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4일 일요일
참고글: 1차 대전과 참호전
세계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인간의 무지와 무능이 만들어낸 지상의 지옥이었다.
"1916년 7월 1일 솜 전투 첫 날에 발생한 사상자 수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8 사단 두 개 연대 전체가 오비예 주위로 포진한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에게 몰살당했다. 2시간 만에 이 사단은 장교 300명 가운데 218명을, 사병 8.500명 가운데 5,274명을 잃었다....이 참극이 단 하루로 끝났나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존 엘리스, 참호에서 보낸 1460일)
나폴레옹 종전 이후 유럽은 크림 전쟁을 제외한다면, 거의 1세기 가까이 열강들 간의 직접 충돌이 없는 평화의 시기를 보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아무도 그 전쟁이 그 같이 길어지고, 잔인하게 끝날 줄 예상하지 못 했다.
서부 전선에서 직접 맞붙은 프랑스-영국과 독일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프랑스는 참전병의 3분의 1이 전사했으며 (상류계급의 참전이 일종의 사회적 의무였던)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재학생 중 5분의 1 가량이 전쟁으로 전사했다. 에릭 홉스봄은 1차 대전으로 "영국 상류계급 가운데 한 세대가 사라졌다"로 썼다. '반지의 주인'을 쓴 톨킨은 1차 대전에 절친한 네 명의 친구와 함께 참전해 서부전선에 배치되었지만 전쟁 후 살아돌아온 것은 그 한 명 뿐이었다. 톨킨은 반지의 주인의 전투에 관해 써내려가면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같은 대량살상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된 솜 전투에서만 양측 합쳐 120만명이 죽었다. 도시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죽음을 쌓아올릴 수 있었는가. 대답은 '맥심 기관총'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1차 대전을 무의미한 참호전으로 몰고간 것이 바로 이 기관총의 도입이었다.
서부전선의 전쟁 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전투가 벌어졌다. 병사들은 장교의 지휘 아래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일점전개 돌격전술이었다. 이 같은 이른바 "명예로운 돌격"은 기관총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돌격하던 소대는 지휘하던 장교까지 죽은 다음에야 돌격을 멈출 수 있었지만 본진으로 돌아온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돌격할 수 없던 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호를 파고 웅크렸다. 서부전선은 그렇게 거대한 참호가 되었다.
돌격 전술은 전쟁의 말기까지 수정되지 않았다. 탱크가 솜 전투에서 처음 도입되었으나 그 것을 활용한 전술이 따라오지 못했다. 지휘를 맡은 야전 장교들은 사관학교에서 배운 전술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갈팡질팡했으며 전선의 교착을 답답하게 여긴 정치가들과 군수뇌들은 무리한 작전을 세웠다. 그 사이 낀 그 병사들은 여전히 기관총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오직 병사들만이 그들이 무의미한 목적을 위해 돌격했고 죽었다는, 그리고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무의미한 지옥이 4년간 계속된 곳이 서부전선이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아 귀환한 이들의 정신 세계가 어떠했는지 추측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대개 전쟁 혐오자가 되거나(톨킨이 택한 길이었다) 전쟁 찬미자가 되었다.(히틀러가 택한 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에서는 후자가 정권을 잡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플랑드르 지방의 축축하고 추운 밤을 통해 침묵 속에서 행군했다. 안개를 뚫고 낮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강철로 된 아침 인사가 윙 소리를 내면서 우리 머리 위로 날아오더니, 날카로운 폭발음을 내면서 닥은 탄알들이 대열 사이로 날아 축축한 땅바닥에 꽂혔다. 하지만 작은 연기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200개의 목구멍에서 최초의 만세 소리가 터져나와 죽음의 심부름꾼을 맞이했다. 그런 다음 딱딱하는 소리, 외치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시작되고, 우리는 불타는 눈길로 앞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달려나가 마침내 순무 밭과 산울타리를 지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이었다." (히틀러, 나의 투쟁)
1차 대전 이후 나찌의 파시즘에 가장 열렬히 복무한 이들은 바로 이런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옥에서 귀환한 형제들이었으며 그 지옥을 겪지 않은 모든 이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했다. 그들은 서부전선을 잊지 못했고 극복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서부전선으로 바꾸어 놓고자 했다. 나찌는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이는 서부전선의 참호 속에서 계층 간의 온갖 한계를 넘어 피로 맺어진, 이른바 참호의 사회주의였다. 이들이 돌격해야 할 적들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유태인들이었다.
한 편으로 서부전선의 기억은 히틀러의 독일을 마주한 프랑스의 무기력과 주저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마지노선이 돌파당한 프랑스는 병력 상 독일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신속하게 항복했다.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감히 되풀이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또 두려워했다. 히틀러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전쟁을 혐오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는 처칠(홉스봄은 처칠을 가리켜 1914년 이후 내렸던 모든 정치적 결정이 틀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올바른 선택-히틀러와 맞서는 것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고 장난스럽게 평한다)과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혐오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던 루즈벨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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