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근대 국가와 사회: 삼림 조성의 경우


화석 연료가 인류의 주 에너지원이 되기 전,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나무였다. 나무는 열을 공급하는 땔감으로 뿐만 아니라, 선박, 농기구, 마차 등 각종 산업제품의 주 원료로서 가장 중요한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질 좋은 나무가 많이 나는 삼림은 오늘날의 유전과도 같았다. 삼림이 울창했던 독일 동부나 북유럽은, 말하자면, 16세기의 중동과도 같았다.

목재가 중요하다보니, 삼림 관리야 말로 국가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좋은 목재는 국부에 결정적일 뿐 아니라, 세입의 주된 원천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삼림의 과학적 관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삼림을 하나의 거대한 광산으로 보는 것, 목재를 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는 시각이 근대 삼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시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재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삼림관리, 즉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삼림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제임스 스콧의 저서 '국가처럼 보기'에는 이런 근대 삼림학의 바탕에 깔린 공리주의적 시각에 대한 좋은 설명이 나온다.

"공리주의 국가가 (상업적) 나무만 보느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숲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삼림에 대한 공리주의의 관점이 추상적이고 부분적이라면,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독특한 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추상화는 잠재적으로 모든 분석 형태에 필수적이며, 국가 관료에 의한 추상화가 그들 고용주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정적 이해를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디드로의 <백과사전>에서 '삼림'이라는 항목은 거의 전적으로 삼림의 생산물과 세금, 총수입, 이윤 등 국가 관료가 산출할 수 있는 '공적 유용성'과 관련되어 있다. 동식물 서식지로서의 삼림은 사라지고 이윤이 남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으로 대체된 것이다. 여기서 재정적-상업적 논리는 일치한다. 두 논리가 확고하게 손익계산에 고정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자연을 체계화하는 데 사용하는 어휘는 전형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드러낸다. 사실, 공리주의 담론은 '자연'이라는 용어를 '자연자원'으로 대체하는데, 이는 인간의 사용목적에 부응할 수 있는 자연의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따라서 가치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독일 삼림과학이 성문화되고 교육가능한 엄밀한 기술적-상업적 학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서 삼림을 하나의 '상품 기계'로 크게 단순화시킨 노력 덕분이었다. 그 엄밀성을 위한 조건은 선택한 종의 산출량과 재배 및 벌채 비용에 직접 관련된 변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변수가 엄격하게 통제되거나 불변이라는 가정이다. 우리가 앞으로 도시계획, 혁명 이론, 집단화, 농촌 재정착 등에서 살펴보겠지만 '통제 바깥'에 놓여있는 전체 세계는 이러한 기술적 비전을 성가시게 만들며 되돌아온다."

-제임스 스콧 '국가처럼 보기'

문제는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삼림, 즉 하나의 '상품기계'로서의 삼림이라는 것이 사실은 목재 생산의 극대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었다.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것이 프로이센이었다. 일찍부터 삼림관리에 대한 학문이 발달한 프로이센에서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목재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삼림 조성이 본격화된다. 곧고 질 좋은 목재로 유명한 노르웨이가문비 나무같은 한 종으로 삼림을 채워버리는 것이었다. 동일한 종, 동일한 수령으로 채워진 삼림은 마치 논이나 밭과 같이 관리해서 일정 주기로 목재를 얻는다는 것이 이런 발상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는 본래의 의도와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독일 사례에서는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한 삼림으로부터 생물학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업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는 침엽수림의 두 번째 순환이 있고 나서 뼈아프게 명백해졌다...최악의 경우를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인 '숲의 죽음'이 독일어 어휘에 추가되었다.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균류와 곤충, 포유류와 식물상 간의 공생 관계, 토양 형성과 양분 흡수를 포함하는 유난히 복잡한 과정이 명백하게 붕괴함으로써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결과 대부분은 과학적 삼림의 극단적 단순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동일 수령, 동일종의 삼림은 서식개체의 다양성이 낮을 뿐 아니라 큰 폭풍우 앞에 한층 취약하다. 곧, 종과 수령의 균일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일례로 노르웨이가문비 나무 역시 그 종에 특화된 모든 '해충'에게 훌륭한 서식지를 마련해주었다. 이들 유해생물 집단은 전염병 수준까지 증가했고 산출량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비료, 살충제, 살균제, 쥐약 등에 높은 비용을 치르게 했다. 최초 순환에서 대부분의 노르웨이가문비나무 삼림이 예외적으로 잘 성장한 것은 다양하게 구성된 원시림을 대체하기 이전에 오랜 기간동안 축적된 토양을 먹고 살았기 (혹은 고갈시키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자원이 고갈되자 성장률이 가파르게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제임스 스콧, 위의 책

삼림이라는 복잡한 생태계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에 맞춰 폭력적인 방식으로 삼림을 개조한 것이 결국 파국을 낳았다.  제임스 스콧은 이런 삼림의 극단적 단순화가, 근대 국가가 행했던 많은 야심찬 사회개조 사업들-소련의 집단 농장화같은-이 어떻게 결국 파국을 낳고 말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고 전한다. 국가는 사회를 단순화시키려 한다. 사회는 국가가 파악하는 것보다 더 복한한 현실이다. 국가는 그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켜서 사회를 통제하려 한다. 근대 역사의 한 축은 바로 이러한 국가와 사회 간의 작용-반작용의 역사이다.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정리


사회주의는 외연이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일반적 인식 중 명백한 오해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가 정확히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건 오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계몽주의 시대 유럽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개념인데, 당초에는 지금처럼 정치적 함의가 강한 말이 아니었다. 사적 소유가 철폐된 특정한 사회조직 방식을 가리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에 사회주의는 인간이 본성 상 사회를 이루고 살려는 성향이 있으며, 사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된 말이었다. 

사회주의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적 의미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초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 팽창을 시작할 때 쯤이었다. 이 때 개인주의는 시장 메커니즘과 자유교환 경제와 경쟁 등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반개인주의라는 맥락에서 반자본주의적인 의미를 얻기 시작했다.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188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노동계급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자발적, 결사, 협동체, 기타 자발적 집단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생된 자코뱅 민주주의의 전통과 맑스주의가 노동운동 내에서 점점 힘을 얻으면서 이 운동 내에서 정치권력 장악의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사회주의 역시 이와 결부되어 국가권력 장악에 관한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에 와서도 사회주의는 정치 권력 방악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 요구 정도에 머물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권력 장악 후의 사회 조직 논의에 대해 무관심했다.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에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자는 급진적 요구만이 있을 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이는 사회주의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마르크스-엥겔스가 사회주의 이상 사회에 대한 논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지에만 몰두 했을 뿐 권력을 잡은 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가 진지하게 권력 장악 이후의 사회 건설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좌에 오른 후부터이다. 이 때 자본주의는 전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자본주의 세계는 2번의 세계대전과 한번의 대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발흥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겪었다.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였던 자유주의는 완전히 몰락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이런 세상에 등장했다. 후진적인 농업국가에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처럼 여겨졌다. 1917년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도 사민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세력들도 이제 실제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전에 집권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가 부족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기 바빴다.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각종 사회주의 정책들의 문제는 대부분 자본주의의 위기와 붕괴가 진행되던 와중에 해결책으로 제시됐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실효성을 잃은 결과였다. 

1917년 이후 사회주의는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20세기 중후반동안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을 지배하는 거대한 블록을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지배한 것은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들이 직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출된 논리였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적 전통이라고는 전제주의가 전부였고, 완전히 고립되고 가난하면서 외세의 위협에 처한 후진농업국가였다. 산업이라고는 빈약한 군수산업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생존해야 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채택된 정책은 급속한 산업화였다.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투쟁을 통해 집권한 스탈린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는 과제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근대화 계획을 세웠다. 5년 단위의 개발 계획, 특정한 생산 목표, 그를 위한 인력과 물자의 강제 재배치 등이 그 계획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무시했고, 한가지 목표-강력한 군대 건설을 위한 공업화-에 다른 모든 목표를 존속시키는 경제였다.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경제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였으며,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대중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성장과 함께 대중 교툥과 의료, 복지도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당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이 참고할 수 있는 경제모델은 1차대전 당시 교전국들이 운영했던 전시경제 모델이 전부였다. 전시경제는 계획, 경제의 공적인 운용, 노동력의 동원 등이 요구되는데 이런 동원은 주로 노동조합과 일부 공공복지 제도를 통해 이뤄졌다. 볼셰비키는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 모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런 배경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집권세력이 국가의 중앙집권적 조치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선호하도록 이끌었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소 거리가 있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정책을 지배한 것은 대공황과 대량실업의 경험이었다. 사민주의는 혁명이 아닌 선거로 집권한 합법적 정치 권력이었다. 선거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했기에 사민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인식과는 달리 복지국가의 주요 개념들은 주로 보수주의에서 나왔다. 자유당, 사회카톨릭 세력, 사회의식을 가진 관료 등이 전후의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각종 정책을 입안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지방정부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이었다. 

사민주의는 핵심문제는 대량실업을 어떻게 없애느냐였다. 19세기 식의 자유주의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전후의 폭넓은 합의가 사민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을 포함한, 국민경제의 수요 관리를 경제의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2차대전과 뒤이은 전후의 호황은 대량소비 사회를 가능케 했다. 사민주의가 달성한 완전고용은 기본적으로 이런 대량소비 사회에, 국가의 노후보장, 공공의료보험 등 사회보험 제도, 불경기의 공공사업 등을 통한 총수요 관리 등이 다양하게 뒤섞인 혼합경제의 결과였다. 1970년대에 와서 이런 혼합경제가 더이상 잘 굴러가지 않게 되면서 산자유주의가 새로운 대안이 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에 소비에트 사회주의도 위기에 처했다. 그 체제는 누적된 내부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 생길때와 같이 급격한 속도로 사라졌다. 자본주의도 1970년대에 다시 한번 위기에 처했지만, 그 체제는 여전히 상당 수준의 유연성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전후의 유례없는 풍요를 가능케했다. 완전고용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각종 상품을 통해 인간 생활 수준을 두드러지게 끌어올렸다. 사회주의의 물질적 근거가 악화된 것이다. 또 사회주의의 전형이나 여겨졌던 제도들이 자본주의에 흡수됐다. 복지제도 뿐 아니라, 산업의 공적 조정과 계획 등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됐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흐려진 한편, 소비에트는 자멸했다. 그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이 경제에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가격제도는 물론이며, 최소한의 합리적인 생산을 조정할 경제적 메커니즘, 즉 상대적 비용의 기준조차 없다는 것, 즉 시장의 관전한 결여였다. 이런 결점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필요한 많은 서비스들을 지하경제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났다.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요약 정리



베링턴 무어에 따르면 근대 의회 민주주의의 확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르주아지 계급이다. 이 계급은 전통적인 토지소유계급, 즉 지주와 농업 노동계급, 즉 농민과 함께 근대화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세력이다.

중요한 것은 근대화의 과정이 반드시 의회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근대화된 국가는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이는 이후의 일이다. 근대화가 상당히 진전되던 시기인 20세기 초중반까지, 근대화의 길은 1가지가 아니었다. 무어는 근대화의 경로를 의회 민주주의 이외에도 권위주의적 독재정권과 그 심화된 형태인 파시즘, 그리고 농민혁명에 기초한 공산화 등 3가지로 나눈다.

근대화가 시작되는 그 때 당시 그 국가가 처한 국내의 정치사회적 상황, 즉 각 계급간의 역학 관계와 국가기구의 힘 등의 요소에 따라 각 국은 서로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핵심은 상업적, 산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시민, 즉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여부이다.

무어의 도식화를 살펴보면 부르주아가 얼마나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의회 민주주의냐,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냐, 농민혁명의 모습을 띈 공산화냐로 근대화 과정이 나뉜다.

부르주아 계급이 충분히 성장하고 지주 계급보다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대등하게 세력을 다툴 수 있는 경우 의회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이 그런 경우이며, 대혁명이 일어난 후 프랑스 역시 비슷하다. 이 과정이 평화적인 경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규모의 폭력이 일어나 구 질서와의 결정적 단절이 일어난다. 영국의 경우 청교도혁명과 인클로저, 미국의 남북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이 이런 경우다. 셋 모두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농업지배계급, 즉 지주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타도되거나 적어도 약화 또는 동화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 기구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국의 경우가 가장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었고, 국가 기구가 강했던 프랑스와 미국은 혁명이나 내전을 겪었다.

권위주의적 독재, 또는 파시즘은 주로 후발산업 국가에서 일어난다. 일본과 독일이 그런 경우다. 이 경우 자생적인 산업화가 일어난 국가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이 약하다.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계급은 급진적인 농민-노동자 동맹을 막기 위한 보수적 동맹을 맺는다.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 기구가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데, 그 축은 군비 확장이다. 농민들의 혁명적 잠재력은 억제된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인 농촌이 지주 계급과 강한 봉건적 유대가 있으며, 빠른 생산성 성장 등으로 착취가 상쇄됐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독일의 경우 융커들이 농노제를 다시 도입하면서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붕괴시키면서 혁명적 잠재력이 억제되었다. 농촌은 산업화에 따른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데, 보수정권은 그 중 몇몇 구호를 채택해 급진우익화하면서 파시즘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이 더디거나 거의 없고,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이 그대로인 곳에서는 농민 혁명에 기반한 공산화가 일어난다. 중국와 러시아가 그런 경우다. 두 경우 모두 전통적인 농업 사회의 질서가 거의 그대로인 채 다만 상층 지주 계급과의 연결고리가 끊기거나, 착취가 강화되는 경로를 겪었다. 이 때 공산당이 농민층과 제휴하면서 혁명의 모멘텀을 만들어냈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외부적 압력이 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경우 1차대전이 정부의 신뢰와 능력에 모두 압박을 가했고, 민중 봉기와 군대의 반란으로 권력의 진공 상태가 생겼다. 볼셰비키는 이 틈을 파고들어 권좌에 올랐다.

중국에서는 중일 전쟁이 공산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은 해안지역을 대부분 점거했다. 해안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와 전통적인 농촌 향신층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당은 일본의 침략으로 이런 지지세력의 쇠퇴를 겪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은 농촌 지역에서도 항일과 민족주의적 단합을 불러오는 요소였다. 이런 분위기에 올라탄 뒤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이 결합하면서 공산당은 권력에 다가갈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폭력적인 방식으로 농촌을 재조직화하고 전통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근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프랑스 역시 그런 농민사회가 도시 빈민들과 결합해 대혁명의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상층 농민들은 도시 빈민의 급진주의에 제동을 걸었고, 프랑스는 소농 중심의 사회와 산업화가 정치의 불안한 두축을 형성했다.

