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6일 금요일

로마의 정치와 군사

로마는 헬레니즘 문명의 연장선에 있는 문명이었다. 당시 문명의 중심은 헬라스 세계였고, 로마는 변방이었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는 그리스 문명의 아류에 가까웠다고 혹평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로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지중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의 진정한 재능은 정치와 군사에 있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치적 천재를 혼합정체에서 찾았다. 왕정과 과두정과 민주정이 적절하게 섞인 체제라는 지적이다.  로마가 이런 혼합정체의 특징을 갖춘 것은 맞다. 로마는 3개의 상이한 민회가 있었고, 거기서 뽑힌 소수의 정무관들이 국가의 행정을 맡았다. 정무관들의 임기는 1년으로 한정돼있었기 때문에, 정체의 변동이 심할 수 있었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고 정체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조직이 원로원이었다. 초기에는 자문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원로원은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쥔 조직이 된다. 

로마 정체의 역사는 신분 다툼의 역사이기도 하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는 귀족과 평민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운영됐다. 초기에 평민들은 집정관 등 국가의 주요 관직에 진출 할 수 없었다. 귀족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평민회에서 뽑히는 호민관이었다. 호민관은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이 제안하는 각종 법률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야당같은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평민의 권리 주장은 계속 이어져, 결국 실제 법적인 참정권이라는 측면에서 귀족과 평민은 완전히 같은 위치에 서게 됐다. 

이런 평민의 권리 신장이 가능했던 것은 로마 군대의 근간이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 군대의 주축은 시민군이었다.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자원해 이뤄진 군대는, 로마가 인근 도시들을 굴복시키고 라틴 동맹의 주축으로 떠오르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숫자 상 시민군의 주축이었던 평민의 권리 주장은, 그들의 군대에 대한 기여가 점점 중요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로마 군대의 승리는 곧 로마 평민의 권리 신장을 불러왔다. 

이런 추세는 2차 포에니 전쟁 이후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니발 전쟁이라 불린 이 전쟁에서 로마 정치의 한 축이었던 평민파는 상대적으로 몰락해버렸다. 전쟁 초기 한니발과 맞서 참패를 당했던 대부분의 집정관들이 평민파였다는 점, 그리고 젼쟁 중 평민파의 지지층인 자영농이 전쟁의 여파로 타격을 입었다는 점 등이 결정적인 평민파의 몰락을 불러왔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세계에는 토지를 잃은 빈민들이 늘어났다. 이 빈민들을 군대로 흡수한 것이 마리우스의 병제 개혁이었다. 개혁의 핵심은 군대 입대 조건이었던 재산 규정을 없앤 것이었다. 당연히 무산자들이 군대로 흘러들어왔다. 이들은 군대에서 두둑한 몫을 챙겨 제대하는 것이 제일 목표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무산자들의 에너지를 적절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즉 굶주린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이 필요했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로마 정계는 이제 원로원과 일부 군벌들의 대결 장이 되버렸다. 포에니 전쟁 이후 원로원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옥상옥이 됐다. 이 원로원에 잘보인 몇몇 인물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운 뒤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만들고, 그 것을 이용해 원로원과 갈등, 또는 협력하며 정계의 실력자가 되는 것이 이후 공화정 말기까지 이어진 일반적인 로마 정치의 패턴이 됐다. 카르타고 정복 이후 로마의 해외정복 사업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군벌들의 각축을 국내에서 적절히 소화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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