은 오로지 물질적이며 경제적인 것 위에 세워진다.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 이외의 것을 끊임없이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자본주의의 힘이 계급의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터져나오고 부과되었다. 그 힘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인민대중의 삶 위에 편재하고 있다. 푸코처럼 도처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결국 자본주의 하 인간들은 돈에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다. 돈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마저도 그러하다. 마르크스의 혁명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 혁명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삶에 들러붙어 있는 돈, 경제적인 것, 그 것들이 부추기는 우리 안의 욕망들, 그 욕망들이 보여주는 삶의 가능성들, 그 가능성의 추구가 불러오는 결과들, 피해들, 죽음들. 그 모든 것을 밝히고 또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것, 즉 경제적 삶에 파뭍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혁명의 정치는 결국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리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금 머무르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도록 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노동계급이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정치적 기획이 무용한 이 황량한 탈정치의 사막에서 오직 정치적일 수 있는 것은" 즉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은 결국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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