일본은 그와 달리 농촌 사회가 온전한채 근대화에 들어섰다. 일본의 독특한 점은 농촌 사회이 지주와 농민 사회 간에 봉건적 유대가 그대로 살아있어 혁명적 잠재력을 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동력 투입으로 생산이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는 쌀농사였다는 점도 혁명을 억제하는데 도움을 줬다. 1차 대전 이후 불황 속에 농민들의 반자본주의적 급진주의는 육군 속에 흡수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군국주의에 동력을 제공했다.


2013년 9월 1일 일요일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
단편소설 전집

회고해 보면 헤밍웨이 문학 중 뛰어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들이 아니라 단편소설들이다. 단편소설 속에서는 그의 단점들이 드러날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호전성, 일부러 내세우는 남성성, 폭력과 강인함의 칭송, 허장성세, 낭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여성관 등이 짧은 단편소설 속에서는 모두 억제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강렬한 순간, 고립된 순간을 섬광처럼 빛내는 저 유명한 스타일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의 단편소설에는 진리에 대한 숭상, 독창적 산문,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대화, 감정의 분출 등이 돋보인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헤밍웨이는 전 세계 단편소설가들 중에서는 10대 작가 안에 들어간다.

 그는 죽음, 열정, 패배, 인간 희망의 끈덕짐 등 궁극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는 실제에 있어서 그리 폭넓지 않다. 그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소설가들 중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더 넓게 탐구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를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스탕달 곁에 세워 놓으면 그는 청년처럼 보인다. 헨리 제임스 옆에 서면 원시인처럼 보이고, 톨스토이 옆에서는 미성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적지 않다. 마크 트웨인이 쌓아놓은 기초 위에다 그는 영어 문장을 문학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어떤 한 순간의 진실, 통찰, 체험을 단 한 단어의 낭비도 없이 간결하게 드러낸다. 그가 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이런 테크닉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도덕적인 기여도 했다. 헤밍웨이는 언어의 정직성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그의 훌륭한 단편소설들(여기에는 중편소설 <노인과바다>도 들어간다)은 <립 밴 윙클>이나 <어셔 가의 몰락>처럼 미국 문학의 유산이 되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패배되지 않는 자>, <나의 아버지>, <살인자들>, <5만 달러>와 수십 편의 단편소설들은 지금 읽어도 또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생생하다. 저자가 느꼈던 그 심정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헤밍웨이의 인생관을 받아들이든 말든, 우리는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 투우장, 술집, 스키장, 경마장, 프로 복싱, 미시건의 삼림 등르 다룬 이 단편소설들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 단편소설들은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스타일을 초월한다. 정서와 정서의 통제가 여기에서는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직한 예술가가 진실을 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노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단편 전집>은 소위 핑카 비히아판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일한 전집본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

1799-1850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사촌누이 베트

스탕달(발자크는 스탕달의 진면목을 알아본 최초의 소수 중 하나였다)과는 다르게 발자크는 오늘날 널리 읽혀야 마땅한데도 잘 읽히지 않는다. 모두들 발자크의 업적을 인정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는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인가? 그 대답은 분명치 않다. 19세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결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저급한 취미, 거의 탐정소설 같은 멜로드라마의 선호, 변화하고 발전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능력의 부족, 지능의 부족 등이 그런 결점들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다 할 우뚝한 걸작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의 작품 중 잘 알려진 것 세 편을 추천했으나, 이 작품들이 그를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다른 작품 셋을 추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발자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써낸 50내지 60편의 장편소설들을 모두 읽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할 일은 너무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 다만 힘차고 다양하게 사회를 묘사한 작가라는 점에서는 발자크를 따를 자가 없다.

발자크는 스탕달식의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이였다.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야심만만한 젊은이 라스티냐크는 파리 시내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소리친다. "이제 우리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구나" 발자크 소설에는 많은 라스티냐크가 나온다. 젊은 시절의 발자크는 연필을 잡고서 키 작은 하나(나폴레옹)의 그림 밑에다 이렇게 썼다. "나폴레옹이 칼로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

이런 정복을 늘 염두에 두고서 발자크는 미친 사람처럼 살았고 51세에 과로로 죽었다. 어쩌면 항간에 들려오는 말처럼 5만 잔의 커피를 마신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방면에 별 재주도 없으면서 금융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연애에다 엄청난 정력을 소진했고 굉장히 많은 빚을 졌다. 그는 20여 년 동안 쓰고, 쓰고, 또 썼다. 하루에 열네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을 일했다. 오로지 학자들만이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써냈는지 알고 있는데 총 350권이 넘을 것이다. 그 중 100권 정도가 "인간 코미디"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의 광적인 포괄적 계획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역사와 비펴을 모두 담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악과 원칙을 모두 탐구하는 그런 방대한 계획을 구상 중이다. 이런 계획에서 나온 내 작품들에 '인간 희극'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암암리에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작가는 단테인데, 두 사람은 사실상 닮은 점이 거의 없다.

발자크는 당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하여 거대한 벽화를 완성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다.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사촌누이 베트>는 이 미완성 건물에 들어가는 세 개의 벽돌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작품은 비합리적인 열정을 다룬 것인데, 두 딸에 대한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코넬리아 없는 리어왕을 다루되 그 무대가 중산층 가정이라는 점만 다르다. 두 번째 작품은 탐욕을 연구한 것이고, 세 번째 작품은 여성의 복수심을 다룬 것이다. 세 작품 모두 발자크 소설의 단골 메뉴인 편집증 환자를 다룬다.

<고리오 영감>은 파리의 세속적 사회를 묘사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시골의 풍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강력한 힘과 생생한 세부사항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발자크는 현대 리얼리즘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세 작품 모두 발자크의 주요 관심사인 돈 문제에 집중한다. 그는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 돈을 잃고, 돈을 사랑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배신이 아니라 파산이었다. 발자크 이전의 작가들 중에서 발자크처럼 돈의 세계를 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경제경영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독특한 인물들의 악마 같은 힘을 추가해야 한다. 마담 마르네프, 그랑데, 곱세크, 고리오, 세자르 비로토 등은 입체적인 인물은 아닐지 몰라도 견고한 인물들이다. 발자크의 엄청난 작품 수, 확고한 현실 파악, 객관적이고 생생한 세부 사항 등을 감안할 때 이 결점 많은 거인에게 경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참고글:한국 주택시장의 문제


"우리나라의 아파트 분양 시장은 자유경쟁 시장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품시장과는 매우 다른 시장이다. 우선 토지의 공급권한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통제한다. 권력자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바뀐다. 토지를 사서 설계도만 가지고 분양을 하는 건설회사가 판매가격을 결정한다. 분양가격을 결정할 때 원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얼마에 내놓으면 이익을 많이 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토지를 평당 600만원에 사서 건축비 400만원을 들여 원가가 평당 1000만원인 집을 평당 3000만원에 분양한다. 소비자는 선택권이 별로 없다. 정부가 땅을 공급하고 건설회사가 분양가를 내놓으면 미래의 가격 상승 여부를 예상해 살지 말지를 판단할 뿐이다.
... 그렇다면 한국 부동산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가 직면한 문제의 태반이 부동산 가격 상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빈곤층 증가, 가계부채와 이에 따른 금융불안 문제, 저축은행 부실화 문제, 저출산과 젊은이들의 불만, 교통난 등은 부동산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부동산 문제의 핵심적인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건설업자, 토지소유자, 관료 등 소수의) 이권집단들에게 농락당해온 시장이며, 그들은 공급을 적게하는 방법으로 부동산 가격을 올려서 이권을 챙겨왔고 대다수의 국민들을 고통에 빠드렸다는 것이다. 즉, 공급부족이 핵심문제라고 생각한다.
...2010년말 현재 서울은 979만 가구에 350만 가구로 되어있다. 주택은 253만호로 조사되었다. 97만호나 차이가 난다. 주택수 통계를 낼 때 다가구주택을 한채로 잡는다. 그 중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20여만호를 제외해도 80만 가구, 즉 인구의 20%가 열악한 주거에서 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80만 가구 200만명 정도는 다가구주택의 일부, 옥탑방, 반지하방, 여인숙, 고시원 심지어 비닐하우스에서도 산다.
...전국적으로 보면 2010년말 현재 총 주택수는 1468만채이며 거주단위의 가구수는 1734만이다. 무려 266만 가구가 부족하다. 23만호의 오피스텔은 법적으로 주택이 아니므로 주택수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 2010년 정부의 공식 주택보급률 101.9%는 실제거주단위 기준 주택수 1767만채를 가구수 1734만으로 나눈 수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다는 통계의 허구성을 간파해야 한다. "

박창기, <혁신하라, 한국경제> 중에서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참고글: 막스 베버의 의회주의에 관한 단상


막스 베버에게 있어 현대의 정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관료제 지배를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느냐에 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버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가는, 한 마디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가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관료제의 지배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런 책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 지배 하에서 특정 정책이나 정치적 결정의 책임 소재는 흔히 모호해지며, 그 업무의 전문성이나 비밀성에 비춰볼 때 일반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기 어려운 성질을 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가의 중요한 임무는 그런 행정의 불투명성과 책임소재의 모호함으로 빚어지는 결과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 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베버가 간단히 제시하는 것은 의회의 조사권이다. 오늘날의 국정조사를 생각하면 된다. 베버는 의회의 조사권을 확대함으로써 행정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그 조사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즉 정치인들이 적절한 전문성을 쌓을 기회도 증대된다고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정조사가 그와 같은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따로 고찰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더 폭 넓게, 약간은 모호하게 말하자면, 베버는 행정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 우위는 행정 각 부의 장관과 같은 핵심적인 정무직을 엽관 인사로 채우는 것이다. 이 것은 오늘날 우리의 직관과 배치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되는 관료들이 장관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정치 실세들이 장관을 하면 행정부 전체가 정치논리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가.

베버는 그 같은 행정의 정치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베버 자신이 세상을 상쟁하는 가치들 간의 투쟁의 장이라 생각했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의회는 선거를 통해 인민들에게 주기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 즉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대해 비교적 투명하게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투명한 책임성 자체가 정지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책들의 결과에 대해 숙고하고, 장관 자리에 신중한 인사를 하게 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 같은 베버의 통찰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얼마나 유의미한가.

무엇보다 우려되는 일은 정치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정치적/당파적/분열적이라는 말은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된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능과 비생산적 세싸움, 막말의 대명사처럼 비춰진다. 50%도 안되는 투표율로 당선된 299명의 의원들이 사회 전체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균열, 즉 입장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국회의 정치적 대립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 정치적 대립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회 전체와 괴리된 상황에서 국회 자체의 무능은 더욱 도드라진다.

국회가 무능해진 이때 실제로 국가기구를 지배하는 이는, 대개 관료라 베버는 보았다. 한국에서는 관료와 재벌 및 기득권 세력, 보수 언론간의 삼각연합 체제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한다. 이 삼각연합이 독점하는 국가의 폭력수단은 거리에서는 곤봉과 방패로, 철거현장에서는 용역깡패로, 법원에서는 입법을 해대는 법관으로 현현한다. 방상훈의 개들은 그 뒤에서 법치를 노래하며 펜대를 굴린다. 덕분에 시민들은, 인민들은 거리에서는 곤봉에 얻어맞고 철거현장에서는 불에 타 죽으며 법원에서는 무전유죄를 선고받는다.

이러니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가족, 믿을 건 가족 뿐이다. 가장이 무너지면 다 같이 동반자살, 디 엔드. 자살률 1위의 혁혁한 공범자들이 자살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장 격하게 꾸짖는 개 같은 현실. 벤야민의 말처럼 "승리하는 적 앞에서는 죽은 자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정치적인 것이 귀환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현재 한국의 국가기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들의 연합에 균열을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에게 있어 정치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파적이고 주관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베버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의회주의의 확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의회는 책임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양성하는 (그나마 가장 나은) 현실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회에서 그 같은 것이 가능할까. 한국의 정치는 자꾸 거리로 나가고 있거나 인터넷 상으로 들어가고 있지 국회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최재천 같은 이들이 재선에 실패하고 전여옥 같은 이들이 당당히 재선뺏지를 다는 현실이라면 국회를 닫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고글: 의회 리더십과 관료제의 관계/막스 베버



"현대 의회는 우선 관료제라는 수단에 지배받는 피지배자들의 대표단체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층의 최소한의 내적 동의는 모든 지배가, 심지어 가장 잘 조직화된 지배까지도 지속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공적 권력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의회와 사전 협의를 거친 법 제정이 의무적이며, 무엇보다 예산안이 필수적이다. 신분차등법이 생겨난 후 지금까지 국가의 자금조달 방식, 즉 예산권에 대한 처분은 의회의 결정적인 권력수단이었다.

물론 의회가 정부 지출과 법령의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또는 별 의미가 없는 발의를 함으로써 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강력하게 피력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정치적 지배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아니다. (이 경우) 의회는 '소극적 정치'만을 할 수 있으며, 적대적 권력과도 같은 행정 지도자들과 대립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회는 행정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얻을 뿐이며, 단지 제동장치로서, 즉 무능한 불평꾼들과 잘난체 하는 자들의 모임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한편 관료제는 의회와 유권자에게는 엽관 운동가와 심복의 카스트로 나타나는데, 이들 엽관 운동가와 심복은 인민을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활동의 대상으로 취급할 뿐이다.

의회가 다음과 같은 것을 관철시키면 상황은 달라진다. 행정 지도자는 의회에서 곧장 충원되든지(본래의 의미에서의 '의회제도'), 명백하게 표현된 다수의 신뢰를 얻거나 최소한의 불신을 피해야만 행정 지도자가 관직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의회를 통한 지도자 선출), 행정 지도자는 이러한 근거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고 의회와 그 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지도자의 의회에 대한 책임성), 행정은 의회에서 선택된 노선을 따라야 한다는 것(행정에 대한 의회의 통제) 등이 관철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회의 지배 정당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국가 행정의 적극적인 공동 참여자이다. 이 때 의회는 적극적 정치의 한 요소가 된다."



- 막스 베버,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

2013년 7월 28일 일요일

중국과 한국 관계 문제;<용과 춤을 추자> 간단 정리


조영남의 '용과 춤을 추자'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의 관점에서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고찰한 책이다. 저자는 중국의 급부상이 동북아시아 뿐 아니라 국제정세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하고, 이런 급부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알아본 뒤 한국은 향후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제언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널리 퍼진 중국대세론과 중국위협론을 모두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향후 20~30년내 미국을 대체할 수퍼파워가 된다는 것은 성급한 분석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급부상이 우리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일본 등과 협력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리한 요구다. 중국의 현재 위치와 향후 발전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통해 정세를 제대로 읽고, 그에 맞는 한중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중국의 급부상은 전적으로 덩샤오핑 시대 이후 경제성장 덕이다. 30년간 평균 10%를 넘나드는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의 적절한 리더십,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시장의 개방과 통합 등 여러 요인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식 경제발전은 공산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넘어가는 사례 중에서도 독특한 모델이 됐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공산당 계획 아래 단계별로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정치 사회 분야의 민주화는 억제한 것은 중국이 유일무이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성공적인 경제성장 자체가 현재 공산당의 정당성을 확보해준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19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와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또한 문혁 시기의 사회적 혼란을 장기간 체험한 중국 지도층과 지식인, 시민들 모두가 공산당의 안정적 리더십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치 공화정 말기의 계속된 내전에 지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혈통이 황제 지위를 독점하는 것을 허용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이 몇몇 개인에게 장기간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고 일정기간을 간격으로 성공적인 리더십 교체를 계속하고 있는 것도 주요 원인이다. 중국 공산당은 주석과 총리를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소수지만 우수한 엘리트들이 아래에서부터 최고위층까지 두루 경험을 쌓게 해서 유능한 지도부가 권력의 바통을 계속 이어받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일정부분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해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이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며, 지금의 중국이 단기간에 급변하는 사태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필요한 것도 이런 중국의 상황을 토대로 그에 맞는 대중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그 어느나라보다 더 긴밀하게 맺어진 상태다. 지정학적 거리의 문제(중국과 대립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뿐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고려해볼 때 한국은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을 택해선 안된다.

저자는 미국의 중국 견제, 포위 정책과 그에 동조하는 일본과 한국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미동맹에 대한 무조건적 맹신과 강화는 답이 될 수 없다.

한국은 이미 대중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고, 경제의 사활을 좌우하는 주요한 부분이 됐다. 또한 북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과 멀어질수록 북한 문제까지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대북 강경책 일변도로 가는 것도 대중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정 부분 북한과 관계유지가 필요한 중국의 대외전력 상 대북 강경책은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옹호하고 우리를 경원하게 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저자의 조언은 현 정부가 충분히 음미할만하다.

"한ㆍ미 동맹의 범위는 한반도가 중심이라는 점, 즉 대북 억제가 목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ㆍ미 동맹은 중국 봉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군사적 역할 확대는 평시와 전시 모두에서 한반도와 관련된 군사 행위에서만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한국은 이를 기초로 중국을 설득할 수 있다."



2013년 7월 26일 금요일

불평등 사회와 지대추구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와 박창기의 <혁신하라 한국경제>의 공통점은 1대99의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다. 여기서 1대99란 소수의 수퍼리치들이 사회 전체 부의 상당부분을 독식하고, 대다수 근로자들이 상대적 또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회 구조를 가리킨다. 스티글리츠와 박창기가 인용하고 있는 상당수의 통계 자료들에 따르면, 최근 수십년간 미국과 한국 둘 다 사회 최상층의 소득증가율은 두드러진 반면, 근로자 대다수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원인에 대해서도 두 저자는 비슷한 진단을 한다. 경제학 용어로 렌트, 즉 지대를 사회 최상층이 독식하는 구조가 심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렌트는 정상이윤을 넘어선 잉여이익을 가리킨다. 경제학적으로는 불완전한 경쟁상황으로 인해, 소비자들이 완전경쟁일 때 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재화를 구입하면서, 생산자가 챙기는 초과이익을 말한다. 주로 천연자원이나 전기처럼 소수의 공급자만 존재하는 독과점 시장, 또는 법률이나 의료 등 진입장벽이 높은 서비스 시장에서 발생하는 높은 수익을 렌트라고 볼 수 있다.

스티글리츠가 주로 지적하는 분야는 금융이다. 미국 경제에서 금융 부문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 렌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챙겼다. 방만한 경영으로 은행 경영이 부실해져도, 국가가 세금을 쏟아부어 회생시키는 동안, 경영자들은 보너스 파티를 벌이는 현실이 적나라한 지대추구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박창기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지대추구 현상을 본다. 규제에서 벗어난 소수의 재벌이 바로 그 예다. 출자총액제한이 풀리자, 총수 일가 지분 100%인 계열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고 주가를 올려 배당을 챙기거나, 빵집같은 서민업종에 진출해 수익을 올리는 행태들이 지대 추구의 예가 될 수 있다. 진입장벽이 높고 보수가 좋은 교사나 공무원도 지대추구의 한 예로 볼 수 있다고 박창기는 지적한다.

지대추구는 제 3세력의 개입없이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풀어나가기 어렵다. 특히 국가가 지대추구 세력에 유리한 제도를 만들거나, 공정한 규제를 제대로 집행하지 못할 때 지대추구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로마의 정치와 군사

로마는 헬레니즘 문명의 연장선에 있는 문명이었다. 당시 문명의 중심은 헬라스 세계였고, 로마는 변방이었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는 그리스 문명의 아류에 가까웠다고 혹평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로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지중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의 진정한 재능은 정치와 군사에 있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치적 천재를 혼합정체에서 찾았다. 왕정과 과두정과 민주정이 적절하게 섞인 체제라는 지적이다.  로마가 이런 혼합정체의 특징을 갖춘 것은 맞다. 로마는 3개의 상이한 민회가 있었고, 거기서 뽑힌 소수의 정무관들이 국가의 행정을 맡았다. 정무관들의 임기는 1년으로 한정돼있었기 때문에, 정체의 변동이 심할 수 있었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고 정체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조직이 원로원이었다. 초기에는 자문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원로원은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쥔 조직이 된다. 

로마 정체의 역사는 신분 다툼의 역사이기도 하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는 귀족과 평민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운영됐다. 초기에 평민들은 집정관 등 국가의 주요 관직에 진출 할 수 없었다. 귀족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평민회에서 뽑히는 호민관이었다. 호민관은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이 제안하는 각종 법률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야당같은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평민의 권리 주장은 계속 이어져, 결국 실제 법적인 참정권이라는 측면에서 귀족과 평민은 완전히 같은 위치에 서게 됐다. 

이런 평민의 권리 신장이 가능했던 것은 로마 군대의 근간이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 군대의 주축은 시민군이었다.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자원해 이뤄진 군대는, 로마가 인근 도시들을 굴복시키고 라틴 동맹의 주축으로 떠오르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숫자 상 시민군의 주축이었던 평민의 권리 주장은, 그들의 군대에 대한 기여가 점점 중요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로마 군대의 승리는 곧 로마 평민의 권리 신장을 불러왔다. 

이런 추세는 2차 포에니 전쟁 이후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니발 전쟁이라 불린 이 전쟁에서 로마 정치의 한 축이었던 평민파는 상대적으로 몰락해버렸다. 전쟁 초기 한니발과 맞서 참패를 당했던 대부분의 집정관들이 평민파였다는 점, 그리고 젼쟁 중 평민파의 지지층인 자영농이 전쟁의 여파로 타격을 입었다는 점 등이 결정적인 평민파의 몰락을 불러왔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세계에는 토지를 잃은 빈민들이 늘어났다. 이 빈민들을 군대로 흡수한 것이 마리우스의 병제 개혁이었다. 개혁의 핵심은 군대 입대 조건이었던 재산 규정을 없앤 것이었다. 당연히 무산자들이 군대로 흘러들어왔다. 이들은 군대에서 두둑한 몫을 챙겨 제대하는 것이 제일 목표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무산자들의 에너지를 적절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즉 굶주린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이 필요했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로마 정계는 이제 원로원과 일부 군벌들의 대결 장이 되버렸다. 포에니 전쟁 이후 원로원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옥상옥이 됐다. 이 원로원에 잘보인 몇몇 인물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운 뒤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만들고, 그 것을 이용해 원로원과 갈등, 또는 협력하며 정계의 실력자가 되는 것이 이후 공화정 말기까지 이어진 일반적인 로마 정치의 패턴이 됐다. 카르타고 정복 이후 로마의 해외정복 사업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군벌들의 각축을 국내에서 적절히 소화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참고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1.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임마뉴엘 월러스틴은 원래 아프리카 지역연구 전공이었다. 아프리카 지역 국가와 사회의 변동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월러스틴은 한 국가나 한 사회만을 들여다봐서는 그 변동의 원인 - 과정 - 결과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다다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월러스틴은 적절한 분석단위를 좁히거나 확장해야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론적으로 그는 국가나 사회를 하부단위로 갖는 하나의 세계경제체제를 분석단위로 삼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월러스틴 스스로 페르낭 브로델과 마르크스에 학문적으로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 사람의 영향은 세계체제론은 사실 사회 전체에 대한 구조기능적인 시각과 역사적 시각과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 있다. 구조기능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제가 특정한 기능을 하는 하부단위들간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해 성립되고 유지된다는 것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은 그 체제가 역사적인 일련의 조건들과 전개과정, 우연 등의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나타나고 사멸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겠다.

2.
세계경제체제는 로마나 중국과 같은 세계제국체제와는 구별되는 분석단위다. 그 것은 세계제국과 같이 매우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에 걸쳐 분포해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결정적으로 세계제국들과는 달리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권위체가 부재한다.

세계제국체제에서 주변에서 중심으로의 잉여는 공납의 형태를 띄게 되기 때문에 그 방대한 조공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기구의 유지와 중앙-지방간의 행정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로 대두된다.

이런 세계제국체제와 달리 세계경제체제는 중앙의 권위체가 부재한 가운데 경제적 잉여의 흐름이 주변부에서 중심부 국가들로 흐르도록 보장해 주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중심부의 비교적 강력한 국가기구들의 존재다. 이 국가들은 중심부의 특정 계급-부르주아지-에 대해 경제적 잉여를 보장하는 한편, 체제 내의 통일성과 체제유지 비용 전체를 감당할 필요성이 없다는 점에서 제국체제의 중앙집권기구들과 대조된다.

3.
이 핵심부 국가들에게 있어 국가의 형성을 촉진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계기와 관련이 있다. 그 시작은 16세기 유럽의 지리적 팽창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계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3-14세기에 걸친 유럽 봉건사회 체제의 위기와 그에 따른 유럽 사회 전체의 팽창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한다. 유럽 중세를 특징짓는 중세 봉건사회조직이 이 13-14세기에 경제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특정 유형의 돌파가 필요하게 되는 데 당시의 유럽은 결국 대양으로의 지리적 팽창을 택하게 된다. 그 팽창은 세계경제체제의 필수적인 성립 조건이었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 하에서는 유럽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 가운데 실현가능한 유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런 조건에서 팽창은 시작되었다. 이 지리적 팽창은 지리적 경계를 가지는 국민국가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어느 것이 어느 것의 원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리적 팽창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국가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국가기구의 뒷받침이 있었고, 강력한 국가기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담세 계급인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성공이 필수적이었다.

3.
재미있는 지적은 세계경제체제에서 핵심부 국가들 가운데 종종 세계제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국가들이 있지만, 그 시도들은 어김없이 실패한다는 것이다.

16세기의 에스파냐, 17-18세기의 프랑스, 19세기의 영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국가들 모두 그 시기의 핵심부 국가들이었으나 지나친 지리적 팽창과 그에 따른 비용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운명을 맞는다.

4.
즉 16세기 이후 지리적으로 끊임없이 팽창을 거듭해온 근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는 특정한 중앙 권위체의 부재 속에서 몇몇 핵심부 국가들의 강력한 국가기제가 그 중앙 권위체의 몇몇 기능을 대신해 온 것이다. 그 기능은, 그러나 제국의 행정부와 구별된다. 그 것은 특정한 정치적 통일의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다. (이 비용은 단적으로 말해 로마나 중국이 국경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치뤄야했던 전쟁 비용의 부담에서 핵심부 국가들이 아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핵심부 국가들의 기능은 사실 경제적 기능에 집중되었다. 실로 근대의 초기 국가들은 정치-경제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핵심부 국가들의 강한 해군력은 대개 무역로의 확고한 장악을 위해 이용되었다. 때로는 직접적인 약탈과 지리적 정복에도 동원되었다.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비조달은 독점권 부여, 국채발행, 징세청부, 관믹매매와 같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뤄졌는데 이 수단들 모두 특정한 계급에 국부의 흐름을 보장하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16세기 에스파냐와 대은행가 푸거가의 흥망성쇠, 19세기 영국과 로스차일드 가의 흥망성괴가 어느정도 궤를 같이 하는 일종의 운명공동체였다.

5.
월러스틴의 정의에 따르면 세계경제체제는 16세기 근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아래 팽창해온 체제이다. 이 체제는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일 뿐이지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4백년간 지속되었을 따름이다.

기원전의 지리적 팽창을 끝낸 로마공화국은 기원원년 무렵에 세계제국체제로 전환한 뒤에도 4백년 넘게 지속되었고 중국역시 세계제국체제가 당/송 연대에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로는 1천년 넘게 지속됐다. 연대로만 비교해보면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특별히 성공적인 체제는 아닌 셈이다. 물론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유례없는 내외부적 경제적 팽창을 가능케 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화려한 어조로 찬양하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업적은 괜한 과장이 아닌 것이다.

2013년 7월 14일 일요일

참고글: 1차 대전과 참호전


세계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인간의 무지와 무능이 만들어낸 지상의 지옥이었다.

"1916년 7월 1일 솜 전투 첫 날에 발생한 사상자 수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8 사단 두 개 연대 전체가 오비예 주위로 포진한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에게 몰살당했다. 2시간 만에 이 사단은 장교 300명 가운데 218명을, 사병 8.500명 가운데 5,274명을 잃었다....이 참극이 단 하루로 끝났나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존 엘리스, 참호에서 보낸 1460일)

나폴레옹 종전 이후 유럽은 크림 전쟁을 제외한다면, 거의 1세기 가까이 열강들 간의 직접 충돌이 없는 평화의 시기를 보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아무도 그 전쟁이 그 같이 길어지고, 잔인하게 끝날 줄 예상하지 못 했다.

서부 전선에서 직접 맞붙은 프랑스-영국과 독일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프랑스는 참전병의 3분의 1이 전사했으며 (상류계급의 참전이 일종의 사회적 의무였던)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재학생 중 5분의 1 가량이 전쟁으로 전사했다. 에릭 홉스봄은 1차 대전으로 "영국 상류계급 가운데 한 세대가 사라졌다"로 썼다. '반지의 주인'을 쓴 톨킨은 1차 대전에 절친한 네 명의 친구와 함께 참전해 서부전선에 배치되었지만 전쟁 후 살아돌아온 것은 그 한 명 뿐이었다. 톨킨은 반지의 주인의 전투에 관해 써내려가면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같은 대량살상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된 솜 전투에서만 양측 합쳐 120만명이 죽었다. 도시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죽음을 쌓아올릴 수 있었는가. 대답은 '맥심 기관총'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1차 대전을 무의미한 참호전으로 몰고간 것이 바로 이 기관총의 도입이었다.

서부전선의 전쟁 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전투가 벌어졌다. 병사들은 장교의 지휘 아래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일점전개 돌격전술이었다. 이 같은 이른바 "명예로운 돌격"은 기관총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돌격하던 소대는 지휘하던 장교까지 죽은 다음에야 돌격을 멈출 수 있었지만 본진으로 돌아온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돌격할 수 없던 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호를 파고 웅크렸다. 서부전선은 그렇게 거대한 참호가 되었다.

돌격 전술은 전쟁의 말기까지 수정되지 않았다. 탱크가 솜 전투에서 처음 도입되었으나 그 것을 활용한 전술이 따라오지 못했다. 지휘를 맡은 야전 장교들은 사관학교에서 배운 전술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갈팡질팡했으며 전선의 교착을 답답하게 여긴 정치가들과 군수뇌들은 무리한 작전을 세웠다. 그 사이 낀 그 병사들은 여전히 기관총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오직 병사들만이 그들이 무의미한 목적을 위해 돌격했고 죽었다는, 그리고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무의미한 지옥이 4년간 계속된 곳이 서부전선이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아 귀환한 이들의 정신 세계가 어떠했는지 추측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대개 전쟁 혐오자가 되거나(톨킨이 택한 길이었다) 전쟁 찬미자가 되었다.(히틀러가 택한 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에서는 후자가 정권을 잡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플랑드르 지방의 축축하고 추운 밤을 통해 침묵 속에서 행군했다. 안개를 뚫고 낮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강철로 된 아침 인사가 윙 소리를 내면서 우리 머리 위로 날아오더니, 날카로운 폭발음을 내면서 닥은 탄알들이 대열 사이로 날아 축축한 땅바닥에 꽂혔다. 하지만 작은 연기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200개의 목구멍에서 최초의 만세 소리가 터져나와 죽음의 심부름꾼을 맞이했다. 그런 다음 딱딱하는 소리, 외치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시작되고, 우리는 불타는 눈길로 앞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달려나가 마침내 순무 밭과 산울타리를 지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이었다." (히틀러, 나의 투쟁)

1차 대전 이후 나찌의 파시즘에 가장 열렬히 복무한 이들은 바로 이런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옥에서 귀환한 형제들이었으며 그 지옥을 겪지 않은 모든 이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했다. 그들은 서부전선을 잊지 못했고 극복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서부전선으로 바꾸어 놓고자 했다. 나찌는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이는 서부전선의 참호 속에서 계층 간의 온갖 한계를 넘어 피로 맺어진, 이른바 참호의 사회주의였다. 이들이 돌격해야 할 적들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유태인들이었다.

한 편으로 서부전선의 기억은 히틀러의 독일을 마주한 프랑스의 무기력과 주저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마지노선이 돌파당한 프랑스는 병력 상 독일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신속하게 항복했다.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감히 되풀이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또 두려워했다. 히틀러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전쟁을 혐오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는 처칠(홉스봄은 처칠을 가리켜 1914년 이후 내렸던 모든 정치적 결정이 틀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올바른 선택-히틀러와 맞서는 것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고 장난스럽게 평한다)과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혐오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던 루즈벨트였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참고글: 주경철의 '대항해시대' 정리

주경철의 [대항해시대]는 15-18세기 근대 세계의 해양팽창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몇 가지.

1.
15-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이 해상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산업혁명을 거쳐 유럽의 우위와 확고해지기 전까지 사실 유럽이 동아시아나 인도에 비해 확고하게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해양팽창은 일방적인 침탈의 역사라기 보다는 서양의 팽창에 이은 다른 지역의 적극적인 대응과 전환의 역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럽의 팽창은 18세기까지 확고한 우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은 대개 중요한 지점에 거점을 설치하고 그 거점들을 잇는 무역 루트를 개발하고 장악하는 방식으로 팽창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개인들은 각 거점에 활동하던 이른바 "상업 디아스포라"들이다. 점과 선으로 이어져 있던 이 디아스포라들의 집합이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 디아스포라들은 서로 흩어져있었으나 또한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기도 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좋은 사례이다. 이들의 무역은 국가의 철저한 무력과 금융 양편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그러나 유럽이 내륙으로 파고들어가고 확고하게 식민지를 구축한 것은 사실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시기가 되서야 비로소 유럽국가 기구들이 완전히 근대적인 형태를 띄고 다른 지역을 압도한 덕분일 것이다.

2.
근대 세계의 해양팽창을 특징짓는 것 중 하나는 폭력의 세계화다. 이런 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유럽식 군대와 전쟁의 확산이다. 최초에 유럽인과 접했던 문명, 특히 동남아시아 해상권이나 신대륙의 선주민들은 유럽식의 전쟁 관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의 전쟁은 오늘날의 스포츠와 비슷하게 치러졌다. 사상자는 거의 없었으며 복잡한 관례와 의식으로 통제되었다. 전쟁은 대개 지배 확장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런 관습과 전통 아래 살던 이들에게 유럽인들의 폭력적인 전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항해 시대 초기 선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은 이런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 컸다. 그러나 초기의 접촉에 의한 충격이 지난 뒤 선주민들 역시 유럽의 전쟁 방식을 곧 받아들였다. 말과 총을 받아들여 멸망 직전까지 끈질기게 저항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좋은 예이다.

3.
대항해 시대 해상생활과 선원들의 실상을 다룬 파트가 특히 좋았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했던 선원들의 문화가 근대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선취했다는 것, 당시의 무역이 일종의 벤처 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등은 재미있고 의미있는 지적이다.

4.
이 책의 3부는 근대 해양팽창의 결과를 다루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 대항해시대는 폭력의 세계화 과정이었다. 이 폭력은 대개 비유럽 지역의 전통적인 사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몇백년동안 자신들의 관습과 문화를 발전시켜오며 살아오던 수많은 부족들이 유럽과의 접촉으로 멸망했다. 노예로 팔리거나 플랜테이션 노동자가 되거나 하는 편은 차라리 살아있기라도 한 편이었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병원균들-천연두, 매독 등-은 소리없이, 빠르게 유럽과 접촉한 사회를 절멸상태로 몰아갔다.

말과 소, 양같은 유럽의 동물 뿐 아니라 작물들까지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었다. 남미와 호주, 동남아시아의 거대한 삼림이 파괴되고 목초지가 되었다. 멕시코의 광대한 초원은 지나친 목양사업으로 인해 사막이 되기도 했다. 이런 것들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었다. 대항해시대 이전에 확고한 문명권을 이루었던 아시아 사회를 제외한 다른 문명들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파괴되거나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아시아 역시 곧 그렇게 될 운명이었지만.

물론, 다른 사회의 사람들이 그저 폭력의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그 충격에 저항해 나름의 흐름을 만들었다. 여러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은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중국과 일본은 저항했다. 기독교의 전파는 현지의 문화와 융화될 수 밖에 없었다. 아메리카에서 전해진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는 많은 이들을 기아의 위험에서 구해냈고, 19세기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일조하기도 했다. 유럽의 폭력에 맞서 신세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를 조용히 건설해나갔다. 이 조용한 흐름들이 19세기 민족주의의 발흥과 만나, 독립의 물결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5.
유럽의 근대는 폭력의 동력들이 차근차근 축적되온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대항해시대의 팽창이 폭력적인 방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 내부의 국가와 자본 역시 폭력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윌리엄 랭어는 1914년의 세계 1차대전을 가리켜 그토록 끔찍하고 잔인하며 무익했던 전쟁이 실제로는 별다른 이유없이 지속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미스터리이자 비극이라 말한 적 있다. 어쩌면 근대 내내계속 축적되어온 폭력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터져나온 것은 아닐런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20세기 현대사의 흐름

20세기는 전쟁으로 시작됐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이 4년 동안 유럽 대륙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 넣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쟁이 그토록 대규모로, 또 오랜기간 계속 된 것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간의 외교관계가 복잡해지고, 국가의 자원 동원 능력, 전쟁 수행 능력이 크게 향상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각 국가는 전면전을 대비해서 대규모의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하는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이런 계획은 한번 실행되면 수정되거나 되돌리기 어려웠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자 각 국은 계획에 따라 자원을 동원했고, 이 자원이 먼저 소모되기 전까지 전쟁은 교착 국면이 지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른바 '참호전'의 시작이었다.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1차대전을 끝으로 19세기의 자유주의는 끝났다. 전간기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러시아에서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자리잡았고, 미국과 독일에서도 더 강해진 국가가 전면에 나서 사회를 계획하고 개조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이런 경향이 거 강해졌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의 거시경제 조정이 주류가 됐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들 중에서도 이런 국가가 주도해 사회를 개조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런 흐름은 결국 엘리트 대 대중의 구분을 더 뚜렷하게 나누는 지적 조류를 강화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대대적인 경제 부흥은 농경의 시작 이후 인류 사회에 가장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다. 식량 생산, 위생시설 등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도시의 인구가 폭증했는데, 이는 인류 역사 상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농촌 사회 우위의 인구 거주구조에 대한 대반전이라 평가할 수 있다.

맥닐은 인류 역사에서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농촌 사회가 인류 역사를 지속시켜온 원동력이라 보고 있다. 농촌은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운영하고 도시에 노동과 자원을 공급하며 사회를 지속시켜주는 각종 도덕과 전통을 지속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세기의 발전은 그런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20세기 역사는 도시 문명 중심의 역사다. 인구의 재생산은 도시에서 이뤄지며, 사회의 관습과 도덕도 도시에서 나날이 갱신되고 있다.

수송수단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은 농촌이 도시에 예속되고, 또 도시와 큰 차이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게 했다. 현대의 농촌은 일종의 낙후된 도시로서 존재한다. 이런 문명이 앞으로 얼마나 생명력을 가질지 좀 더 두고봐야 한다고 맥닐은 지적한다.

2013년 7월 6일 토요일

참고글: 로크와 명예혁명, 17세기의 지적 배경


 
명예혁명은 영국 의회의 의원들이 당시 영국의 왕이던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 과 메리 부처를 불러들여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왕위 교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명예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치경제적 결과이다.

윌리엄 3세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받아들여 이것이 권리장전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핵심은 국가의 재정 정책의 주도권이 의회로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권리장전 이후로 영국의 왕들은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게 되었고 예산 및 전쟁관련 정책 결정에서도 역시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제임스 2세가 축출된 것은 바로 그런 권리장전의 내용과 상반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의회의 권리선언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권리선언을 하나의 법으로 공포한 명예혁명을 주도한 것은 의회에서도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신흥부르주아지 계급에 속한 의원들이었다. 그들이 윌리엄과 메리 부처를 추대한 것은 일차적으로 메리가 제임스 2세의 아들에 이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공이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다는 것도 의원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당시 유럽의 최대 상업국가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이었으며 오렌지 공 월리엄은 일종의 상인들의 대표로서 공화국을 통치했다.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영국의 의원들로서는 확고한 프로테스탄트이자 상인들의 통치자인 월리엄 공에게서 제임스 2세와 같은 위험 요소는 없을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17세기 내내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 상의 치열한 경쟁자였다는 점이다. 두 나라 상인들은 대서양과 인도로의 중계 무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영국은 16세기 무렵 1차 엔클로저 운동을 통해 이미 양모의 가공 및 수출 산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 부상했고,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모직물 공업이 번성했다. 특히 상업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과 인도양 쪽으로 넘어가면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변방의 약소국에서 유럽 최고의 상업 국가로 탈바꿈했다.

양 지역의 상인들은 큰 부를 쌓게 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 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공화국의 길에 들어섰다. 네덜란드 혁명의 주체는 각 도시의 실질적인 실력자들인 상인 계급이었다. 표면상 명예혁명과 네덜란드 혁명 둘 모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갈등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상인 계급과 전통적인 지배계급 간의 갈등이 깔려 있었다. 상인 계급에게 있어 군주의 절대적 지배는 무거운 과세와 상업 활동의 규제를 뜻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업 부르주아 계급 모두 혁명의 결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의 재정 기구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는 상업 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유럽 최고 수준에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종교 개혁으로 인해 카톨릭 신학의 전통적인 규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연 탐구 활동이 권장되고 있었다는 점이 과학발달은 촉진했다. 두 나라는 17세기 유수의 자연과학자들을 배출했다. 어떤 점에서 17세기는 뉴턴의 세기였다. 그는 중세적 우주관을 완전히 탈피해 근대적 자연관을 완성해냈다. 그의 연구 업적은 그가 속한 왕립학회를 통해 공유되었다. 네덜란드의 호이겐스는 영국의 왕립학회 회원이면서 뉴턴과 서신교환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유럽 과학계는 그런 서신교환을 통해 하나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다.

로크 역시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그는 뉴턴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 자신도 로버트 보일의 기체 역학 실험을 돕기도 하는 등 과학자로서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그 당시 왕립학회 회원들은 자연과학의 탐구에 있어 경험주의적 방법에 경도되어 있었다. 경험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적 방법론, 즉 가설에 의한 추론을 배척하고 실험에 의한 경험적 자료의 축적을 통해 하나의 법칙을 도출하고자 했다. 뉴턴은 이런 경험주의적 방법을 통해 그의 만유인력 법칙을 도출해냈다. 그는 우주의 모든 물체들의 운동 원리를 단 3가지 수학법칙으로 간결하게 포현해냈다. 뉴턴의 우주는 수학으로 표현된 기계적인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였다. 로크는 그런 기계적 우주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통치론>에서 로크는 하나의 가설적인 상태인 자연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자연 상태는 그 자체로 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인간들이 그저 모여 있는 상태이다. 이들의 행위는 자연 상태에 내재한 하나의 법칙, 자연법에 의해 규율된다. 이 자연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관철되는 법칙이며 오직 이성에 의해 발견되고 준수되는 법칙이다. 로크는 그 자연법을 노동에 의한 재산의 획득과 그에 대한 권리주장이라 봄으로써 재산권의 획득과 보호를 하나의 보편적 법칙으로 바꾸어 놓았다.

참고글: 존 로크의 '통치론' 정리

1.
로크의 <통치론>은 지금 읽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열심히 늘어놓아서 당황하게 된다. 그건 로크가 실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사고에 로크의 주장이 은연 중에 깔려있다는 방증이다. 내 생각에, 현실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근대 정치철학의 최종 승자는 로크다.

2.
로크의 주장을 낮게 보는 이들은 <통치론> 자신의 스폰서가 정권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적어놓은 책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이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보다 로크의 통찰이 빛나는 지점은, 역사적 과정의 전개에서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인지를 탁월하게 포착하고 그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한 이론적 기초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내놓았다는 데 있다.

로크는 상업 자본주의가 만개하던 시대의 영국에서 살았다. 그가 살았던 17 세기 당시 영국의 전통적인 지배계층은 토지귀족이었으며 상업으로 축재를 하기 시작하던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던 시점이었다. 로크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었던 명예혁명은 전통적인 토지귀족 계급과 상업으로 축재를 한 부르주아 계급 간의 최초의 격돌이었다. 로크의 직업은 의사였는데, 당시의 의사는 지금으로 치면 정신과 전문의쯤의 역할을 했다. 그의 주된 고객들이 대개 부르주아 계급이였던 탓에 그들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로크를 후원했던 세력, 더 정확히는 그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샤프츠베리 백작은 당대의 정치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주된 조언자이자 보좌역이었던 로크의 명성 역시 덩달아 유명해졌다. <통치론>이 오늘같은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로크 자신이 당대에 정치적 승리자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치론>이 오늘날 정치적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통치론>에 담긴 주장이 부르주아 계급의 구미에 딱 들어맞은 덕분이다. 로크는 어찌보면, 당대의 역사적 흐름을 꿰뚫어보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직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3.
<통치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크게 자연법이론, 사회계약론, 저항권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논의를 하나로 잇는 큰 줄기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간의 재산권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며 정부의 목적은 바로 그 재산권의 보호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별로 길지도 않은 <통치론>에서 잊을만하면 반복된다.

로크는 재산권을 폭 넓게 정의한다. 개인의 부 뿐만이 아니라 생명과 신체의 자유같은 것도 포괄할 수 있는, 인신의 권리 모두가 재산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노동을 투여한 모든 것은 그의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로크의 주장이다. 재산권은 오직 타인의 필요를 침해하는 것에 의해서만  한계지워질 뿐이다.

로크의 주장은 재산권의 정의를 교묘하게 넓히면서 그것을 자연권이라 정의하는데서 그 탁월함이 있다. 그는 재산권을 천부적인 권리로 격상시킴으로써, 다른 모든 것의 상위에 두고 그 것을 보호하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라 논증하면서 통치의 원리를 이끌어 낸다.

사회계약론은 별 거 없다. 사람들은 자연상태에서 그들의 천부적인 재산권을 누리며 자유롭게 산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는 타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재산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오직 자연상태의 자유인들은 오로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국가의 통치 아래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진 정부는 시민 개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 되고 그 노릇을 잘 못하는 정부는 전복되어 마땅하다. 이 것이 로크의 <통치론>이 말하는 핵심이다.

4.
로크의 정치철학은 플라톤의 그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 것은 고대와 근대의 차이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그 찬반여부나 가능성여부와는 무관하게 여하튼 "덕의 공화국"이다. 그에게 있어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불어살아감으로써 완성되는 존재이며, 그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올바름'에 기초해야 한다. 플라톤은 사람이 무엇보다 선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였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 영혼을 더 높은 것으로 갈고닦아 인간으로써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로크는 근대의 사람이었다. 근대는 공동체와 분리된, 공동체에 앞서는 개인이 나타난 시대였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 보았고 뉴턴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기계적인 법칙이며, 그것은 규명될 수 있는 힘이었다. 근대는 '내'가 가장 우선되는 사회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가 일차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증명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어야 했다.

플라톤은 국가를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한 올바른 기초에 놓길 원했지만 로크는 국가를 재산의 보호라는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보았다. 그는 물질의 운동이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이라는 당시의 세계관을 철저하게 믿었다. 비록 뉴턴의 '힘'은 비물질적인 힘이었지만, 그 것은 규명되지 않았다.(뉴턴 자신은 힘이 어떤 존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힘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아는 것, "그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물질은 그가 가진 재산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비물질적인 것들은 경험될 수 없고 증명될 수 없으니 배제되었다. 그저 신이라고 말하며 눙치듯 넘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플라톤의 <국가>가 올바른 삶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따져물었다면, 로크의 <통치론>은 그저 국가가 기초해야 하는 가치의 형식 만을 중요시했다. 그 삶은 그저 내가 가진 재산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영혼이라 말한다면, <통치론>은 그저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인간이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머지야, 로크에게는 내 알 바 아니었던 듯 싶다.

그렇게 로크는 정치적인 것의 범위를 극적으로 좁혔다. 경험 가능하며 뚜렷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 만을 중요시했던 로크에게 있어 이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5.
로크는 <통치론>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국가는 이제 선을 위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재산의 보호를 위한 도구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그 것은 그 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인민이 자유로부터 철학자왕이라는 권위로의 도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로크의 국가는 오로지 그 인민의 재산을 보호할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개인에게 맡겨두었다. 그가 어떻게 살건 간에, 불행하던 행복하던, 성공하던 망하던, 배가 터져죽던 굶어죽던, 그건 개인의 삶이지 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적어도 가능성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로크의 공화국의 시민은 플라톤의 공화국의 신민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것이 비록 굶어죽은 자유라 하더라도.

6.
오늘날의 자유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국가의 목적을 논한다면 그들이 국가가 가진 목적과 한계는 뚜렷하다. 그 국가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국가다. 그게 안되는 국가는 전복되어야 마땅하다. 공권력을 이용해 인민의 생명을 앗고 재산을 강탈해 그들의 배를 불리려는 자들은 그저 날강도떼에 불과하지, 자유주의자라 불러서는 안 된다.

로크가 오늘날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아마 용산 참사를 애도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경찰은 아마 로크를 때려잡을 것이고. 아니, 영어로 방송할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은 비키라고. 17세기 영어 악센트로 발음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참고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정리


1.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군주가 어떻게 집권하며 어떠게 그 국가를 유지하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군주론>이 그 같은 권력 투쟁에서 군주 개인이 승리하는 방법을 담은 처세서/지침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2.
<군주론>은 군주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이 대개 일치한다는 대전제 아래 논의가 전개된다. 그 이익은 한마디로 말해 생존이다. 국가의 안보야 말로 군주가 인민을 대표해 추구하는 목적이며 그 수단은 곧 가차없는 행동력 - 국가 이성이다.

3.
마키아벨리가 생존을 국가 전체의 목적이라 본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탈리아 정세를 반영한 것이다. 르네상스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이탈리아는 용병대장과 은행가의 시대였다. 이 양자는 모두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였으며 그 수단은 군대와 돈이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4차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런 시대를 잘 보여주는 예다. 베네치아는 성스러운 전쟁을 식민지 건설과 돈벌이를 위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바꿔놓았다. 그 비즈니스에 도덕과 종교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4.  
군주와 인민의 이익이 공통의 것 - 생존이라는 가정은 사실 터무니 없는 것이다. 근대 정치는 군주/국가와 인민 간의 이익이 대립한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했다. 정치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곧 양자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이 같은 방식의 군주와 인민의 대립은 생소한 것이었을 것이다.

5.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군주는 권력을 추구(해야)하는 존재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며 그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독특한 결론이다. 그가 말하는 군주의 덕(virtu, 비르투)은 고대나 현대적 의미의 덕이 아니다. 그 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능력, 도덕에 구애됨 없이 냉철하게 손익을 계산해 수단을 활용하는 역량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비르투가 가득한 인간이야 말로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으로 본 군주다.

6.
마키아벨리의 업적은, 무엇보다 정치를 종교에서 분리해낸 것이다. 그는 정치에서 도덕과 가치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정치를 권력 추구의 문제로 한정시켜 논의했다. 그 것은 정치를 학문으로 만들려는, 즉 과학적으로 정치 문제에 접근하려는 태도였다. 이 것은 마키아벨리 특유의 정치적 현실주의로 귀결되었다.

7.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선험적인 일반적 공리 몇 가지를 도출해낸다. 그 것은 과거의 사례와 당대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은 공리들이다. 그 공리들은 대개 인간은 악하며 이익 추구를 하는 존재다,라던가 군주는 도덕에 구애됨 없이 손익을 계산해야 한다, 인민의 호의를 사는 것이 권력 추구에 도움된다는 따위의 것들이다.

8.
마키아벨리는 엄격한 의미에서 합리주의적, 또는 경험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진실로 믿었다는 점에서 그는 경험주의적 방법을 취했고, 그의 논의를 일반적 공리 위에서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적 방법을 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정치를 근대의 과학적 원리 위에 놓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과학으로서의 정치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뤄야 했다.  

9.
가차없는 생존투쟁으로 가득찬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세계관은 다른 무엇보다 국제정치의 현실에 가장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는 로크의 <통치론>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관점이다. 국제정치에서 국가의 생존은 무엇보다 최우선의 목표가 된다. 국가의 무력 사용은 그 안보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정당화된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10.
마키아벨리는 냉철하게 이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살아남는 것이 최선의 목표인 세계에서 도덕을 논하는 것은 파멸의 지름길이었다. 그에게 있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는 법이다. 이런 세계관은 홉스와 로크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홉스는 그 생존 투쟁을 개인간의 관계에 적용한 뒤, 오직 그 폭력을 지고의 폭력을 가진 괴물 리바이어던만이 끝낼 수 있다고 선언한다.

11.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 마키아벨리의 시대에 국가간의 전쟁은 아직 낭만적인 수준이었다. 그것은 제한전이며 상대의 절멸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의 전쟁은 총력전이며 상대의 절멸만이 목적이 되었다. 이 것은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따르면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나, 또한 파국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기도 했다.

12.
근대철학자들은, 상스럽게 말하자면, 삽질하지 않는 개인을 찾아내고자 했다. 마키아벨리는 그 삽질하지 않는 개인을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가차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국가이성에서 찾으려 했다. 헤겔은 그 논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 시민사회의 이기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영역으로서 국가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삽질하지 않는 국가는 서로에게 총질을 해댔고, 이로써 근대의 세계는 두 차례, 파국 직전까지 갔다.

13.
마키아벨리가 열어젖힌 근대의 정치 세계는 플라톤의 덕의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위는 현실에 압도되었고, 그 자체로 선한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은 그저 계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 자신의 정치적 현실주의가 열어젖힌 세계를 보고 마키아벨리가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군주론>을 고쳐쓰지 않을까.  

참고글: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정리


1.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서술되었으며 그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은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가리킨다.

2.
맑스는 자본론을 총 4권으로 기획했으나 생전에 직접 출간한 것은 1권뿐이다. 나머지는 엥겔스가 맑스가 남긴 노트를 편집해 출간 한 것이다. 즉, 자본론 1권은 맑스가 직접 감수한 것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한다.

3.
자본론 1권의 구조를 봐야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전체 흐름을 알 수 있다. 자본론 1권은 자본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서, 1권 4편에서 7편에 이르는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에 대한 분석이 그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이 분석을 위해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상품과 화폐이다. 자본은 화폐의 형식으로 축적되며, 화폐는 상품의 한 특수한, 일반적 등가형태이므로 이 둘에 대한 분석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본론 1권에서는 상품과 화폐 분석이 1편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이 시작되는 지점, 즉 자본의 역사적 기원으로서 시초축적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이 순환하는 양상과 최초에 시작하는 양상은 질적으로 다르며, 또한 그 시작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알아야만 현재의 자본 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자본론 1권의 마지막을 이룬다.

4.
자본론 1편은 상품과 화폐에 관해 다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론은 상품의 분석에서 시작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상품 생산을 기초로 삼는 것이며 상품 안에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가 추상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고도의 추상이다.

상품이 성립되려면 교환되어야 한다. 교환의 척도는 가치인데 이 가치는 상품에 투입된 추상적 노동 일반의 양에 따라 비교된다. 또한 그 가치를 비교하기 위한 하나의 일반적 등가형태로서 척도가 필요한데 그 것이 화폐이다. 화폐는 상품 교환과정에서 파생되지만, 곧 자본 축적의 핵심이 된다. 

상품과 화폐의 교환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수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뒤에 은폐된 역사적/사회적 관계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다. 일례로 상품의 일반적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가치의 척도로서 질적으로 동등한 이른바 추상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는 오직 역사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며, 그 뒤에 노동의 상품화와 자본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

2편은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체제이다. 이는 간단한 도식으로 M-C-M`라 표현된다. 상품 생산과정에 투입된 자본은 그 투입된 자본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이끌어내야 하는 모순에 빠지는데 이를 위한 조건이 바로 노동력의 자유로운 구매와 판매이다. 이 노동력은 상품의 가치를 창조하는 추상적 노동일반과 구별되는 물리력의 소비이다.

3편은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투입된 자본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핵심적인 원리가 바로 잉여가치이다. 간단히 말해 노동은 그 것이 받는 가치(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낸다. 잉여가치는 다시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로 나뉜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을, 상대적 잉여가치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간의 비율을 가리킨다. 축적에 있어서는 이 둘 모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적 잉여가치이다.

4편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늘이기 위해서는 필요노동을 줄일 필요가 있다. 필요노동을 줄이는 것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를 줄이는 것인데, 이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들어가는 각종 생활수단의 가치를 줄이는 것, 즉 노동생산성의 제고를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양식의 다양한 재편이 요구된다. 사회는 협업과 분업, 매뉴팩쳐 체제를 거쳐 마침내 기계제 대공업에 기반한 생산 체제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한다. 기계제 대공업 사회에 이르러 노동자는 탈숙련화되어 생산조직 자체의 부속물로 전락하게 되며, 이에 따라 생산조직 내부의 독재와 생산조직 외부의 무정부성 간의 모순이 극에 달한다. 이 모순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산업생산의 불안정성이 파생된다. 

5편은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이 편에서 맑스는 앞에서 논의한 것을 일정부분 반복하면서 잉여가치 생산에 관한 일반적 공식을 몇 가지를 다룬다.

6편은 임금에 관한 논의다.

임금은 흔히 노동의 가격이라 하지만 노동 자체가 가치를 창조하는 한 이는 동어반복이다. 실제로 노동자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매한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노동의 가격으로 은폐하는 것에 착쥐 관계의 본질이 있다. 임금은 시간급과 성과급의 두 형태로 나뉘는데 이 두 형태 모두 착취관계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7편은 자본의 축적과정에 관한 논의다.

이 편은 자본론 1권의 절정이자 핵심을 이룬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탱하기 위한 단순재생산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는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가능하기 위한 토대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임노동자의 생산수단에의 접근이 계속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 이르는 고찰까지. 여기에 이르러 자본주의 사회 기본 운동법칙이 밝혀진다.

상품은 교환법칙에 따라 교환되지만 그 것 자체의 모순에 의해 부등가 교환의 토대를 마련한다. 최초의 자본축적-시원적 축적-은 상품의 등가교환 법칙에 의해 마련되었을지 몰라도 자본의 축적이 진행되면서 이제 축적은 오직 잉여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즉, 노동력이 부등가교환되는 것이 잉여가치의 축적에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노동생산성, 착취도, 노동강도 등의 기타 요인들은 잉여가치의 축적량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축적이 진행되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변화가 온다. 자본의 축적 자체는 노동 수요의 증가를 불러오지만 자본 축적이 진행되면 고정자본의 상대적 크기가 늘어나면서 노동인구의 일정 부분이 산업예비군으로 남게 된다. 이 산업예비군이야 말로 노동계급을 상대적 빈곤과 자본에의 예속상태로 남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이런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기적 공황과 노동계급의 영속화된 빈곤의 근본적 원인이다. 즉, 산업예비군은 호황기에 급속한 생산의 확대를 가능케하며 또한 그 확대로 인한 축적으로 인해 다시 실업상태로 몰리게 되는데(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변하면서) 이로 인해 공황이 야기된다. 그에 따라 산업예비군은 호황기에는 생산조직에 유입되고 불황기에는 축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노동계급의 생활조건 개선에 대한 요구를 무력화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불안정성이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안정성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모순 위에 있다. 

또한 자본의 축적은 집적과 집중의 두 방식에 따라 이뤄지는데 집적은 단순한 자본의 축적이며 집중은 둘 이상의 자본이 합쳐지는 과정이다. 특히 공황기와 회복기에 두드러지는 것이 이 자본의 집중인데, 이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경쟁의 필연적 결과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의 생산수단은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

8편은 시초 축적에 관한 장이다.

"자본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리고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난다."

4.
자본론의 분석 가운데 일반적인 오해를 사고 있는 것 하나는, 맑스가 자본의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노동계급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절대적으로 하락할 것이라 예견한, 이른바 궁핍화 명제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2차대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의 생활상이 급속히 개선된 점을 들어 맑스의 예측이 틀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자본론을 읽어보면 맑스의 주장은 노동계급 물질적 생활조건이 상대적 궁핍화되는 것, 즉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을 예건하고 있으며,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절대적 수준 자체는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어나는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 경향을 적절히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5.
자본론에서 다루는 '자본'을 자본가로 오해하면 안된다. 맑스는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개별 자본가의 행동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본은 하나의 실체라기 보다는 과정이며 임노동과 독점된 생산수단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관계의 현실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개별 자본가나 노동자의 행동이나 의지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6.
자본론의 분석은, 맑스가 인용하는 자료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책이 씌여지던 19세기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맑스 자신이 자본론을 예언서로 썼다기 보다는 해부서로 썼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따라서 자본론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특히 맑스가 인용한 자료들이 대개 당대의 정부보고서나 기사, 학자들의 저술들임을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대의 현실을 살피고 그 것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묶는 일이지 이미 죽어버린 이들의 책을 죽어라 들이파면서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능사가 아님을, 자본론을 읽으면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7.
하나 더, 자본론 1권을 읽으면서 새삼, 이 책 들이파봤자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한 뭔가 유용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단 걸 알았다. 외려 자본가로서 착취하는 방법에 도통할 수는 있겠다. 2007년 쯤 뉴욕타임즈에 월스트리트에서는 자본론 읽는 게 유행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 있는데, 이제 납득이 간다.
   

참고글 :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현실 사회주의가 유사파시스트 체제가 되었던 탓인지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사상, 특히 마르크스-레닌 주의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가치가 '자유'라는 것이 종종 간과된다.

마르크스 자신은 그의 저작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선언하는 '공산당 선언'(마르크스가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그에 앞선 공상적 사회주의와 자신의 사회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엄격하게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 구분은 뒤르켐이 확실하게 한 바 있는데, 약술하자면, 공산주의는 전근대적인 개념인 반면, 사회주의는 근대적인 개념이다)에서 마르스크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체제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 표현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표방한다. 그 자유는,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억압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만을 강조했지만, 그 자유주의는 결국 금전유대에 기반한 상업적 자유, 가차없는 돈벌이의 자유만을 남겨두었다. 다른 모든 자유는 오직 돈벌이의 자유가 확보된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마주한 당대의 현실이었다. 12시간의 표준 노동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지리한 투쟁일 벌여야 했던 비참한 현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국 가차없는 돈벌이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모든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적 기획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말한다. 그들이 표방하는 체제는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 자체가 원래 인민이 주권을 가진 체제이니 인민민주주의는 결국 동어반복인 셈이다.) 혁명을 통해 그들이 철폐하고자 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철폐이며, 그 사적 소유는 오직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 일부에 의한 생산수단의 배타적인 독점을 말한다.

로크 이후의 근대 자유주의 국가에서 보장된 사유 재산권은 본래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의해 마련한 재산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유재산권의 보장으로 인해 전개된 역사는 일부 계급에 의한 사회 전체 부의 독점으로 귀결되었다. 재산을 가진 이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으나 반대로 재산을 갖지 못한 이는 자유도, 그리고 자유로서 실현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도 없었다. 재산없이 그들, 프롤레타리아는 더럽고 게으르며 부도덕한 짐승으로 취급되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법칙에 의해 그들 자신의 가능성에서 소외된 노동 계급의 모습은 그와 같이 비참하였다.

마르크스는 격분했다. 그가 보기에(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노동하지 않는 이에게 보장된 자유가 다른 모든 노동하는 이들의 자유, 인격, 가능성, 미래를 모두 앗아가는 그런 체제가 정의롭다고 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부정했다. 아니ㅡ 더 장확히는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사회였다. 그가 헤겔에게서 이어받은 역사의 개념에 따라, 역사는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그 모순으로 인해 더 높은 차원의 사회에 길을 내어줄 터였다.

마르크스의 예견에 따르면 그 길은 사유재산의 철폐로 시작될 터였다. 그 철폐는 인민에 의해 생산수단이 소유됨으로써, 즉 생산수단이 사회화됨으로써 이뤄진다. 국유화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인민이 주인으로 행세하는 체제의 기본 조건은 특정 계급에게 독점된 자유를 모든 이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자본주의 운동 특유의 공업화와 보편화는 노동계급을 한데 모으고 각성시킬 터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각성과 뒤따라올 노동계급의 조직화, 그리고 필연적인 승리를 점쳤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승리와 함께 성취될 터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곧 노동 계급 자체의 당파성을 떠나 더 높은 차원의 보편성 앞에 길을 내어줄 것이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경제적 차원의 차별과 대립을 없앰으로써 모든 이들이 동등하게 될 것이고, 이는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개인만이 남은 상황, 즉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등장하는 상황이 된다.  혁명의 단계에서 전위에 선 정치도 폐기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가 우습게 봤던 멜서스와 비슷한 신세가 된 것처럼 취급되었다. 그는 그에 앞선 모든 시대를 탁월하게 설명했으나 그에 뒤 따라올 시대를 예언하는데 실패한 이로 취급되었다. 그가 밝힌 역사의 법칙은 그가 밝힌 그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는 국유화의 단계에서 국가독점의 자본주의로 왜곡되어 나타났고, 그 등장만큼이나 혁명적으로 망했다. 

마르크스가 낙관했던 동일한 계급을 가진 단일체로서 노동계급은 등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내파했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조건은 오로지 물질적이며 경제적인 것 위에 세워진다.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 이외의 것을 끊임없이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자본주의의 힘이 계급의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터져나오고 부과되었다. 그 힘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인민대중의 삶 위에 편재하고 있다. 푸코처럼 도처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결국 자본주의 하 인간들은 돈에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다. 돈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마저도 그러하다. 마르크스의 혁명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 혁명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삶에 들러붙어 있는 돈, 경제적인 것, 그 것들이 부추기는 우리 안의 욕망들, 그 욕망들이 보여주는 삶의 가능성들, 그 가능성의 추구가 불러오는 결과들, 피해들, 죽음들. 그 모든 것을 밝히고 또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것, 즉 경제적 삶에 파뭍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혁명의 정치는 결국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리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금 머무르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도록 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노동계급이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정치적 기획이 무용한 이 황량한 탈정치의 사막에서 오직 정치적일 수 있는 것은" 즉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은 결국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30일 일요일

근대 유럽:AD1648~1914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프랑스 혁명 전까지 유럽의 체제를 '앙시앙 레짐'이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절대군주제와 복잡한 국제정치, 제한전, 중상주의 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맥닐은 종교전쟁이 대륙을 휩쓴 후 다원주의 문화가 뿌리내린 것을 이 시기 유럽의 큰 특징으로 본다.

앙시앙레짐 시기 유럽 정치의 중심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앙리 4세가 국내의 종교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해 루이 14세에 이르러 국력의 절정에 이른다.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 체제와 상비군이 자리잡았고, 법치주의도 서서히 확대됐다.

대륙의 중심 조류가 절대왕정이었다면, 영국은 명예혁명 후 지방주의에 근거한 의회제도가 자리잡았다. 의회는 내각과 국채라는 두 제도를 통해 국가 운영을 했다. 내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맞춰 탄력적인 국정운영을 가능케했고, 국채는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비용을 낮췄다.  이 것이 17세기 영국의 국력을 신장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는 민주혁명이 일어나 유럽에서 앙시앙레짐이 붕괴되고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산업혁명의 본질은 생산의 기계화, 임노동의 조직화, 대량 생산과 대량소비의 시작이다. 초기 산업혁명은 소수의 발명가들에 의한 기술혁신에 의존했다. 방직산업과 철도산업, 증기선 등이 산업혁명의 초기 국면을 이끌었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는 고도의 과학이론과 기술이 결한하는 대규모의 화학공업, 철강산업 등이 등장했다. 대학제도가 발달했던 독일이 이 시기에 급성장했다.

프랑스 민주혁명은 앙시앙레짐의 재정위기에서 시작했다. 부르봉왕조는 삼부회를 소집해 이 위기를 돌파하려했으나, 이 것이 자충수가 됐다.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제3신분은 신분제 등 현 체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했고, 혁명은 자체의 추진력을 얻어서 급진화했다. 결국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제국 체제가 들어섰다. 이후 19세기 내내 프랑스의 정치는 이런 혁명시기 등장한 패턴이 반복됐다.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은 진정한 세계규모의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전 유럽에서 혁명의 불길을 일으켰고, 산업혁명은 사회의 근본 구조를 바꾸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활상이 열악해진 노동계급의 불만은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수렴했다.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근대 유럽 : AD1500~1648


근대유럽의 시작을 1500년으로 잡는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해 유럽, 특히 서유럽 국가들의 해상팽창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4개국은 유럽을 기점으로 동서로 뻗어나갔다. 이미 문명이 자리잡은 인도양과 동아시아 지역은 주로 연안 지역의 도시를 기점으로 무역망을 건설했고, 문명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 쪽은 유럽의 침공으로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번성했던 잉카 문명은 유럽의 우수한 군사기술과 전염병균 때문에 궤멸됐다.

이런 해상을 통한 팽창은 유럽에 몇가지 변화를 불러왔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화는 한세기 넘게 지속된 인플레이션과 새로운 식용작물의 보급이었다. 신대륙에의 광산에서 유입된 은은 스페인을 통해 들어오면서 유럽 국가들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이런 인플레이션은 경제 성장을 도우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기존의 경제질서를 흔들고 혼란을 불렀다. 또 신세계의 작밀인 고구마, 감자, 옥수수는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인구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 신대륙에 널리 보급된 전염병균도 생태 질서를 교란한 큰 변화였다.

이와 동시에 유럽에서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봉건제의 토대였던 각 지방 귀족 중심의 질서가 중앙의 왕과 국가기구 중심의 질서로 재편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이었다.

국가 중심의 정치질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발달시킨 통치기술, 군사기술의 발달과 상업화, 종교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권위의 필요성과 교회재산 몰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정신적 질서를 끝장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개혁운동은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던 독일 지역에서 호응을 얻었고, 곧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신교는 특히 기존 카톨릭 세력과 지방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곳에서 융성했다. 저지대 국가들과 스위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이 그 좋은 예다. 카톨릭 세력과 지역 관계아 대체로 일치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카톨릭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신/구교의 대립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이어져 온 독일을 황폐화시킨 후 끝났다. 대체로 이 시기부터 유럽의 근대국제정치 질서가 새로운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참고글: 플라톤의 <국가>에 관하여


1.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 중심 주제는 올바른 삶에 대한 것이다. 개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논하는 데, 왜 뜬금없이 국가의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가 나오는가? 그 것은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폴리스에서의 삶은 공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이 나뉘지 않았다. 개개인의 삶은 폴리스의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삶이란 말 그대로 폴리스적 삶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의 아테네는 망해가고 있는 폴리스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델로스 동맹을 이끌며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이자 시민 개개인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 민주정이 어우러진 황금 시대의 아테네는, 이제 금권정치와 온갖 매관매직이 판치는 통치의 난맥상, 극심한 혼란과 이전투구 등으로 혼탁해져 있었다. 동족끼리의 내전이나 다를 바 없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직접 전쟁에 참여한 아테네 시민들의 정신마저 황폐하게 만들었다. 황금시기의 아테네를 지탱해주던 모든 자긍심과 가치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 것이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간단한 배경이다. <국가>를 읽을 때는 이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 골방에 처박혀 자신의 머릿 속에서 환상과 백일몽을 통해 그저 자기만족 차원에서 이상국가를 그려본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살고있던 사회가 좀 더 올바른 사회가 되길 바랬고, 그런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2.
<국가>에서 논하는 올바른 삶이란 일단 올바른 국가(폴리스)의 정립에 기초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 삶이란 폴리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폴리스는 어떤 국가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국가의 구성원들 각자가 그 타고난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나라였다. 플라톤은 사람의 본성을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욕구에 충실한 부류, 명예를 추구하는 부류,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 셋 가운데 플라톤이 가장 하찮게 본 것은 욕구에 충실한 본성이었다. 플라톤은 이들에게는 국가의 모든 치부는 맡겨두되, 절대 통치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욕구에 충실한 이들이 통치를 하게되면 정체는 필연적으로 우매하고 부패한 금권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수호자 계급은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만이 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라 폴리스를 다스릴 수 있었다. 법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지혜는 오직 소수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소수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철학자 왕이다.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는 바로 이런 철학자왕이 다스릴 때에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보았다.

3.
<국가>의 전반부인 1-4권은 이런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면, 후반부인 5-7권은 철학자왕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와 좋음의 이데아론도 7권에 나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철학자왕들은 궁극의 실재이자 모든 실재하는 대상의 근원으로서 이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그가 살아가는 국가가 욕망의 충족이나 명예의 추구에 기반하기 보다는, 그와 같은 궁극적인 선에 기초하길 원했다. 따지고 보면 부유한 나라도, 강대한 나라도 아닌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던 김구의 말과 비슷하다. 김구가 플라톤을 알았던 걸까.

4.   
플라톤의 철학자왕은 민주정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본디 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의 품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체제이다. 민주정 자체가 붕괴하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이 그 체제를 좋게 보았을리가 만무하다.

간단히 말하면, 민주정은 참정권을 갖는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자유가 모든 이들이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평등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플라톤은 자유와 평등 둘 다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면밀히 관찰한 끝에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던 듯 싶고, 그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모든 인간이 철학적 활동을 통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 낙관한 반면, 플라톤은 소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무엇보다 그가 사랑한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 믿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의 비극은 궁극적인 선에 기초한 올바른 국가는 독재자에 의해 다스려지고 다른 모든 신민들은 그 독재자만을 우러러볼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5.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던 당시의 국가정체였던 폴리스는 이제 온데간데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국가는 플라톤이 생각한 국가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플라톤의 철학자왕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근대국가의 여기저기에서 어슬렁거리지만, 플라톤이 말한 바 그대로 철학자왕은 존재할 수 없다. 근대국가는 어디까지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통치의 제일 임무라는 로크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올바른 국가는 궁극의 지혜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에 기초한 것이지만, 근대국가는 먹고사는 문제에 그 사활을 건다.  

6.
결국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 것은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 소득없이 끝날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결국 인간의 영혼에 관한 책이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국가>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플라톤이 올바른 국가에 대해 말한 것은 결국 올바른 삶에 관해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우리 스스로의 영혼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부를 추구하는 욕구, 명예를 추구하는 용기,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 플라톤은 우리 스스로가 욕구를 절제하고 용기를 다스려 그 둘을 지혜를 추구하는 이성의 지배 아래 둘 때, 그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막상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국가>에서 말하는 올바른 삶도 막연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사람만이 오직 영혼을 가졌으며 그 영혼만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다. 영혼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도 하고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결국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길은 오직 올바르게 사는 길 뿐이었다. 그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인지는 다른 문제지만.

참고글:고대 그리스 철학과 정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 생각할 때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들의 철학이 일종의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제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또는 플라톤)이 경건함(또는 신에 대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큰 범죄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였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도 결국 불경죄로 고발당해 죽었다.) 이 불경죄라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것이라 보면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이 국가의 근간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묻는다. 불경죄로 고발당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도대체 그 불경함이란 무엇에 대한 불경함인가. 경건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이 순수하게 사변적이라 볼 수는 없다.

당시 아테네에서 불경죄는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법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장 한복판에서(아테네의 시장은 아고라였다. 아테네의 정치는 아고라에서 이뤄졌다.) 경건함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국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될 수 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은 아테네의 혼란기에 나온 것이다. 그들이 살던 당시의 아테네는 그 자체로 쇠퇴해가는 사회였다. 결정적인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20여년간 지속된 이 동족 간의 내전이 아테네 시민들의 내면에 남긴 상처를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전쟁이 어떻게 벌여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감이 올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철학자 박홍규 선생 강의록의 인용이다.

"그러면 희랍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하고 도대체 어떻게 싸웠냐? 대포를 쏜 것이 아니거든. 페르시아 사람들은 말 타고 활 들고, 갑옷을 입었어. 말 앞에도 말이 안전하라고 갑오 같은 것을 해놨어. 그리고 활 들고, 칼 들고 어떤 사람은 창 들었어. 그리고 희랍 사람들은 헬멧 쓰고, 창 들고, 방패 들고, 에워싸서 육박전으로 싸우는 거야.

또 이런 말이 있어. 일본 군인들이 잔인해서 일본도라는 것이 있어. 그래서 사람의 목을 베야 군인이 된다는 거야. 장교들은 사람 목을 한 번씩 베어야 돼. 그런데 일본서 연습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중국 가서 중국 사람을 데려다 놓고 연습을 했어. 그 사진 하나가 <아사히신문>에 났어. 중국 사람이 머리를 떨구고 않아 있고 위에서 칼로 내려치려고 해. 또 일본 놈들이 옆에서 웃고 있어. 맥아더가 그 사진을 보고 이놈들은 모두 잡아서 집어넣으라고 했거든. 대학에 군사훈련을 맡은 장교가, 우리계급으로는 대령이고 일본 계급은 대좌지.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 칼이라는 게 아주 무서워, 보기만 해도 섬뜩해. 기술적으로 잘 쳐야 한 번에 베지, 그게 잘 안 된다는 거야. 목에서 피가 막 나고 난잡하대. 그 잔인한 일본 사람도 그걸 한번 죽이고 나면 저녁에 잠을 못 잔대. 일본 사람도 다정다감하거든.

희랍 사람들이 어떻게 죽였냐 하면, 육박전에서 상대방을 창으로 찌르고, 상대방은 안 죽으려고 활로 쏘고, 칼로 치고 그러거든. 그것이 한 번에 되냔 말이야. 갑옷을 입고 있는데. 어디 목을 찌르거나, 정강이를 지르거나. 몇 번을 찔러도 잘 안 돼. 그러니까 그건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육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야. 그렇게 죽이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되겠는지를 한번 생각을 해봐. 그 당시에 희랍 사람들은 벌써 야만인이 아니거든. 야만인은 그렇게 하고도 무감각해. 로마 사람들은 경기장에 노예를 집어넣고 좋아라 하고 무감감하거든. 희랍 사람들은 다정다감한 사람들 아냐? 비극 같은 것도 나오고, 산문도 쓰고. 그러고 난 후의 정신 상태(mentality)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

 - 박홍규, 박홍규 전집 2 - 플라톤과 전쟁

이처럼 10년 간의 살육을 겪고 돌아온 시민들의 내면 상태가 멀쩡했을리 만무하다. 그런 사회에서 거침없는 강자의 논리, 즉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도 쉬이 납득이 간다. 플라톤의 <국가>편의 1장은 바로 그런 논리, 살아남은 자, 강자의 이득이 올바른 것이라는 논리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국가의 개혁을 다루는 책이 그 같은 기존 논리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테네 사회가 강자가 정의라는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황폐한 아테네 시민들을 상대로 경건함에 대해, 올바름에 대해, 사랑에 대해 묻고 다닌다는 것은 그런 황폐화되어 가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고 쇠퇴해가는 자신의 공동체를 다시 바른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테네의 정치는 직접 민주주의 정치였다.

여기서 직접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은 모든 시민이 직접 국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테네의 민주정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확률적으로 주요 공직 진출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다. 아테네는 주기적인 추첨 제도로 공직자를 충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정치적 기획인 이유가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에 있다. 누구나 국가의 중요한 공직에 참여하는 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 모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시민이 철인이 될 수 있다고 본 반면, 플라톤은 그보더 좀 더 후퇴해서 철인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철학이 사람들에게 교육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공통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철학적 사유가 곧바로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가능한 폴리스의 민주정에서 가능하고 또 의미있는 일이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그 같은 폴리스 사회는 붕괴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대제국과 로마 제국이 폴리스와 헬라스 세계를 대체했다. 시민이 신민이 되면서 철학은 더이상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없었다.

정치는 황제와 그를 둘러싼 소수의 귀족들의 문제가 되었다. 신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통치자들이 그들을 언제 전쟁에 징발하는가, 얼마나 무거운 세부담을 물리는가의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신민들에게 있어 정치적인 문제는 그와 같은 것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요컨대 개인의 삶이 공동체의 운영, 즉 정치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는 것, 제국의 신민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의미했다. 제국에 이르러 개인의 철학적 각성은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적인 삶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절대 군주제와 거대하고 폐쇄적인 국가기구가 정치를 독점해 개인의 철학적 각성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제국의 정치판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제국의 신민들은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들어가 내면을  파고들거나, 스토아 현인들처럼 명상을 통해 세계를 초월한 우주의 원리를 관조하거나, 에피쿠로스처럼 집 안의 정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쾌락을 좇았다. 이 세가지 철학적 태도 모두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의 삶에 대한 문제나 공동체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것만을 관심사에 두었다. 그렇게 개인의 삶에서 정치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이슬람의 발흥과 그 영향

서기 7세기 아랍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은 빠른 속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종교적 열광을 바탕으로 한 아랍 전사들은 아랍반도를 비롯,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이란 지역을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1000년 넘게 이어온 페르시아 문명이 이슬람에 흡수됐다.

부족 중심의 초기 이슬람은 정복이 진행되면서 제국이 됐고, 그에 따른 변질이 불가피했다. 이슬람의 이상은 종교와 정치 양 측면에서 두루 권위를 가진 칼리프의 지도 아래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제국이 되면서 정치와 종교는 불가피하게 나뉘었다. 칼리프는 정치적 측면의 지도자로서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인 관료제와 우편, 세금 제도 등을 물려받아 통치했다. 군사는 주로 투르크인 용병을 쓰게 됐다. 이후 이슬람 제국의 정치는 이 투르크용병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이슬람인들의 일상적인 종교생활은 울라마라는 신학자 집단의 권위와 지도 아래로 들어갔다. 이 신학자들은 마호메트의 계시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지도하는 세세한 율법과 경전을 만들었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것에 반대한 근본주의자들은 시아파로 분리되면서 이슬람의 초기 분열도 있었다.

이슬람의 급격한 교세 확장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티칸 제국은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 주변으로 세력이 위축됐다. 인도 북부도 이슬람의 침투로 힌두교 위주의 사회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은 피레네 산맥 이남의 스페인 지역이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 14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11세기를 전후해 투르크 용병들이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오스만투르크는 예니체리라는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상비군 집단을 주축으로 한 제국을 건설해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발칸지역까지 진출했다. 이후 지중해는 오스만투르크와 유럽 기독교 간의 각축장이 됐다.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장아영의 <역사> "그리스 짱! 헬레니즘" 편


장아영의 <역사>는 스승 권승준과의 대화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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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요미, 먼저 이야기 해봐.
- 응... (5분 정도 책 뒤적뒤적 뜸들이다) 그리스부터 시작인가? 그리스가 페르시아랑 싸우고 이겨. 그리고 제국처럼 됐다가 스파르타랑 한 판 붙고 좇돼.

= 아요미! 어디서 그런 나쁜 말을 배웠어. 일단 큰 흐름을 아는 게 중요해. 그리스 문명이 발전하고 그게 변질된 형태인 헬레니즘으로 전파가 되지. 헬레니즘이라는 말 뜻이 원래 그리스적인 거라는 거거든. 그리스는 영어식으로 부르는 거고, 원래 그리스인은 스스로 헬라스라고 불러. 그런데 헬레니즘에서의 그리스적이라는 건, 본질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야.

먼저 그리스의 개화기부터. 기원전 500년 즈음 폴리스 여러 개로 이뤄진 그리스를 정복하러 페르시아 제국이 쳐들어와. 근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쳐서 페르시아를 물리치지.
(이 때가 그리스의 최전성기이자, 민주주의가 가장 꽃 폈던 시기. 그동안 실질적인 정치 참여가 어려웠던 최하층민이 해상전투에서 중요한 역할- 노젓기-을 맡으면서 힘이 세지지. 진정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거지.)
여기서 자신을 얻은 아테네는 다른 도시에 힘을 뻗쳐. 제국 형태가 된 아테네와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 스파르타가 긴 싸움을 벌이는데 이게 펠레폰네소스 전쟁. 하지만 전쟁을 거치며 그리스의 본질이 많이 변하게 되지. 원래 그리스 시민들의 가장 큰 특징이 뭐야?
- 자기 폴리스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거
= 응,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 땅을 갖고 있는 농민이었지. 그래서 자기 땅을 자기가 지킨다는 게 컸어. 평소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중장보병이 된 거지. 무기도 다 자기가 만들어서 전쟁에 참가해. 그 사람들이 정치에도 참가를 했던 거고. 그런데 제국 형태가 되면서 어떻게 되지?
- 빈부 격차가 커져
= 시민들은 자기 땅을 지킬 사람으로 용병을 쓰게 되지. 그리고 점점 개인적인 사색이나 취미로 빠지지. 폴리스나 정치에 대한 사명감은 점점 줄어들고. 그렇게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거야. 그러다보니 처음의 그리스가 갖고 있던 특징들,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특징들이 많이 없어진 채로 다른 제국에 문명이 수출되는 거야.
- 소피스트 생각이 나네.
= 사실 소피스트가 당시 그리스 철학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지. 민주주의가 뭐야,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거잖아. 그런데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게 있다고 말하잖아.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도 들어있긴 하지만 <국가>는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이지. 어떻게 하면 국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가,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반대하잖아. 그럴 수밖에 없지. 자기 스승이 다수결 해서 독약 먹고 죽었으니까. 그런데 현대 우리한테 유명한 플라톤은 사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중심부 인물이 아니었어.
어찌 됐든 그리스 사상을 비롯한 문명은 마케도니아 제국이 땅을 넓히면서, 다른 지역으로 함께 퍼져나갔지. 그리스 이민자들도 늘어나게 됐고. 그리스 문명이 다른 문명의 기본이 됐다는 건 성경을 봐도 알 수가 있어. 아요미 성경이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고 있어?
- ...
= 성경은 기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고. 신약은 먼저 복음서 4개 (공감 복음 3개와 요한 복음), 사도행전 (사도들 고생하는 얘기), 그 다음은 다 편지야. 제일 영향력이 컸던 바오로가 로마에 보낸 게 로마전서, 고린도로 보낸 게 고린도서, 이런 식이야. 기독교를 믿는 집단이 여기저기 퍼져 살았는데 그 집단에 이럴 땐 이렇게 해라, 이건 이런 뜻이다, 그렇게 편지를 전달하는 거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태어난 분파 종교였다가 이렇게 바오로 같은 사람에 의해서 그리스적인 색채를 띠면서 세계종교로 발돋움을 하지. 유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거잖아.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고. 로마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을 채택할 때 얼마나 많은 파가 있었겠어. 그런데 그 중에 살아남는 게 지금의 성경이 된 거지.
- 삼위일체?
= 그리스 신화를 봐. 신이 인간의 특징을 다 갖고 있잖아. 그리스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가 신이자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야.
- 다른 것도 얘기해보자.
= 이 시대의 미스테리인 이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 왜 미스테리야?
= 다른 종교들은 서기로 넘어오면서 거의 체계가 잡히잖아. 그런데 그보다 5백년이나 지나서 만들어지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퍼졌다는 점에서 미스테리지. 이슬람은 정말 심플한 종교야. 마호메트 한 사람이 만들어서 체계가 있지. 이론상으로는 완전무결한 종교라는 평가가 있어.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의 신은 완전히 다른 신이야. 어떤 의미에서 완전히 구약과 신약은 전혀 다른 종교의 경전이야. 오랫동안 만들어져서 그런지 모순되는 말도 많고. 하지만 코란은 그렇지 않지.
- 또다른 이슬람의 특징이 뭐야? 신과 직접 만난다?
= 사제 집단이 있지. 울라마라고. 길거리에 앉아서 율법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들이지. 이슬람은 현실의 세세한 부분도 다 규정해놓는 종교거든. 결국 나중에 그게 발목을 잡지만.
- 그런데 다 정해놓고 있으니까 울라마의 역할도 다른 종교보다 더 적었겠네?
= 그렇겠지. 이슬람은 원래 종교와 정치를 칼리프가 모두 맡도록 돼 있었어. 그런데 그게 지켜진 건 우마미야 왕조 때까지였고 아바스 왕조가 되면서 종교는 전문가 집단에 맡기고 칼리프는 궁정 안으로 들어가버리지.
- 거기에 불만을 느낀 이상주의자들이 시아파고, 아바스 왕조를 따른 게 수니파고.
= 오늘날 이슬람은 대부분 수니파야. 시아파는 이란. 거긴 아직도 종교가 통일돼 있잖아.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는 그렇지 않지.
- 알리가 마호메트의 사촌이야? 친구야?
= 아마 사위인가 그럴거야. 마호메트가 후계자가 없었잖아. 그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시아파야. 이슬람은 따로 공부를 더 해야돼.
- 또?
= 맥닐은 전술이나 전쟁에 쓰인 도구를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 아닌 부분도 있지만 꽤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지. 처음 그리스 시대의 전술은 중장보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방패를 들고 운동 경기 같은 싸움을 하는 거였어. 아요미 300 봤어?
- 아니 못 봤어.
= 300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야. 엄청 몸이 좋은 남자들이 팬티만 입고 나오거든.
- 팬티만 입고 300명이 나와?
= 응, 다 엄청 몸이 좋은 남자들이야. 꼭 봐 아요미. 그런데 마케도니아로 넘어가면서 기병이 발달하지. 말을 타고 달리잖아. 알렉산더 대왕이 천재라고 하는 게, 그 시절에는 보병을 중간에 쫙 깔고 일렬로 가면 그 양 옆에 기병이 가는데 반대편에서 상대가 쳐들어오지, 그럼 일단 보병이 막아, 그러고 있는 사이에 기병이 옆으로 파고드는 거야. 근데 그 타이밍을 알렉산더가 기가 막히게 맞췄다는 거야. 또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변방과 문명, 변방의 유목민은 말을 타고 달려와서 늘 문명을 약탈하잖아. 그런데 중장기병이 발달하면서 그렇게 달려오는 애들을 무거운 도구와 활로 막아내잖아.
- 알팔파를 먹여서.
= 응 그걸 먹여서 말을 키우잖아. 그렇게 큰 말이 나타난 뒤에 중세에 들어서는 활이 아닌 창이 나타나지.
- 엄청 큰 쟁기도 나타나잖아.
= 그래, 볏쟁기라는 게 개발돼서 유럽 중부와 북부의 습기높은 흙을 거둬내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지.
- 거기서 말도 사용하고. 또 다른 건 없어?
= 아요미, 난 인도는 관심이 없어서 제꼈어. 우리 이제 이동할 시간이야. 영화 봐야지. 오늘 공부한 건 아요미가 정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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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얘기한 게 더 있었는데...
다 기억이 안나요미 ㅠㅠ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문명과 야만 / 도시와 종교

BC. 500 ~ AD. 1500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이 시대의 주요한 특징이다.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을 뚜껑을 꽉 닫지 않은 병 안에 떠다니는 미립자로 비유했는데, 문명의 어느 한 지역에서 이 유목민을 추방하거나, 혹은 자기들끼리의 영토 싸움에서 한 쪽이 지면 쫓겨난 유목민들이 다른 지역을 점령하거나 쫓겨가면서 다른 문명 세계에게 영향을 미치는 형국이다. 처음에는 문명의 변방이 이런 유목민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었지만 (중국은 전통으로 굳어진 이이제이로 효과적으로 포섭하거나 다스렸고) 기마 전술이 발전하면서 달라졌다. 스텝지대의 경무장 기마병의 빠름과 문명국의 중무장 기마병의 강함이 일종의 평행 상태를 유지했다. 문제는 이들 중무장 기마병을 관리하는 문명국 변방의 군사 조직을 중앙이 통제할 수 있느냐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강력한 봉건제의 카리스마로 이런 전사계급을 다스리는 전형을 창출해냈다.

문명이 변방으로 퍼져나가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특정 부족이나 도시, 국가만을 위한 종교가 아닌 보편적인 종교의 확산이다. 뿌리가 없는 도시인에게는 생활의 중심과 의지가 될 만한 강력한 신앙이 필요했다. 또 현재의 고난을 부정할 수 있는 마취제가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교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는 발흥지에 따라 특성이 다르지만 세계 종교가 될 만한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종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동류 의식, 현재의 고난이 내세의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는 희망, 그럼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기꺼이 받아들이 게 하는 점. 윌리엄 맥닐은 부정과 고난은 문명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서, 신앙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문명이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 문명 - 수당송 시대

중국이 근대까지 내려오는 제국체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시대다. 제국 체제의 핵심 중 하나는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였다. 이를 통해 강남지역의 풍부한 쌀이 강북 지역에 공급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중국 왕조의 안정성을 지탱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지주-사대부 체제가 지배하는 구조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지방의 지주들이 국가의 관료체제 안으로 편입될 수 있었고, 이들이 다시 지방의 농민들을 통제하고 세수를 걷는 핵심 역할을 했다. 대운하를 통해 남북을 잇는 네크워크가 완성되면서 이런 지주-사대부 지배 체제가 전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중국 문명은 송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화약, 인쇄술 등 각종 기술이 발명됐고 상업이 융성했다. 도시도 발달했다. 그러나 중국은 근대 유럽처럼 상업사회를 거쳐 산업사회로 자생적 발전을 하지 못했다. 상업이 억제된 것은 강력한 국가기구가 상업을 관료 체제 안에서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관료기구가 상업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상업만큼이나 농업도 생산성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농업을 바탕으로한 지주-사대부들은 상업을 효과적으로 견제할만한 힘을 갖추었고, 이 것이 상업의 발달을 일정 수준에 묶을 수 있는 한 원인이 됐다.

2013년 6월 17일 월요일

그리스 로마 문명 - 전쟁의 영향


그리스 문명은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로 만개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자유와 억압의 대립으로 봤다. 그 자유는 '폴리스의 독립성'이라는 독특한 관념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아테네는 제국으로 성장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제국이 된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다. 아테네의 힘은 해군에서 나왔다. 해군의 주축은 토지가 없는 도시 빈민층이었다. 이 빈민층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 아테네의 성장은 복잡한 계급 분화를 가져왔다. 계급 간 대립-농민 대 도시민을 축으로 한 대립이 격화되면서 폴리스를 하나로 묶어 준 공동체 의식도 약화됐다.

그런 와중에 폴리스 간 내전이 터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립했다.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이 보수적인 성향의 시민들과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 간의 다툼으로 분열됐다. 27년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그리스 폴리스들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겪었다. 이후 그리스화에 성공한 마케도니아가 패권을 잡았다. 마케도니아의 힘은, 충성스러운 귀족으로 이뤄진 유능한 장교단과 개량된 중장보병단이었다. 이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폴리스들이 몰락하면서 그리스 시민들의 공공 의식도 약해졌다. 사람들은 공공이 아닌 사적 영역의 세계로 후퇴했다. 개인의 내면과 쾌락을 중시하는 철학들이 대두했다. 그리스 세계의 몰락은 그리스 폴리스 시민들의 이민을 불러왔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따라나선 그리스인들은 서아시아 세계에 정착했다. 그리스 특유의 철학과 서아시아에 뿌리내린 종교 간의 융합현상이 일어났다. 외부로 전파되기 쉬운 그리스 미술 양식들은 인도와 중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전역과 서아시아로 퍼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로마는 이런 헬레니즘 시대에 제국으로 성장했다.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하기 보다는, 군사와 공학 영역에 특이할 정도로 발달했던 것이 로마의 특징이다. 초기 로마의 주축은 강건한 농민 보병이었다. 시민들로 이뤄진 2개의 민회에서 도시 행정과 군사를 관장하는 집정관을 뽑았다. 그와 별개의 원로원이 공화국 정치의 영속성을 부여하는 상임위원회 역할을 했다.

개개의 폴리스별로 갈라진 그리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부족 중심이었고, 그 부족들을 묶는 연맹 안에 쉽게 하나의 도시가 편입될 수 있었다. 로마는 어렵지 않게 이탈리아를 통일했고, 연맹들의 맹주가 됐다.

로마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포에니 전쟁이었다. 카르타고와 지중해 지역 패권을 놓고 3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로마 사회는 완전히 바뀌었다. 소규모 토지를 가진 농민들이 몰락하고, 직업군인들이 등장했다. 이 직업군인들은 군벌들-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의 시대를 열었다. 군벌들이 국내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이를 완화하기 위해 로마는 잦은 대외 정복사업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서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과 함께 흘러들어온 동방의 부는 로마 상류사회를 바꿔놓았다. 아테네를 갈라놓았던 빈부격차가 로마에서도 문제가 됐다.

카이사르는 이런 시기에 로마 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수차례의 격렬한 내전을 겪은 후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대권을 쥐게됐다. 아우구스투스는 군 통수권을 쥐고 교묘하게 막후에서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제도를 설계했다. 대권의 세습은 내란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용인됐다. 하지만, 이후 로마 제국은 주기적으로 내란의 위기를 겪었다.

로마 제국의 안위는 주로 변경과 수도의 주둔군의 충성심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반란과 황제 교체가 잦았다. 그럼에도 로마는 200년 가까이 평화를 유지했다. 로마와 속주는 비무장 부재지주들에 의해 지탱됐다. 로마제국은 본질적으로 도시문명이며, 도시들간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 지주들은 지역 주변 농민들에게서 착취한 자원을 토대로 도시를 운영했다. 비무장지주들에 의한 사회질서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다.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세계의 역사 1부 정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역사시대로의 전환은 농경과 함께 시작했다. 농경과 함께 인간은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쟁기의 발명으로 생산성이 늘어나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겼다. 이 잉여 농산물이 사회의 분화를 가능케 했다. 생산과 직접 관련이 없는 신관, 직인 등이 생길 수 있었고, 사회 조직은 좀 더 복잡한 형태로 진화했다. 이 진화가 문명의 시작이었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종합해볼 때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인이 건설했다. 그 후 시차를 두고 이집트,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에 고대 문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고대 문명 지역은 모두 큰 강 유역에 자리했다. 잉여농산물이 나타날 정도로 생산이 대규모로 이뤄지려면 관개가 필수적이었다. 원시적인 기술 수준에서 대규모의 관개사업이 이뤄지려면 큰 강 유역이어야 했다.

큰 강 유역의 문명 지역과 별개로 중앙 아시아 등의 지역에 분포된 스텝 지역에서는 유목문명이 자리잡았다. 유목민들은 자연 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정착이 불가능했다. 제대로 된 생산이 이뤄지지 않은 대신 유목민들은 일찍부터 기마술에 능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대체로 근대 이전까지 유목민들은 농경 문명 지대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주요 문명권의 역사는 이런 스텝 지역의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기적인 침공에 대응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유목민족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경우 문명권은 혼란과 정치 질서의 재편을 겪었다. 이런 부침이 가장 심했던 곳이 메소포타미아였다. 비옥하지만, 어느 방향에서나 침공이 가능했던 탁 트인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 곳에 자리한 문명들은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최초로 이 지역을 통일했던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등의 왕국들은 이런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기 위해 복잡한 행정 기술을 처음으로 발달시켜야 했다.

문자 뿐 아니라, 관료제, 상비군, 역참을 이용한 우편 제도 등이 문명 초기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달한 제도다. 이런 제도들을 통해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잦은 외부의 침공으로 인한 잦은 혼란은 이 지역 특유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형성에 영향을 줬다. 이런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일신교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나일강만 통제하면 어려움 없이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최초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한 고급 문화가 나일강을 중심으로 점차 귀족과 지방으로 퍼졌기 때문에 이후 유목민족의 침공에도 문명권이 살아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인더스 문명은 북쪽의 침공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인더스 문명이 붕괴된 후 인도 문명의 중심은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겨졌다. 잦은 침공으로 인해 부침을 겪은 인도 문명권은 독특한 두개의 문화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엄격한 신분제도인 카스트와, 신비주의와 복잡한 의식이 결합된 종교였다. 인도 문명권의 사람들은 이 카스트에 대한 소속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신민들의 강한 소속감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결사체가 나오지 못했다.

중국에서도 황허를 중심으로 독자적 문명이 발생했다. 이 문명은 최초의 정치적 통일체가 붕괴하면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전국시대라고 불린 이 시기에 중국 향후 문명을 지배할 지배적인 사상들이 탄생했다. 가장 중요한 유교는, 다른 문명권에서 출현한 종교와 달리 극도로 현세적이었다. 신비주의가 철저하게 배격되고, 전통과 윤리의식을 강조한 보수적인 성향의 유교는 중국 사회의 질서를 떠 받치는 기본 사상이 됐다.

중국과 반대편에서는 그리스 문명이 탄생했다. 이 곳은 처음부터 정치적 통일체가 없이 각 폴리스별로 분산된 형태의 문명이 성립됐다. 일찍부터 포도주와 올리브유 교역을 통해 폴리스들이 성장하면서 다른 문명과 달리 도시와 농민들간의 강한 유대감이 이 문명의 특징을 이뤘다. 폴리스는 이런 도농간의 강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또한 그리스 특유의 중장보병 전술도 폴리스에 대한 소속감과 열광의 기본 바탕이었다.